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토벤 시대부터 역사상 처음으로 자신의 작품이 아닌 다른 작곡가의 작품을 전문적으로 연주하기 시작한 피아니스트들이 나타났다. 이는 18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거의 없던 일이다. 다른 무엇보다 전문 피아니스트가 많이 없었던 탓이다. … 모차르트, 클레멘티, 베토벤이 피아니스트였을 때의 대중은 운이 좋았다. 그 밖의 피아니스트들은 자신의 하찮은 협주곡과 변주곡, 왈츠, 포푸리, 전쟁 음악, 야니차렌 무지크 등을 연주하며 나타났다 사라지곤 했다. … 그렇다고 대중을 위한 음악회라는 제도가 아직 널리 보급된 것은 아니었다. 이는 훨씬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이루어진다.
--- 「초창기」 중에서
언젠가는 일어날 일이었다. 18세기의 마지막 25년 동안, 공개 연주회라는 제도가 순조롭게 자리 잡고 피아니스트가 국제적 관심을 사로잡기 시작하면서 새로운 문제가 대두되었다. 피아니스트가 연주회장에서 청중 앞에서 연주할 때는 어떻게 앉아야 하는가? 등지고? 마주 보고? 이는 전에 없던 새로운 문제였다. 모차르트와 클레멘티는 대부분 연주회장보다 살롱에서 연주했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완전히 해결한 사람은 얀 라디슬라프 두세크다. 그는 최초로 관객을 오른편에 두고 앉았다. 이렇게 하면 두 가지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다. 자신의 고귀한 옆모습과 피아노의 곡선을 청중에게 보여줄 수 있었고, 세워놓은 피아노 뚜껑을 공명판 삼아 음색을 객석에 바로 전달할 수 있었다.
--- 「옆모습과 연주여행」 중에서
많은 사람들이 피아노를 칠 줄 알게 되면서 피아니스트들의 연주를 듣고 싶어했고, 실제로 들었다. 피아니스트들은 유럽 이곳저곳에서 우후죽순처럼 나타났고, 모두 파리를 본거지로 삼기 위해 서둘러 몰려들었다. (하지만 당시 프랑스 출신 피아니스트 가운데 중요한 인물이 거의 없었다는 점이 놀랍다.) 리스트와 탈베르크 같은 거장, 레오폴트 드 마이어처럼 쾅쾅 내리치는 연주자, 쇼팽 같은 시인, 헤르츠 같은 살롱 연주자, 알캉 같은 괴짜, 헬러와 헨젤트 같은 수줍은 연주자, 리톨프와 루빈시테인 같은 외향적인 음악가, 클라라 슈만과 한스 폰 뷜로 같은 학구적인 음악가, 드라이쇼크 같은 쇼맨이 나타났다. 이들은 열심히 활동했고, 음악가들의 활동 양식은 정형화되었다.
--- 「낭만주의와 그 규칙」 중에서
리스트가 피아노를 연주하면 여성들은 꽃다발 대신 보석을 무대 위로 던졌다. 그들은 넋을 잃고 소리를 질러댔고 기절하는 사람까지 있었다. 아직 움직일 수 있는 사람들은 이 멋진 신사의 이목구비를 보기 위해 미친 듯이 무대로 달려 나갔다. 여성들은 그가 일부러 놓고 간 초록색 장갑을 두고 다툼을 벌였다. 어떤 여성은 리스트가 피우다 남긴 담배꽁초를 찾아내 죽는 날까지 가슴에 품고 다녔고, 어떤 여성들은 그가 연주 중 끊어뜨린 피아노 현을 값비싼 유물이라도 되는 양 가져갔다. 이 ‘유물들disjecta membra’은 액자에 보관되어 숭배되었다. 리스트는 단순한 연주회가 아니라 야단스러운 축제를 벌였다.
--- 「천둥, 번개, 최면, 성적 매력」 중에서
대부분의 위대한 피아니스트는 작곡가였다. 하지만 리스트 이후로는 위대한 작곡가가 많지 않았다. 따라서 대부분의 위대한 작곡가는 피아니스트였다. (바그너, 베르디, 베를리오즈는 예외적인 세 명의 위대한 음악가다.) 그들의 업적에서 더 큰 가치를 지닌 것은 무엇일까? 모차르트, 베토벤, 쇼팽의 경우에는 작곡이었다. 그들은 훌륭한 피아니스트였던 만큼 훌륭한 작곡가였다. 브람스와 그리그의 경우에도 작곡이다. 브람스는 피아니스트로서 훈련을 받았고, 젊었을 때는 훌륭한 피아니스트였을 것이다. 하지만 손가락을 유연하게 움직일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연습하지 않았고, 머지않아 전문가들은 그의 연주를 비웃기 시작했다.
--- 「 피아노를 연주하는 작곡가」 중에서
키가 크고 음침하고 호리호리하며 잘 웃지 않는 데다 얼굴에는 깊게 주름살이 패고 머리는 (박박 밀었다고 할 정도로) 바짝 자른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라는 인물은 대중에게 언제나 도주 중인 범죄자를 떠올리게 했다. 그가 긴장을 풀거나, 비탄에 잠긴 그의 러시아풍 얼굴이 누그러지거나, 엄숙함이 조금이라도 흐트러지는 것을 본 사람이 없다. 하지만 피아노 앞에서는 결코 실수하는 법이 없는 그 놀라운 손은 건축적인 견고함을 갖춘 구조물에 청동을 용접하듯 청동 같은 울림을 자아냈다. 호프만이 다채로운 연주를 선보이는 색채의 전문가였다면, 라흐마니노프는 튼튼한 토대로부터 연주를 쌓아올리는 건축가적 피아니스트였다.
--- 「 피아노계의 청교도인」 중에서
쇼팽 이후로 두 명의 작곡가로부터 피아노 기교가 크게 발전했다. 이들은 바로 프랑스의 클로드 드뷔시와 러시아의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였다. 드뷔시는 새로운 건반 연주 방식을 실험했고 마침내 해답을 찾아냈다. 드뷔시 이전 프랑스 피아노 음악은 19세기의 방침을 따르고 있었고, 포레는 쇼팽과 슈만의 영향을 크게 받은 우아한 피아노 작품을 작곡했으나 화음 및 선율은 상당히 독창적이었다.
--- 「 새로운 철학, 새로운 스타일」 중에서
19세기에 위대한 피아니스트의 보고였던 폴란드는 러시아에게 점령당한 이후에는 잠잠했다. 아마 쇼팽 콩쿠르의 우승자이자 재능 있는 피아니스트인 크리스티안 지메르만이 전통을 이어갈 것이다. 최근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는 유고슬라비아 피아니스트 이보 포고렐리치는 쇼팽 콩쿠르의 준결선에 진출하지 못했을 때의 일로 유명해졌다. 그가 준결선에서 탈락하자 마르타 아르헤리치가 심사위원단에서 사임하면서 부당하다며 소란을 피웠던 것이다. 젊고 잘생기고 별났던 포고렐리치는 갑자기 인기가 높아졌다. 그에게도 소질은 있었지만, 그가 낭만주의 피아노의 글렌 굴드가 되고 싶어한다며 어리둥절해하는 평론가들도 있었다.
--- 「 21세기 학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