Charles Hodge
찰스 핫지는 그를 제외하고는 미국 칼빈주의와 장로교 신학을 논할 수 없을 정도로 미국 내외 개혁교회 전반에 영향을 끼친 정통 개혁신학자이자 보수 장로교 신학자이다. 그는 개혁주의 신학 전통을 이어 간 프린스턴 신학의 대표적 옹호자로서 일평생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의 권위를 강력히 주장하였으며 그러한 그의 신학과 사상들은 20세기의 여러 근본주의자들과 복음주의자들에게 계승되었다.
태어난 지 7개월 만에 부친을 여의고 어머니와 친척들의 손에서 성장했으나 어린 시절부터 장로교 신앙 교육을 받았으며 가족이 다니던 교회 목사, 훗날 프린스턴 칼리지 총장이 되는 애시블 그린의 영향
찰스 핫지는 그를 제외하고는 미국 칼빈주의와 장로교 신학을 논할 수 없을 정도로 미국 내외 개혁교회 전반에 영향을 끼친 정통 개혁신학자이자 보수 장로교 신학자이다. 그는 개혁주의 신학 전통을 이어 간 프린스턴 신학의 대표적 옹호자로서 일평생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의 권위를 강력히 주장하였으며 그러한 그의 신학과 사상들은 20세기의 여러 근본주의자들과 복음주의자들에게 계승되었다.
태어난 지 7개월 만에 부친을 여의고 어머니와 친척들의 손에서 성장했으나 어린 시절부터 장로교 신앙 교육을 받았으며 가족이 다니던 교회 목사, 훗날 프린스턴 칼리지 총장이 되는 애시블 그린의 영향으로 1812년 만 14세의 나이로 장로교 목사 양성을 목적으로 창설된 프린스턴 칼리지에 입학하였다. 프린스턴 칼리지 재학 중에는 신학 전통 보전을 위해 별도로 설립된 프린스턴 신학교의 초대 교수 아치볼드 알렉산더로부터 헬라어 수업을 받았으며 그의 순회 설교 여행에 동행하면서 특별한 인연을 쌓게 되었다. 1815년 알렉산더의 감화 아래 종교적 각성을 경험한 핫지는 목회자의 길을 걷기로 결심하였고 학부 과정을 마치자마자 바로 프린스턴 신학교에 진학하여 알렉산더의 명실상부한 수제자이자 후계자가 되었다. 1819년 프린스턴 신학교를 졸업한 후 필라델피아 등지에서 설교 사역을 펼쳤고 1821년 마침내 목사 안수를 받았다. 한편 1820년부터 프린스턴 신학교의 조교수로 임명되어 성경 원어를 가르치기 시작했으며 1822년에 알렉산더의 추천으로 동양 문학 및 성경 문학 교수로 정식 임용되었다가 1840년에 교의학 교수가 되면서 성경 원어와 교의학 분야에서의 교수직을 말년까지 수행하였다. 모교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50년 이상을 교단에 서서 3,000명이 넘는 학생을 길러 낸 핫지는 새뮤얼 밀러와 아치볼드 알렉산더가 세상을 떠난 후 프린스턴 신학 전통의 대표자로 인정받았고 성경주해신학과 교의신학 분야에서 교수로 몸담았던 그의 아들들 C. W. 핫지와 A. A. 핫지를 통해 자신의 신학 계보를 이어 나갔다.
핫지는 일찍부터 저술 활동에도 집중하여 수많은 신학적 저작과 논문들을 남겼다. 그의 대표작인 대작 『조직신학』(Systematic Theology)은 그 체계와 내용에 있어서 칼빈과 투레틴의 맥을 잇는 정통 개혁신학 수장으로서의 그의 위상을 드높였고 그가 남긴 여러 성경 주석서들과 더불어 성경적 조직신학의 전형을 보여 주었다. 핫지는 철학적 사조가 신학을 압도한 시대를 살았지만 한결같이 당시의 유물론적이고 무신론적인 불신과 관념론적이고 범신론적인 사변에 맞서 정통적 입장을 변증하였다. 워필드가 경모의 마음을 담아 칭한 대로, 찰스 핫지는 그야말로 정통 개혁신학을 견실하게 보수한 칼빈주의자로서 당대의 조류에 휩쓸리지 않고 웨스트민스터 표준 문서들에 충실한 신학자였음에 이견이 있을 수 없는 위대한 “성령의 신학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