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격의 향상이 ‘100마일 시대’를 열었다는 가설은 틀림없는 것 같다. MLB 투수들의 스피드는 체격과 함께 증가했다. 2019년 기준으로 MLB 투수들의 평균 키는 192cm, 몸무게는 98kg이다. 2000년 MLB 선수들의 평균 체격은 189cm, 89kg이었다. 전설적인 강속구 투수 놀란 라이언Nolan Ryan은 1974년 세계 최초로 100마일이 넘는 공을 던졌다(물론 시대에 따라 속도 측정 방법이 다른 탓에 기록의 편차가 있다). 1970~1980년대 MLB를 주름잡았던 그를 많은 투수들이 우상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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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인간의 한계를 극복한다”는 말을 좋아한다. 2010년 미국 스포츠의학연구소 글렌 플레이직Glenn Fleisig 박사는 “인간이 던질 수 있는 최고 속도는 시속 100마일”이라고 주장했다고 한다. 그가 설정한 이 한계를 MLB 투수들은 이미 넘어섰다. 플레이직 박사는 “100마일보다 빠른 공을 던지면 팔꿈치 인대가 견디기 어렵다”고도 했다. 나는 100마일이 한계라는 말보다 이 말에 더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큰 체격을 갖추고, 근력이 강해지고, 관리를 잘 받는다면 투수는 더 빠른 공을 던질 수 있다. 그러나 인대와 관절 강화에는 한계가 있다. 강속구의 시대에 부상 위험이 더 커진 이유다. 투수에겐 ‘최고 구속’보다 ‘강속구를 지속적으로 던질 수 있는 폼’이 그래서 더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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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비 시프트는 편견을 깨고 탄생했다. 코치나 선배로부터 배운 지식과 선수 개인의 고정관념에서 탈피하고, 타자를 잡는 데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찾은 것이다. 보드로는 모든 공을 끌어당겨서 치려는 윌리엄스의 타격을 보고, 기억했다. 2010년 이후 수비 시프트는 과학의 영역으로 들어왔다. 세이버메트릭스의 효율성과 중요성을 MLB가 인식하면서부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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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크라켄은 BABIP을 연구하면서 ‘컨트롤의 마법사’ 그렉 매덕스의 평균자책점이 1999년 갑자기 올라간 이유를 살폈다. MLB에서 가장 꾸준하며 안정적인 투수인 그는 1993~2003년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에서 뛰며 최전성기를 달렸다. 1999년 19승 9패를 거둔 그의 피안타율은 0.294, 평균자책점은 3.57에 이르렀다. 1998년(18승 9패, 피안타율 0.220, 평균자책점 2.22), 2000년(19승 9패, 피안타율 0.238, 평균자책점 3.00)과 비교하면 1999년 기록은 미스터리했다. 맥크라켄은 이를 BABIP 때문이라고 봤다. 23년 통산 BABIP이 0.281이었고, 전성기 BABIP이 0.250~285였던 매덕스는 1999년에 매우 불운했다는 것이다. 수비의 도움도 받지 못해 피안타율과 평균자책점이 크게 올랐다. 그리고 이듬해 제자리를 찾았다.
이 기록을 보니 팬들이 왜 ‘바빕신’이라고 부르는지 알 것 같았다. 2020년 김광현처럼 시즌 BABIP이 통산 기록보다 월등히 낮다면 바빕신의 가호가 깃든 것일까? 1999년 매덕스처럼 BABIP 값이 갑자기 치솟으면 바빕신에게 버림을 받은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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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몇 년 동안 플라이볼 혁명이라는 ‘현상’에 집중했지만, 타격의 ‘본질’이 바뀐 건 아니다. 최대한 정확하게 쳐서 강한 타구를 만드는 건 시대를 초월한 목표다. 최적의 히팅 포인트와 자연스러운 폴로 스루가 그래서 중요하다. 스윙 궤적이나 발사각은 스탯캐스트에 의한 현상 분석이다. 이것이 결코 타격의 목표일 수 없는 것이다. 그 사실을 윌리엄스, 그리고 옐리치로부터 나는 또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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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치 터널은 상상 속 공간이다. 이 터널이 길면 타자가 투구를 파악할 시간이 그만큼 짧아진다. 패스트볼이라면 타자가 스윙하기 전에 포수 미트 안으로 들어갈 것이다. 변화구라면 타자의 스윙 궤적을 피해서 꺾일 가능성이 크다. 반대로 공이 터널을 빨리 빠져나온다면 타자는 공을 더 오래 볼 수 있다. 투수가 공을 던지자마자 패스트볼이라는 걸 타자가 알아챈다면 어떻게 될까? MLB 타자는 100마일의 강속구도 쳐낼 것이다. 마찬가지로 타자는 변화구에도 속지 않을 것이다. 때문에 타자가 체감하는 속도는 스피드건에 찍히는 숫자와 차이가 있다. 류현진처럼 디셉션이 좋은 투수가 피치 터널까지 길게 만든다면 타자가 구종을 파악하기 어려워진다. 류현진이 140km대의 공을 자신 있게 던지고, 타자들이 그걸 쉽게 공략하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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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에는 훌륭한 투수가 여럿 있었지만, 내게는 최동원 선배가 가장 특별했다. 아마추어 시절부터 선배의 피칭을 보면 입이 떡 벌어졌다. 1982년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선배를 가까이에서 볼 기회가 있었다. 다이내믹한 투구 폼, 강력한 패스트볼, 폭포수처럼 떨어지는 커브, 그리고 정확한 제구……. 모든 게 경이로웠다. 그리고 선배를 이겨보고 싶었다. 기회는 우연히 찾아왔다. 내가 프로 2년차였던 1986년 4월 19일, 부산에서 최동원 선배와 맞대결한 것이다. 당시 최동원 선배는 12연승 중이었다. 내게는 져도 그만인 승부였다. 팽팽한 투수전은 나의 프로 첫 완봉승(9이닝 6피안타)으로 끝났다. 최동원 선배는 5피안타 1실점(3회 송일섭 선배에게 피홈런)으로 완투패 했다. 운이 좋았다. 그래도 어쨌든 이긴 건 이긴 것이다. 최동원 선배와 ‘맞짱’을 떠서 밀리지 않은 것만으로도 자신감이 생겼다. 그해 내가 24승을 거둔 원동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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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프로에서 10년 이상의 경력을 쌓은 뒤 동료의 조언을 듣고 피칭 전략을 바꿨다. 구창모는 나보다 열 살 젊은 나이에 새로운 피칭을 만들었다. 기술 발달로 인해 자신의 투구를 더 객관적이고 과학적으로 보게 된 덕분이다. 이게 피치 디자인이다. 과거의 데이터를 통해 현재의 나를 분석한다. 그리고 멋진 미래를 그려보는 것이다. 천편일률적인 자세와 반복 훈련을 강조했던 시대는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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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수에게는 공이 유난히 잘 들어가는 날이 있다. 이를 “공이 손에 서 긁히는 날”이라고 흔히 표현했다. 오래전부터 회전이 많은 공이 위력적이라는 걸 다들 경험으로 알았다. 스탯캐스트는 감이 아니라 데이터로 자신의 투구를 인식하고 분석하도록 만들었다. 과학적인 프로세스를 통해 결점을 찾고 보완할 수 있게 되자 ‘공이 손에 긁히는 날’을 기다리는 게 아니라, 바우어처럼 강하고 효과적인 회전을 만드는 게 가능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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