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인류는 누구일까요? 최초의 인류는 1974년 에티오피아 아파르 지구에서 발굴되었다. 당시 발굴대가 즐겨 듣던 노래 가사를 따 ‘루시’라고 이름 지었다. 루시는 키 107cm, 몸무게 28kg인 성인 여성으로 밝혀졌다. 근처에서 더 큰 두개골이 발견되었는데, 남성으로 추정되어 루시앙으로 불린다. 루시는 약 318만 년 전에 살았고 직립 보행을 하였다. 외양과 두뇌가 침팬지에 가깝고, 수습된 뼈가 인간 골격의 28%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 등 논란 속에서도 ‘최초의 인간’이라 불렸다.
그러다 1992년, 루시가 발견된 지역 인근에서 ‘아르디’가 발굴되었고, 루시는 아르디에게 최초의 인류 자리를 내주었다. 아르디는 약 440만 년 전에 살았고, 직립 보행을 하였으며, 물건을 세게 쥘 수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2 세계의 선사 문화와 고대 문명, 01 세계의 선사 문화」중에서
세계 4대 문명 가운데 중국 문명만 지속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인류의 고대 문명은 티그리스 · 유프라테스강, 나일강, 인더스강, 황허강 등 큰 강의 유역에서 시작되었다. 이들 강 주변의 비옥한 토지로 인구가 유입되면서 고대 문명은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하지만 기원전 2000년부터 기온이 급격히 상승하면서 티그리스 · 유프라테스강, 나일강, 인더스강 유역에서는 사막화가 진행되었고 사람들은 흩어지기 시작했다. 황허강 유역의 북쪽도 사막화가 진행되었다. 하지만 황허강의 서쪽은 고원과 산맥이고 남쪽은 아열대 우림지역이며 동쪽은 바다이다. 이에 중국은 기후변화의 영향을 덜 받고, 외부의 침입도 적게 받았다. 지리적 환경 덕분에 중국은 문명을 이어갈 수 있었다.
---「세계의 선사 문화와 고대 문명, 02 도시 국가의 등장」중에서
인류 4대 문명보다 앞선 랴오허 문명은 어느 나라가 형성하였나요? 중국은 1980년대 랴오허 강(요하) 부근에서 대규모 유적지들을 발견하였다. 이것이 인류 4대 문명보다 1,000년이나 앞서는 랴오허 문명이다. 중국에서는 동북공정의 일환으로 ‘중국 문명은 랴오허 문명과 황허 문명 등이 융합하여 형성되었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는 랴오허 지역 사람들이 남하하여 황허 문명을 만들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랴오허 지역은 한국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 강성한 고대 제국 고구려,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의 강역이었다. 이곳에서 발견된 빗살무늬 토기, 계단식 돌무지무덤, 치(雉)가 있는 석성, 비파형 동검, 옥결(옥고리) 등은 중국 중원에서는 발견된 적이 없고 만주와 한반도에서만 발견되었다.
싱룽와 · 차하이 유적(기원전 6200~기원전 5200년경)에서 발견된 빗살무늬 토기와 옥결은 한반도에서 발견된 것들과 동일한 형태를 지니고 있다. 이로써 랴오허 문명의 근원이 중국 중원에 있다는 주장은 설득력을 잃게 되었다.
훙산 문화(기원전 4700~기원전 3000년경)를 대표하는 뉴허량 유적에서 발견된 피라미드식 돌무지무덤은 고구려와 백제의 돌무지무덤과 유사하다. 뉴허량 유적의 여신상 옆에서는 곰 형상들이 발견되었는데, 이는 고조선 단군 신화의 웅녀족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한다.
샤자뎬(하가점) 하층 문화(기원전 2000~기원전 1500년경)에 속하는 싼쭤뎬과 청쯔 산에는 치가 있는 석성 수천 개가 널려 있다. 이 석성은 고구려와 백제에 영향을 주었고, 조선 시대에 쌓은 공심돈에서도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더 알아보기」중에서
마라톤 전투의 승전보를 전하고 죽은 병사 이야기는 사실인가요? 기원전 490년, 페르시아군은 아테네를 공격하기 위해 아테네 동북부에 있는 마라톤 해안에 상륙하였다. 아테네 시민들은 소수였지만 페르시아군과 격전을 벌여 대승을 거두었다. 아테네의 병사 페이디피데스는 승전보를 알리기 위해 전속력으로 아테네를 향해 달렸고, 시민들에게 승리의 소식을 전한 뒤 곧바로 숨을 거두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마라톤 경기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헤로도토스의 『역사』에는 페이디피데스가 200km를 이틀 동안 달려 스파르타에 도움을 요청하였다는 사실만 기록되어 있다. 한편 마라톤 전투에서 패한 페르시아의 후예 이란은 마라톤 경기에 참여하지 않고 있다.
