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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 페이스북

메타 페이스북

: 플랫폼 제국을 넘어 메타버스의 창조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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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2년 01월 27일
쪽수, 무게, 크기 792쪽 | 1138g | 152*224*40mm
ISBN13 9788960519060
ISBN10 8960519065

이 상품의 태그

혼란유발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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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놀라운 조치였다. 본래 기숙사 방에서 뚝딱 만들어졌으나 이제는 수십억 명이 ‘페이스북’이라고 부르며 끊임없이 소비하는 실제 앱을 메타 월드의 한 측면으로 격하했으니 말이다.
그는 거실(또는 거실처럼 보이는 공간)에서 말했다. “우리는 여전히 사람을 중심에 놓고 기술을 설계하는 기업입니다.”(나도 그 거실에 있었는데 내부는 다소 평범했다.) “하지만 이제 우리에게는 새로운 북극성이 있습니다. 바로 메타버스metaverse를 현실로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새로운 이름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의 모든 범위와 우리가 앞으로 건설하고자 하는 미래가 반영된 이름입니다.”
하지만 단지 저커버그의 열망과 비전이 이 변화를 자극했을까? 페이스북(또는 메타)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다르게 이야기한다. 그들은 페이스북 브랜드의 돌이킬 수 없는 손상이 이 변화와 틀림없이 연관되어 있다고 믿는다. --- p.26

프롤로그
그가 말한다. “여러분처럼 나도 엔지니어입니다. 내게 엔지니어링은 두 가지 실질적 원칙으로 귀결됩니다. 첫째는 모든 문제를 시스템으로 간주한다는 겁니다. 모든 시스템은 개선될 수 있습니다. 시스템이란 건 아무리 좋든 나쁘든 더 낫게 만들 수 있어요. 코드를 짜거나 하드웨어를 제작하거나 해서요. 여러분의 시스템이 기업이더라도 그건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페이스북이 비즈니스와 문화의 문제를 공략하는 방식이 프로그래머가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과 같다고 말한다. “기업 경영은 코드 작성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다양한 함수function와 서브루틴subroutine을 작성하는 거죠. …… 나는 이런 엔지니어링 마인드셋mindset에 정말로 근본적인 요소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 p.38~39

페이스북의 위기는 유일무이한 것이었다. 페이스북은 세계를 연결한다는 근사한 이상주의를 목표로 삼고 출발했다. 그러나 그들의 전망은 지나치게 낙관적이었으며, 순진한 유토피아적 목표 그리고 틀림없이 회사에 이득이 되는 목표를 추구하면서 결과에 대해 무신경했던 과오는 페이스북에 비극을 가져왔다. 비판자들이 보기에 페이스북은 무분별하게 특권을 누리고 욕구와 쾌락의 충족에 골몰했다는 점에서 21세기 기업판 개츠비였다.
하지만 자신들이 해악을 조장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자신들이 가져다주는 유익이 그보다 크다는 페이스북의 주장에는 여전히 일리가 있다. 페이스북과 자매 기업인 인스타그램, 왓츠앱의 이용자는 여전히 수십억 명에 이른다. 이 서비스들은 여전히 우리 삶의 일부이며 영향력은 어느 때보다 막강한 듯하다. --- p.48

1장 어린 컴퓨터광의 재능과 야망
“좋은 유대인 엄마란 …… 집에 가서 시험 점수를 99점 받았다고 하면 ‘왜 100점을 못 받았니?’라고 묻는 사람이죠.” --- p.64

처음부터 저커버그는 사람들이 어떻게 집단을 이루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어떻게 일부 사람들이 권력을 쥐는지 궁금해했으며 그런 호기심을 충족하는 데 컴퓨터를 이용했다. 그에게는 걸음마 시절부터 이런 집착이 있었던 것 같다. “어릴 때 닌자 거북이가 있었어요. 전쟁놀이 같은 걸 하는 장난감이었죠. 그런데 내가 닌자 거북이를 가지고 한 일은 집단을 만들고 그 집단들이 어떻게 교류하는지 등에 대해 일종의 모델링을 하는 거였어요. 어떻게 해서 시스템이 그렇게 작동하는지에 관심이 많았죠.”
그랬기에 저커버그는 컴퓨터 게임을 시작하면서 ‘세계 만들기’ 상상력을 마음껏 발휘했다. 그가 좋아한 게임 중 하나는 〈문명Civilization〉으로, ‘턴제 전략 게임turn-based strategy game’ 장르에서 유명한 시리즈였다. 이 게임의 핵심은 사회 건설이다. 그는 성인이 되어서까지 〈문명〉 게임을 했다. (…)
“학교 갔다가 강좌 들으러 갔다가 집에 오는 게 일상이었어요. 집에 오면 이런 생각이 들었죠. ‘이제 5시간 내내 컴퓨터 앞에 앉아서 소프트웨어를 짤 수 있어.’ 그러다 금요일 오후가 되면 이러는 거예요. ‘좋았어, 이제 이틀 내내 앉아서 소프트웨어를 짤 수 있어. 끝내주는걸.’”
훗날 그는 프로그래밍에 매진한 결과를 이렇게 묘사했다. “어느 순간 프로그래밍을 직관적으로 할 수 있게 됐어요. 의식적으로 생각하지 않아도 저절로 프로그래밍이 되더군요.” --- p.66~67

