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 대부분은 자신을 낳아 길러 준 부모나 조부모에 대해서만 안다. 하지만 조상들을 계속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는 우리의 출발점에 이르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수많은 조상의 기억이 이미 우리의 피와 뼈와 뇌 속에 간직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 p.21
물론 우리라고 물려받은 유전자의 특성을 전부 이해할 수는 없다. 우리 또한 이따금 우리 자신에게 이방인일 수 있다. --- p.21
사람들은 자신이 사는 세계에 대해 언제부터 의문을 품었을까? 나무와 꽃에 대해 알게 된 것은 언제부터일까? 각종 음식과 독, 그리고 동물들에 대한 지식은 언제부터 습득했을까? 지금 사람들이 사용하는 도구들이 맨 처음 만들어진 건 언제일까? 땅의 모든 사물이 서로 조화를 이루며 존재하는 가운데 비교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주어지지 않았다면 사람들은 과연 시간의 흐름이나 속도에 대한 개념을 가질 수 있었을까? 대면하는 사물들 덕에 우리는 시간이나 속도에 대한 개념을 갖게 된 것이다. 비교할 것이 하나도 없다면 사람은 자기만의 생각과 자기가 아는 다른 사람의 생각 안에서만 존재하게 된다. --- p.88
그리고 지금 갈레라포인트를 떠나 시골길을 따라 걷는 내 눈에 비바람을 맞아 희미한 검은색으로 변한 코코아를 말리는 집들이 들어왔다. 고속 도로 주위에는 코코아 농장과 함께, 어딘지 지저분해 보이는 정원이 딸린 자그마한 목조나 콘크리트 집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그것은 어린 시절부터 익숙한 식민지 풍경 같았다. 문득 이곳에는 시작도 없고 과거도 없으며 원시적인 요소도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긴 그 시절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 p.114
여러 세기가 지나면서 우리는 우리를 찾아오는 사람들로부터 우리가 어디에 있으며 우리가 누구인가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어야 했다. 우리만의 힘으로는 그런 일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외국인들의 증거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런 증거들과 더불어 우리를 무시하는 경향도 나타났다. 이는 역사를 거꾸로 돌려놓는 것과 같았다. --- p.121
나는 글 쓰는 행위를 통해 나 자신을 분명하게 알고 싶었다. --- p.132
무엇이든 글로 다 표현할 수는 없소. 써서는 안 되는 것도 있고, 쓰고 싶어도 쓸 수 없는 것도 있죠. --- p.147
농담을 좋아하는 것은 난해한 세상과 평화로운 관계를 맺는 방법 중 하나였다. 나는 농담이 히스테리의 반대편에 있다는 사실을 일찍부터 알았다. --- p.150
“어찌 되었든 이해한다는 것은 시작하는 것이다.” --- p.197
우리는 세계라는 구조물 안에서 살아간다. 고대인들은 그들만의 것을 소유했다. 우리의 가까운 조상들도 그들만의 것을 소유했고, 그래서 우리는 그들의 구조물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 모든 문화는 저마다 고유한 것을 지니고 있고, 인간은 한없이 순응적인 존재다. -243
“나도 그 점에 대해 깊이 생각해 봤어요. 그리고 사람들의 차이점에 대해서도 생각해 봤어요. 원주민과 혼혈인과 영국인과 네덜란드 사람과 프랑스인은 저마다 다릅니다. 하지만 가는 데가 어디인지, 어떻게 가는지 안다면 모든 사람에게 이 세상은 그래도 안전한 곳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 p.320
잔혹성을 한쪽으로 떼어 놓고 생각한다고 해도 트리니다드 사람들의 발에 짓밟힌 과거의 역사에 대한 개념은 곧바로 형이상학적인 것으로 바뀌어 버렸다. 이곳에서 세상은 그 실체의 일부를 잃은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현실은 유동적이었다. --- pp.323~324
베네수엘라는 대규모 노예 농장들이 넘쳐나는 신세계의 한 식민지에 지나지 않았고, 이런 지역 특유의 계층 구조를 띠고 있었다. 전 국민은 본국에서 고위 관리로 파견된 스페인 사람, 귀족층 크레올, 귀족이 아닌 크레올, 물라토, 농장에서 일하는 니그로, 토착 원주민으로 나누어졌다. 이 같은 계층 사회를 통합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겉으로 드러나는 강력한 권위뿐이었다. 이런 외부적 권위가 사라지면 사람들은 스스로 몰락하고 있다고 느끼기 시작했다. 이곳에서 한 집단의 자유란 또 다른 집단에 대한 압제 또는 노예화를 뜻했다. --- p.374
지금 나는 완전히 다른 행성 또는 다른 시대에 사는 듯한 기분이오. 이곳 사람들은 그들만의 영웅과 역사, 신화적 사건과 장소를 갖고 있소. 발로트의 교도소 꼭대기에 있던 무시무시한 독방, 픽턴의 파면, 노예 감독관이 니그로들에게 남긴 마지막 연설, 몽탈랑베르 농장에서 벌어진 대규모 독살 사건, 베로가 농장에서 있었던 시신 해부, 피난처를 찾아 카카오나무 숲을 가로질러 도망친 티스베, 결국 장대 끝에 걸린 그녀의 잘린 머리……. 이 곳 사람들은 이런저런 사건들을 겪으면서 세월의 흐름을 느낀다오. 마치 남아메리카의 원주민 부족들처럼 이들에게는 자신들만의 달력이 있는 듯싶소. --- p.495
“역시 증오가 문제군요. 장군님, 베네수엘라만큼 증오가 들끓는 나라는 어디에도 없을 겁니다.” --- p.515
그 나라를 지배하는 것은 혐오라는 감정이었다.
--- p.5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