---「3 고대 제국들의 특성과 주변 세계의 성장, 05 고대 그리스의 민주주의 체제와 문화」중에서
클레오파트라가 과연 세계를 바꾸었을까요? 로마의 권력자 카이사르에게는 폼페이우스라는 사위가 있었다. 폼페이우스는 아내가 죽자 귀족들과 제휴하고 장인 카이사르를 등졌다. 이에 카이사르는 “주사위는 던져졌다.”라는 말과 함께 군대를 거느리고 루비콘강을 건너 로마로 진격하였다. 폼페이우스는 이집트로 도망갔으나 이집트 왕 프톨레마이오스의 부하에게 암살당하였다.
카이사르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의 누이이자 아내이며 공동 왕인 클레오파트라와 손을 잡고 프톨레마이오스 왕을 몰아냈다. 그러나 로마로 개선한 카이사르는 로마 공화정이 무너질 것을 우려한 자들에게 살해당하였다. 영국의 극작가 윌리엄 셰익스피어는 희곡 『줄리어스 시저』에서 암살을 도모한 귀족 사이에서 양아들 브루투스를 발견한 카이사르가 “브루투스, 너마저!”라고 말하며 쓰러졌다고 묘사하였다.
브루투스는 로마 시민들 앞에서 “나는 카이사르를 사랑했지만 로마를 더 사랑하였다.”라고 연설하였다. 그러나 로마의 정치가 안토니우스가 “저들은 로마의 영웅을 비겁하게 죽인 암살자입니다.”라고 말하며 카이사르의 주검과 유서를 공개해 민심을 흔들었다. 결국 브루투스 일파는 로마를 떠나 도망갔다.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의 양자이자 후계자인 옥타비아누스와 유대 관계를 맺기 위해 그의 여동생 옥타비아와 결혼하였다. 하지만 클레오파트라에게 마음을 빼앗겨 옥타비아와 이혼하고 클레오파트라와 결혼하였다. 이후 옥타비아누스는 아그리파 장군에게 지휘를 맡겨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연합군을 악티움 해전에서 물리쳤다.
---「더 알아보기」중에서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왜 크리스트교를 공인했을까요?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독자적인 황제권을 주장하는 막센티우스를 처단하기 위해 312년 출정하였다. 전세가 불리해져 큰 위기를 맞던 중 꿈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계시를 받아 전쟁에서 승리하였다고 한다. 이듬해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밀라노 칙령을 내려 크리스트교를 공인하였다. 그는 유일신 사상인 크리스트교를 이용하여 로마를 하나로 통합하고 황제권에 신성함을 부여하고자 하였다.
또한 그는 니케아 공회의에서 아타나시우스파의 삼위일체설을 정통으로 삼은 니케아 신조를 반포하였다(325). “하느님은 그분(아들)을 무에서 만들었다.”라고 주장한 아리우스는 이단으로 몰렸다. 신은 진리에 대해 침묵하는데 인간이 회의에서 진리를 결정하였고, 이후 종교적 판단은 허락되지 않았다.
---「4 크리스트교 문화의 형성과 확산, 03 비잔티움 제국」중에서
제1차 세계 대전은 과연 누구를 위한 전쟁이었을까요? [서부 전선 이상 없다]는 독일 작가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의 소설을 원작으로 제작된 반전 영화이다. 제1차 세계 대전 중 독일군으로 자원입대한 학도병들이 겪었던 참혹한 서부 전선의 상황을 보여 준다.
열 여덟 살이 된 파울은 급우들과 함께 군에 입대하였다. 그들은 서부 전선에 배치되었다. 전투가 치열하게 전개되면서 참호 속의 급우들은 차례차례 쓰러져 갔다. 파울은 교회 근처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프랑스 병사를 죽였다. 서로 아무런 원한도 없이 전쟁의 광란 속에서 공포에 사로잡혀 무의식적으로 상대를 죽인 것이다. 파울은 죽은 병사의 주머니 속에서 나온 가족사진을 보고 망연자실하였다. 과연 누구를 위한 전쟁인가?
오랜만에 전투가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어디선가 하모니카 소리가 들려왔다. 병사들은 모두 귀를 기울였다. 그때 어디선가 나비 한 마리가 나타나 파울의 눈앞으로 지나갔다. 파울의 눈은 나비를 따라갔다. 나비를 따라 참호에서 몸을 일으켜 나비에게 손을 내미는 순간, 온몸에 전율을 느꼈다. 파울은 나비가 내려앉듯 그렇게 내려앉았다. 그날 전선은 종일 조용했다. 전선의 지휘부는 그날도 본국에 전문을 보냈다. “서부 전선 이상 없다.”
---「더 알아보기」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