이 소년의 머릿속 어딘가에서는 이 모든 것이 부글부글 끓으며 스튜가 익고 있었으리라. 정복자. 활극. 문명. 위험. 코딩. 제국 건설. 마크 저커버그를 위한 레시피. --- p.75

2장 하버드의 말썽꾼 프로그래머
저커버그는 젊은 시절 내내 언제나 프로젝트를 진행했으며 하나가 끝나면 곧장 다음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 ) 그가 진행한 거의 모든 프로젝트는 어떤 식으로든 사람들을 연결하는 것이었다.
그해 그의 첫 프로젝트는 ‘코스 매치Course Match’라는 프로그램이었다. (… ) 강의실의 등장인물을 미리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코스 매치는 브로드웨이의 인기 뮤지컬만큼 매력적이었다. 저커버그의 미래 프로젝트들과 마찬가지로 단순한 겉모습은 눈속임에 불과했다.
저커버그는 학생들이 이 프로그램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것을 보고 어안이 벙벙했다. 그는 그때의 놀라움을 훗날 이렇게 표현했다. “몇 시간이고 클릭을 하고 있더라고요. 누가 무슨 강좌를 듣는지 보여주는 것일 뿐인데, 사람들이 이런 것에 관심이 있다니 흥미롭지 않나요? 그냥 텍스트일 뿐인데 말이에요.” 그는 이런 식으로 사람들의 관계망을 그릴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 )
코스 매치는 그에게 매우 요긴한 교훈을 가르쳐주었다. “사람들은 자기 주위 사람들한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고 싶어서 안달하죠.” --- p.93~94

저커버그는 ‘핫 오어 낫Hot or Not’이라는 인기 웹사이트를 자기 식으로 개작했다. 두 프로그래머가 2000년에 만든 ‘핫 오어 낫’은 여성들이 자발적으로 올린 사진에 모르는 사람들이 점수를 매기는 외모 평가 웹사이트다. 저커버그의 버전에서는 당사자 동의 없이 사진이 등록되어 같은 집단의 구성원들에게 공개적으로 평가받았다. 설상가상으로 저커버그의 시스템은 더 전파력이 크고 더 고약하게 진화했다. 핫 오어 낫에서는 개개인에게 1점부터 10점까지 점수를 부여한 반면 저커버그의 시스템은 두 사람을 맞붙여놓고 말 그대로 정면 승부를 벌이게 했다. (… )
그의 프로그램은 일대일 비교뿐 아니라 모든 비교 방법을 고려했으며 하버드 전체에서 승자와 패자를 찾았다. 누군가는 이것이 먼 훗날 틴더Tinder 같은 서비스의 예고편이라고 주장할지도 모르겠다. (… )
그는 자신의 프로그램에 ‘페이스매시Facemash’라는 이름을 붙이고 인터넷 주소를 확보했다. 웹사이트 시작 페이지의 취지문에서 저커버그는 자신이 숭배하는 고전 속 영웅들이 전장에서 용맹을 발휘하는 것 같은 허세를 부렸다. 페이스매시는 하버드 방문자들에게 이렇게 물었다. “우리는 외모로 입학했나? 아니다. 우리는 외모로 평가받을 것인가? 그렇다.”--- p.96~98

저커버그가 페이스매시 사건으로 깨달은 가장 인상 깊은 교훈은 잘못된 행위에 관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열광적인 반응과 그 이유였다. 여러 해 뒤 이와 관련한 질문을 받았을 때 저커버그는 자신이 페이스매시에서 배운 것은 사람들이 자신과 지인의 사진 보는 것을 얼마나 좋아하는가였다고 답했다(그는 진실을 말하겠다고 선서했다).
딴 건 없느냐고 변호사가 묻자 저커버그가 말했다.
“사람들은 내가 생각한 것보다 더 관음증적이더군요.”--- p.101

