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야의 무법자〉를 비롯해 제목들은 그 번역에 문제가 많지만, 세상은 무법자가 설치는 황야라는 것을 레오네의 영화가 보여준다는 점에서는 도리어 그럴듯하다. 무법자들이 설치는 황야가 레오네의 미국이다. 미국은 화려한 뉴욕이 보여주는 꿈의 세상도, 민주주의의 고향도 아니다. 도리어 미국은 무법천지다. 돈과 총이 지배하는 더러운 무법천지다. 미국은 또한 세계의 무법자다. 돈과 총으로 세계를 지배하는 악랄한 무법자다. 그런 무법자 미국을 무명자가 죽인다. 미국만이 아니다. 세계를 돈과 총으로 지배하는 악당들은 많다. 무명자여, 그런 악당들을 모조리 제거하라. 물론 쉽지 않다. 자칫하다가는 네가 죽을 수 있다. 영화는 그런 위험을 보여준다. 무명자는 권력자에게 폭행을 당하고 고문도 당한다. 그러나 끝내는 권력자 악당들을 처리한다. 그러고는 다시금 홀로 떠난다. 영웅 대접을 받거나 보안관 따위로 임명되지도 않으며 미녀의 사랑을 얻지도 않는다. 그가 악당을 죽이는 것은 무슨 인연 따위 때문이 아니다. 그에게는 혈연도, 지연도, 학연도 없다. 그는 우연히 그 마을에 왔다가 그곳을 지배하는 권력자 악당을 죽이고 다시 떠나간다. 그가 바란 것은 돈 몇 푼이지만 그것도 먹고살기 위한 최소한일 뿐 무슨 사업을 위한 자본 따위가 아니다.
--- 「황야의 무명자」 중에서
〈석양의 갱들〉의 최초 제목은 〈옛날 옛적 혁명〉(Once Upon a Time in Revolution)이었다. 주제는 이데올로기에 대한 투쟁과 헌신이었다. 따라서 레오네의 마지막 서부극인 이 영화는 그의 정치적 담론이 은유나 신화적 변형에 의해 더욱 명확해졌음을, 그리고 정치적 참여에 대한 레오네의 반감이 절정에 이르렀음을 보여준다. 정치적 환멸을 불러일으키는 이 작품은 어쩌면 레오네의 정치적 유언인지도 모른다. 개인적인 분노가 절정에 달했을 때, 다시 말해 체코슬로바키아를 점령한 소련 전차를 보면서,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 초까지 이탈리아에 만연했던 파시스트적인 이데올로기의 부활을 목격하면서 작품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가 선언하듯 “이러한 사건들은 내가 영화에서 보여준 나의 아나키즘 선택에 확신을 주었을 뿐”이었다. 영화는 계급의 전복 없이 이상이 죽어가는 혁명의 부정적인 측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래서 영화 첫 부분에 나오는 마오쩌둥의 인용문에서 레오네가 ‘혁명이란 하나의 계급이 다른 계급을 뒤집는 폭력 행위’라고 한 부분을 생략했는지도 모른다. 따라서 두 주인공은 레오네의 다른 어떤 캐릭터에서보다 감독 자신의 모순된 얼굴을 대변한다. 두 주인공은 이데올로기의 수호자는 아니지만, 반역자이고 허약하며, 개인주의적인 반영웅들이다.
--- 「〈석양의 갱들〉의 정치학」 중에서
레오네는 출발부터 완전히 달랐다. 서부가 소멸하는 시기의 서부극의 영웅들인 옛날 사람들과 새로운 철도 시대의 대비를 통해 미국 건국 역사의 실체를 보여주고자 했다. 가령 사업가가 되고자 하는 야심을 품고 철도회사에 고용된 킬러 프랭크(헨리 폰다 분)와 복수심에 불타는 마지막 개척자인 하모니카(찰슨 브론슨 분) 사이의 결투 앞에, 철도 부설로 재벌이 된 모턴과 같은 자들에 의해 곧 황금시대가 끝나는 것에 관한 음울한 대화를 끌어낸다. 하모니카가 “모턴 같은 자들이 계속 나타나 끝내고 말 거야”라고 한다. 그 대화 사이에 철로를 까는 노동자들의 쇼트가 삽입된다. 그 쇼트는 마지막 쇼트와 대비된다. 열차가 새로운 마을에서 나옴과 동시에 하모니카는 산적 샤이안의 시신을 끌고 언덕 저편으로 말을 타고 사라진다. 기술에 양보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운명으로 받아들임과 동시에 분노한다. 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t Brecht, 1898~1956)가 묘사한 미국처럼 스위트워터는 야만과 문명이 충돌하는 서부극 특유의 테마를 말할 뿐 아니라, 사업가와 농부, 자본가와 킬러를 대비시켜 자본주의의 가해자(착취자)와 피해자(피착취자)의 끝없는 투쟁을 보여준다.
--- 「〈옛날 옛적 서부〉」 중에서
맥스는 아메리칸 드림의 허상과 미국의 포악함을 단적으로 상징하는 캐릭터로서 겉으론 멋진 쿨가이 같지만 실제로는 심각한 정신질환 유전자를 물려받은 탓에 어떤 흉악하고 야비한 짓을 해도 전혀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 선천적 사이코패스다. 맥스는 미국이란 나라의 본질과도 상통한다. 즉 겉보기에는 자유롭고 풍요로우며 모든 민주적 가치를 이룬 것 같지만 미국 역사의 태생은 학살과 강탈, 폭압을 비롯한 야만으로 점철되었다. 그리고 이런 악랄한 만행의 유전자가 시대와 세대가 흘러도 없어지지 않고 범죄와 부패로 대물림되고 있다는 점을 맥스라는 인물로 드러내는 것이다. 따라서 이 영화는 맥스를 통해 돈과 명예를 위해선 우정, 의리, 신뢰와 같은 숭고한 가치를 배신해야만 아메리칸 드림을 이룰 수 있고, 성공 이후에도 여전히 추악한 인생을 살아야만 성공을 유지할 수 있다는 아메리칸 드림의 본질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 「누들스와 맥스」 중에서
레오네는 채플린의 〈살인광 시대〉에서 힌트를 얻어 〈석양에 돌아오다〉를 만들었다고 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레오네는 채플린을 좋아했고, 살인광을 모든 도적이나 현상금 사냥꾼의 원형이라고 생각했다. 특히 두 영화 사이에는 많은 유사점이 있다. 살인을 비즈니스로 생각하는 점, 변장에 능한 점, 열차로 국토를 횡단하면서 범죄를 저지르는 점 등이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레오네는 채플린을 좋아했고, 살인광을 모든 도적이나 현상금 사냥꾼의 원형이라고 생각했다. 특히 두 영화 사이에는 많은 유사점이 있다. 살인을 비즈니스로 생각하는 점, 변장에 능한 점, 열차로 국토를 횡단하면서 범죄를 저지르는 점 등이다. 레오네는 〈살인광 시대〉가 셀린(Louis-Ferdinand Celine, 1894~1961)의 『밤의 끝까지 여행을(Voyage au bout de la nuit, 1932)』을 연상시킨다고 했다. 레오네가 20세에 읽은 그 책은 그에게 평생 잊을 수 없는 책이 되었다고 하는데, 그 소설에 단 하나 존재하는 가치관이란 살아남는다는 것뿐이고, 주인공은 부패하거나 비겁하고 잔인한 권력자들에게 항상 불신감을 품는다.
--- 「〈살인광 시대〉와 문학작품의 영향」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