3장 더페이스북의 출현
2004년 1월 11일, 저커버그는 커져만 가는 커넥트유팀의 불만을 여전히 무마하고 그린스펀에게 모호한 언질을 주던 와중에 더페이스북닷컴Thefacebook.com 웹사이트를 등록했다. 페이스북닷컴Facebook.com 도메인은 다른 곳이 선점하고 있었다.
당시에 저커버그의 프로젝트가 얼마나 진척되었는가는 불분명하다. --- p.112

프라이버시는 이 새 웹사이트의 결정적 특징이었을 것이다. Harvard.edu 도메인의 이메일을 가진 사람만 가입할 수 있게 함으로써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올린 개인 정보를 공유하는 안전한 공간을 만든 것이다. 이메일 검증을 통해 사람들이 실제 신분으로 사이트에서 교류하도록 해 나쁜 행동을 방지하는 안전장치를 내장한 셈이었다. 게다가 무엇을 누구에게 공유할지 이용자가 제한할 수 있었다. 이런 보호 조치 덕분에 더페이스북은 당시의 다른 어떤 소셜 네트워크보다 강력한 프라이버시를 보장할 수 있었다.
훗날 윙클보스 형제는 인터넷 도메인을 이용해 커뮤니티 내에서 프라이버시를 보장하는 방법이 자신들의 독창적 아이디어이자 저커버그와 공유한 일급비밀이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독창적 아이디어는 아니었다. 실은 커넥트유팀이 잘 알고 있던 에런 그린스펀의 하우스시스템 역시 Harvard.edu 도메인을 이용해 이용자를 검증했다. --- p.116~117

그 뒤로 며칠 동안 더페이스북은 하버드 학생들을 무지막지하게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더 많은 학생이 가입할수록 친구들 그리고 친구로 삼고 싶은 사람들의 프로필을 찾을 가능성이 커졌다. 1980년대 초 컴퓨터과학자 밥 멧커프Bob Metcalfe는 네트워크 효과network effect에 대한 글에서 네트워크의 가치는 참여자 수의 제곱에 비례해 증가한다고 추정했다. 이것은 ‘멧커프의 법칙Metcalfe’s law’으로 알려졌다. 시간이 지날수록 학생들은 시간을 때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꼭 필요해서 가입하기 시작했다. 더페이스북에 가입하지 않는 것은 실제 캠퍼스에서 가상의 추방을 당하는 셈이었기 때문이다. --- p.121

이후 며칠 사이에 스탠퍼드와 예일에서도 더페이스북이 출범했다. 패턴이 확립되었다. 그 뒤로 몇 달간 더페이스북팀은 100여 곳의 캠퍼스에 진출했다. --- p.127

그해 9월 커넥트유팀은 6500만 달러짜리 합의로 끝나게 된 기나긴 법적 절차를 시작했다. 그들이 저커버그와 유형의 계약을 전혀 맺지 않았음을 고려하면 짭짤한 성과였다(한 판사는 그들의 거래를 “기숙사 잡담dorm chit-chat”이라고 표현했다). 어쨌든 커넥트유팀 사이트는 1년 넘게 지지부진하던 차였고 저커버그가 늑장을 부린 탓에 늦어진 기간은 두 달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나렌드라와 윙클보스 쌍둥이는 훗날 합의금 산정 과정에 이의를 제기했다. 그들처럼 마크 저커버그에게 불만을 제기해 거액을 받아낸 사람은 한둘이 아니었다. 하우스시스템의 그린스펀 또한 ‘페이스북’이라는 단어의 저작권과 관련해 수백만 달러 합의를 얻어냈으며, 에이해브 선장이 모비딕을 경멸하듯 저커버그를 경멸했다. --- p.133

4장 실리콘밸리 입성
그해 여름과 이후 몇 달간 저커버그는 자신의 이 프로젝트 하나에 모든 걸 걸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로 골머리를 썩이고 있었다. 지금껏 그는 언제나 이 아이디어에서 저 아이디어로 건너뛰었다. 저커버그는 더페이스북이 1~2년 뒤에도 건재할 것 같으냐고 종종 파커에게 물었다. 그럴 때마다 파커는 그럴 거라며 그를 안심시켰다. 모든 캠퍼스를 장악한 지금 저커버그는 회오리바람을 일으킨 것이 분명했다.
인맥이 탄탄한 연쇄 창업가 파커는 사업을 시작할 때의 복잡한 문제들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저커버그는 문외한이었다. 심지어 자신의 프로젝트를 본격적인 사업으로 여기지조차 않았다. 저커버그는 그해 여름을 이렇게 회상했다. “101번 국도를 달리면서 그 모든 위대한 회사를 보며 이런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나요. ‘우와. 저 어마어마한 회사들 좀 봐. 언젠간 나도 회사를 차릴 수 있겠지.’ 그때 이미 페이스북을 시작해놓고서 말이죠!” --- p.144

파커가 저커버그를 포트레로힐에 있는 핑커스의 사무실에 데려간 건 그해 2004년 8월이었다. 핑커스의 눈에 저커버그는 안하무인이었다. 열네 살처럼 보였는데 비치 샌들과 긴 농구 반바지 차림에 완전히 제멋대로였다. 그의 명함에는 “나는 최고경영자다 …… 잡년아I’m CEO … bitch”라고 쓰여 있었다.
하지만 핑커스를 혹하게 한 것은 (적어도 파커가 설명한) 더페이스북의 스토리였다. 더페이스북의 이용자 약 80퍼센트가 매일 접속했다. 듣도 보도 못한 일이었다. 핑커스 자신의 소셜 소프트웨어 트라이브닷넷의 일일 접속자 수는 가입자의 10퍼센트에도 못 미쳤으니 말이다. --- p.148

숫자는 정확했다. 게다가 콜러가 이용자들과 대화를 했더니 정성적 데이터는 정량적 데이터보다 더더욱 충격적이었다. 이 사진첩인지 뭔지를 이용하고 있느냐고 그가 물으면 사람들은 그런 질문을 받는다는 것 자체에 어리둥절해했다. 마치 이 수돗물인지 뭔지를 사용해봤느냐고 묻는 식이었으니까. “이용하느냐고요? 더페이스북은 내 삶이에요.”
틸은 회사 가치를 500만 달러로 평가해 50만 달러를 투자하고 7퍼센트의 지분을 확보했다. 호프먼과 핑커스는 각자 3만 7500달러를 투자하기로 합의했다. 핑커스가 말한다. “그들이 나와 리드에게 그 라운드의 투자 기회를 제안했을 때 마치 로또에 당첨된 기분이었죠.”
틸은 면담을 끝내면서 자신의 새 제자에게 한 가지 당부를 했다. “깽판 치지만 말게.” --- p.151

겨울 방학이 가까워지면서 그들 모두 이 프로젝트가 어마어마하게 커질 것임을 알았다. 저커버그가 더페이스북을 론칭한 지 1년이 채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캘러핸이 말한다. “더페이스북이 10억 달러짜리가 되리라는 생각은 첫날부터 하고 있었어요.”(그가 말한 건 하버드에 들어간 첫날이 아니라 ‘자신’이 입사한 첫날이다.) 하지만 몇십 억인지는 아무도 감을 잡지 못했다. 문제는 페이스북이 여전히 버젓한 비즈니스 모델을 전혀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임무가 캘러핸에게 떨어졌다. --- p.162

5장 스타트업의 길
액셀의 수석 투자자 짐 브라이어Jim Breyer가 마침내 제안한 금액은 《워싱턴포스트》의 두 배에 가까웠다. 그는 스무 살짜리가 운영하는 한 살배기 회사의 가치를 자그마치 9800만 달러로 산정해 1270만 달러를 제안했다. 게다가 그는 저커버그가 회사 경영권을 장기 보유하는 것에 동의했다. 브라이어와 틸이 이사회에 참석하겠지만 저커버그에게 2석, 파커에게 1석의 의결권을 부여하기로 한 것이다. 예전에 파커가 당했던 것과 달리 저커버그는 결코 자기 회사에서 쫓겨나지 않을 터였다. --- p.167

은행 계좌에 돈이 들어온 뒤 최우선 업무는 Facebook.com 도메인을 사들여 회사 이름에서 꼴사나운 ‘더’를 떼어버리는 것이었다. 도메인 소유주는 어바웃페이스AboutFace라는 회사였다. 대학과는 아무 관계 없고 법률 사무소와 기업 대상 직원 인명록을 제작하는 곳이었다. 파커는 도메인을 20만 달러에 낚아챌 수 있었다. 그리하여 더페이스북이 페이스북으로 간결해지는 길을 닦았다.
벤처 자금으로 해야 할 더 중요한 일은 인력 채용이었다. 하버드 코더들은 사이트를 출범시키는 일은 잘해냈다. 하지만 페이스북을 이용하는 거대한 인구에 맞게 서비스 규모를 키우려면 실제로 컴퓨터과학 훈련을 받은 사람들이 필요했다. 저커버그가 수강한 운영체제 과목의 강사 맷 웰시는 블로그에 이렇게 썼다. “페이스북의 원래 버전은 기술적으로 볼 때 엉망진창이었다.” 하지만 엔지니어 채용은 스타트업에는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대학생 이용자만 상대하는 스타트업이라면 더더욱 그랬다. 한 가지 전술은 스탠퍼드대학교 컴퓨터과학과 바깥에 서 있다가 컴퓨터 도사처럼 보이는 학생들을 붙들고 늘어지는 것이었다. 콜러가 애용한 전술은 미끼 수법이었다. 그는 우등생들을 여름 인턴으로 꾀어서는 결국 학교를 중퇴하게 만들었다. --- p.170~171

페이스북 방식의 특징은 새 코드를 내보내는 속도였다. 이를테면 아가르왈은 오라클에 있을 때 몇 달이 지나고서야 코드베이스code base에 첫 ‘커밋commit’(최신 변경 사항 추가를 통한 버전 관리)을 허락받았으며 그런 다음 다시 코드 변경이 아무것에도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것을 4명의 검토자에게 네 번 확인받아야 했다. 그런 뒤 실제 변경 사항이 고객에게 선보이기까지는 또 몇 년이 걸렸는데 제품 발표 주기가 2년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페이스북에서는 하루에 네댓 번씩 코드를 내보냈다. 사실상 저커버그와 모스코비츠는 페이스북을 기숙사 방 프로젝트일 때와 같은 규칙으로 운영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다른 회사에서 일해본 적이 없었기에 자신들의 방식이 얼마나 전복적인지 알지 못했으며, 이 방식이 소프트웨어 개발에서 통용되는 모범 관행을 사실상 능욕했다는 사실 또한 깨닫지 못했다. 구글조차 데이터베이스 인덱스를 재수정할 때 약 2주 간격을 두어 정기 업데이트 때 변경 사항이 반영되도록 했다. 아가르왈이 말한다. “우리는 도그마가 없었기에 벗어날 필요도 없었죠. 확실하다면 기다릴 이유가 없잖아요?” 옛 패러다임에 젖어 이런 방식을 신성 모독으로 여기는 베테랑은 페이스북에 한 사람도 없었다. 페이스북의 태도는 이랬다. “예전 직장에서 코드 작성에 시간이 얼마나 걸렸든 상관 안 해. 페이스북에서는 빛의 속도로 움직이고 싶어 한다고.” --- p.174~175

이제 엔지니어팀은 점점 커져갔고 이용자는 수백만 명에 이르렀다. 대부분의 업무는 사이트를 확대하고 새 캠퍼스로 확장하는 데 치중했다. 하지만 저커버그는 페이스북의 힘을 늘리고 중독성을 키우는 새 기능을 도입하는 일이 필수적임을 알고 있었다. 그는 그런 기능을 통해 야심 찬 목표를 추구하면서 동시에 “빨리 움직이고 나중에 고친다”라는 자신의 방침을 회사가 유지하기를 바랐다. 이것은 자신의 머릿속에서 요리된 프로젝트를 지휘할 뿐 아니라, 페이스북의 가치를 끌어올릴 가망이 있는 한 스스로 프로젝트를 만들 권한을 직원들에게 주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업무라는 요리에다 뭐든 시도해보라는 양념을 치는 셈이었다. --- p.179

6장 변화의 장
“세상에서 변화를 보고 싶다면 스스로 그 변화가 되라.”
?마하트마 간디 --- p.190

“어떻게 하면 실제 안전성 여부와는 무관하게 안전해 보이도록 할 수 있을까?” --- p.195

마이크로소프트에서는 기막힌 기능 아이디어를 생각해내도 이용자에게 도달하기까지 1년 넘게 걸렸다. 하지만 페이스북에서는 몇 시간이면 자신의 아이디어를 실현할 수 있었다. --- p.200~201

저커버그가 입을 열었다.
“음, 우리는 다른 회사들이 구리다고 생각해요.”
댄 로즌스와이그Dan Rosensweig 야후 사장이 얼어붙은 분위기를 풀어보려고 우스갯소리를 내뱉었다. “그래도 야후는 덜 구리다고 생각하고 싶군요.” --- p.210

저커버그는 개의치 않았다. 그는 이용자들의 반발이 찻잔 속의 태풍이라고 이미 믿고 있었다. 고개를 숙이고 소음을 무시하면 사람들은 적응할 것이고 몇 주 지나지 않아 이용자의 아우성은 없던 일이 될 터였다. 캘러핸이 말한다. “마크는 이번 역시 그럴 거라 생각했어요. 그리고 그 생각은 정말 처참하게 틀렸죠.”
페이스북은 대체로 밤늦게 제품을 출시했으며 사전 공지는 전혀 하지 않았다. 새 기능은 부활절 달걀처럼 난데없이 나타났다. 그러면 이용자들은 새 기능을 받아들였으며 디자인상의 결함이나 버그는 나중에 수정되었다. 뉴스피드의 경우에는 이런 전환이 유난히 갑작스러웠다. --- p.216

페이스북은 최초의 홍보 위기에서 크나큰 교훈을 얻었다(잘못된 교훈이었는지 모르지만). 급조한 제품에는 심각한 프라이버시 문제(직원들도 알고 있던 문제)가 있었으나 페이스북은 무시하고 출시했다. 케이티 게민더가 몇 년 뒤 이 사건을 되돌아보며 말한다.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 매우 대범했어요. 무감각해서 그랬던 게 아니라, 대단한 걸 만들려면 눈 딱 감고 밀어붙여야 하기 때문이에요. 두려워해서는 안 돼요.”
위기가 발생한 것은 사실이지만 빠른 대처와 (진심에서 우러나지는 않은) 사과가 상황을 가라앉혔다. 사람들은 결국 뉴스피드를 사랑하게 되었다. (… )
페이스북은 곧이어 가입제한해제를 도입하면서는 좀 더 신중을 기했다. 가장 큰 이유는 오픈레지가 페이스북 정책의 중대 변화를 의미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세계를 연결한다는 저커버그의 원대한 야심을 위해 내장형built-in 프라이버시 보호 대책을 버리는 조치였다. --- p.222~223

7장 개발자 플랫폼 구축하기
저커버그는 모린에게 애플이 혁신 기업이기는 하지만 페이스북은 혁명 기업이라고 말했다. --- p.230

저커버그는 페이스북이 소셜 업계의 마이크로소프트라고 상상하기에 이르렀다. 마이크로소프트가 데스크톱 세상을 장악했듯 페이스북은 소셜 세상을 장악하리라 생각했다.
소셜 운영체제 구축은 어마어마하게 복잡한 작업이다. 사진 앱을 예로 들어보자. 각각의 사진은 잠재적 프라이버시 제한이 걸려 있다. 자신의 정보를 누가 볼 수 있는지를 이용자가 지정하도록 해주겠다는 약속을 지키려면 매 단계마다 이 사진을 누구나 볼 수 있는지 아니면 친구들만 볼 수 있는지 제약을 두어야 한다.
그런데 이제 페이스북은 외부인이 독자적으로 사진 앱을 만들면 페이스북이 자체 앱에 제공하는 정보를 이용할 수 있게 해주겠다고 약속하고 있었다. 이것은 개발자들의 관심을 끌려는 전략의 일환이었다. 하지만 외부인에게 정보를 믿고 맡겨도 될까. --- p.234

수백, 아니 수천 명의 개발자가 페이스북 API(애플리케이션 프로그래밍 인터페이스)를 이용해 자신들의 앱에 대한 콘텐츠를 유포했다. 그러자 뉴스피드는 쓰나미가 휩쓸고 간 해변처럼 쓰레기 게시물로 가득 찼다. 정상 이용이 불가능할 정도였다. 개발자들이 앱에 대한 ‘소식’을 유포하는 수단인 알림도 이용자들에게 융단 폭격을 퍼부었다.
그리하여 ‘플랫폼’의 출범을 자축하던 페이스북은 동시에 부정행위 때문에 시스템이 오염될까봐 우려했다. 데이브 모린이 말한다. “벤처 투자자들이 찾아오고 기업인들이 찾아오고 개발자 이벤트를 비롯한 온갖 행사가 열리고 있었어요. 하지만 동시에 이것은 이용자 경험에 영향을 미치고 있었죠. 스팸성spammy으로요. ‘스팸성’이라는 단어가 말 그대로 전 세계에서 유행어가 된 건 그해였던 것 같아요.” (… )
페이스북은 사태를 바로잡고자 나서 뉴스피드와 알림에 대한 개발자들의 접근을 제한했다. 애덤 댄절로가 말한다. “개발자 수와 처리해야 하는 스팸 양이 우리가 대비한 것보다 훨씬 빨리 증가했습니다. 그래서 이 모든 단속 조치를 시행해야 했죠.”
당연히 개발자들은 새 규정들을 증오했다. 슬라이드의 맥스 레브친은 페이스북이 미끼 수법을 썼다고 생각했다. 페이스북이 자신들에게 이용자 참여를 이끌어내라고 독려한 것은 그들의 전술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페이스북이 참여를 내부 기준으로 활용했으며 슬라이드가 만들어낸 온갖 활동은 페이스북의 사업을 뒷받침한 셈이라며 이렇게 회상한다. “그들은 ‘두려워 말고 시도해요’라고 말했어요. 어떤 사람에게는 스팸이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오락일 수 있다면서요.” --- p.249

뉴스피드 스팸 전쟁 이후에도 페이스북과 개발자들의 실랑이는 계속 이어졌다. 페이스북이 규정을 바꾸면 개발자들은 바뀐 규정을 우회하는 방법을 고안했다. 개발자들은 수법을 서로 공유했다. 문제의 소지가 있는 기능을 시도할 때면 페이스북 직원으로 되어 있는 사람에게 안 보이도록 하거나 위치 등록을 이용해 샌프란시스코베이에어리어를 제외하는 방법을 썼다. 페이스북의 조시 엘먼이 말한다. “우리는 어떤 면에서 고양이와 쥐처럼 쫓고 쫓기는 게임을 하고 있었죠. 대개는 쥐에게 뒤처졌던 것 같아요.”
더 심각한 부정행위 사례 중 하나는 개발자들이 페이지 공간을 저질 광고 업체에 판매한 일이다. 이름난 광고주들은 페이스북에서 돌아가는 한심한 앱에 하등 관심이 없었다. 페이스북 광고를 구매하는 회사 대부분은 기만적 수법을 이용해 사람들의 돈이나 데이터를 탈취하는, 이른바 ‘잠재 고객 발굴lead generation’이라는 위험한 관행으로 이용자를 등쳐먹는 곳이었다. 이를테면 어떤 광고는 이용자의 클릭을 유도해 브라우저를 설치한 다음 그 뒤로 이용자의 모든 웹 행동을 몰래 추적한다. 이런 브라우저를 제거하는 것은 컴퓨터과학 학위가 필요할 정도로 까다로운 일이다. --- p.252

페이스북 커넥트는 마크 저커버그의 회사를 인터넷에서 사실상의 신원 확인 기관으로 만드는 구상에 한 발짝 다가가는 정책이었다. 사람들은 자신의 페이스북 로그인 정보를 수천 개의 사이트에서 쓸 수 있으며, 페이스북을 거쳐 로그인하기 때문에 저커버그의 회사는 이용자의 모든 활동을 모니터링할 수 있게 된다.
페이스북은 이미 수천 명의 개발자를 거느리고 있었지만 이제 그 숫자가 획기적으로 증가할 터였다. 게다가 페이스북은 이용자(자신의 의사로 페이스북 커넥트를 이용해 앱에 가입한 사람)와 그들의 친구(자신의 정보가 가입은커녕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을 앱에 전달된다는 것을 까맣게 모르는 사람)에 대한 정보를 이미 개발자들과 공유하고 있었다.
페이스북이 개발자들에게 무슨 데이터를 주는가는 규정에 따르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일부 개발자의 증언과 훗날 법적 조치로 공개된 이메일들에 따르면 실제로는 규정에 융통성이 있었으며 이용자의 개인 정보를 개발자들에게 도매금으로 제공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 p.258

8장 소셜 광고 시대의 개막
페이스북은 마이스페이스에 비하면 아차상 수준이었다. 하지만 실제로 ‘미친’이라는 단어를 쓸 수 있을 만큼 큰 수익을 보장하는 계약을 맺을 수 있었다. 언젠가 페이스북을 인수하겠다는 (어림없는) 꿈을 여전히 꾸고 있던 마이크로소프트는 이 기회를 덥석 물었다. 일주일이 지나지 않아 두 회사는 마이크로소프트가 페이스북 국내 광고 판매 독점권을 가지는 제휴 관계를 맺었다. 이듬해 페이스북 매출의 절반이 이 계약에서 나오게 된다. 제휴 책임자로 페이스북에 신규 채용되어 이 계약을 담당했던 댄 로즈가 말한다. “홧김에 하는 데이트였죠 --- p.271

“페이스북에서 효과가 있는 건 친구를 통해 아는 것들이었죠. 친구라는 렌즈로 제품과 서비스에 대해 알게 되는 것은 확실히 먹히는 방법일 겁니다. 내 친구들에 대한 적절하고 유관한 정보가 광고에 들어 있다면 금상첨화일 테고요.”
이것이 페이스북에서 대대적으로 공개한 광고 비즈니스의 주제였다. 코드명 ‘판다Panda’는 ‘페이지와 광고Pages and Ads’의 준말이다. 나중에 코드명은 별로 귀엽진 않은 ‘팬데믹Pandemic’으로 바뀌게 된다.
광고주들에게 내세운 모토는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대화는 자기들끼리 나누는 대화며 이제 펩시나 월마트 같은 대기업이 직접 그 대화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펩시가 애초에 대화에 끼지 못한 이유는 분명했다. 사람들이 친구와 대화할 때 펩시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적어도 펩시의 편을 들 리는 만무했다. 자신이 펩시를 샀다는 소식을 친구들에게 알리고 싶은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이 개념이야말로 소셜 광고의 핵심 차별점이자 페이스북 전략의 주요 요소였다.
또 다른 요소는 더 중요한 것으로 드러났다. 페이스북은 현행 광고 시스템을 바꾸고자 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광고를 보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올바른 사람을 타기팅하느냐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 p.273

팬데믹 출시를 알리는 머리기사들은 마이크로타기팅과 소셜 광고에 초점을 맞추었으나 관심은 이내 비컨으로 옮겨갔다. 켈리를 비롯한 사람들이 경고했듯 지정된 웹사이트에서 이루어진 구매 소식을 자동으로 퍼뜨리는 것은 달갑잖은 결과로 이어질 수 있었다. 극단적인 예를 들어보자면 누군가 제휴 사이트에서 다이아몬드 약혼반지를 샀는데 상대방이 이 사실을 무릎 꿇은 남자에게서가 아니라 페이스북 뉴스피드에서 알게 된다고 상상해보라. 이것은 실제로 일어난 일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구매 내역이 다른 사람들의 뉴스피드에 올라오기 시작하자 불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그중 한 사람이 이름난 업계 분석가 샬린 리Charlene Li였다. 그녀는 오버스톡닷컴Overstock.com에서 커피 테이블을 구입했다는 소식이 페이스북 친구들에게 전달된 데 “경악”했다고 블로그에 썼다. --- p.281

9장 셰릴 월드와 ‘좋아요’의 탄생
물론 모든 책임은 최종적으로 저커버그에게 귀결되었다. 샌드버그가 말한다. “내게 보고되는 건 모두 저커버그에게 보고돼요. 내가 그에게 보고하니까요. 그러니 역할 분담은 내가 무슨 일을 할 것인지를 결정한 셈이죠.”
그럼에도 그 뒤로 10년간 대규모 성장과 이 엄청난 규모 때문에 전례 없는 문제를 맞닥뜨렸을 때 페이스북에는 사실상 2개의 조직이 존재했다. 하나는 저커버그의 영토, 다른 하나는 셰릴 월드였다. 둘은 결코 동등하지 않았다. 저커버그가 제품 부문인 엔지니어링을 이끈 것은 그쪽에 더 유능해서가 아니라 엔지니어링이야말로 회사의 심장부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당연해 보였다. 이것이 얼마나 큰 실수인지 저커버그가 깨달은 것은 10년이 지나서였다. --- p.293

샌드버그는 페이스북의 비즈니스가 광고업이고 나머지 모든 것이 곁다리임을 분명히 깨달았다. 하지만 페이스북의 모든 사람이 그 생각을 달가워하지는 않았다. 특히 몇몇 젊은 직원들은 광고는 구리며 페이스북은 뭔가 덜 …… 가식적인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저커버그조차 전적으로 동의하진 않았다. --- p.298

구글이 가장 두려워한 일이 현실이 되었다. 은밀한 스카우트 방지 협약이 없을 경우 거액의 인재 쟁탈전이 벌어지리라는 우려였다. 그 뒤로 몇 년간 두 회사는 상대 회사의 인력을 유인하고 경쟁사의 유혹으로부터 자사 인력을 지키려고 수억 달러를 쓰게 된다. --- p.301

세계 최대의 기업들을 비롯한 많은 기업이 사람들을 유인해 자사 페이지에 좋아요를 받으려는 주목도 전쟁에 뛰어들었다. 때로는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어주는 사람들에게 특전을 제공했다. 어떤 페이지는 좋아요 암시장에 뒷돈을 댔다. 일정액을 내면 좋아요 수천 개를 살 수 있었다. 이따금 중국 같은 나라의 저임금 노동자 군단이 노동력 착취 사업장에 앉아 집게손가락을 마우스 단추에 올린 채 좋아요를 눌러 브랜드를 홍보했다.
좋아요 단추는 페이스북 자체의 상징이 되었으며 엄지손가락 아이콘은 페이스북 본사 사옥 앞에 전시되었다. 사람들은 그 앞에서 셀카를 찍어 소셜 네트워크에 사진을 올렸다. 물론 친구들이 사진에 좋아요를 누르리라 기대하면서.
그리하여 단순하기 그지없는 요소 하나가 페이스북의 비즈니스를 부양하고 이용자들에게 스스로를 표현할 손쉬운 방법을 선사했다. 동시에 사소하거나 분노를 유발하는 콘텐츠가 지나치게 강조되는 우려스러운 상황으로 회사를 내몰았다. 좋아요 단추가 페이스북이 자기네 테두리를 넘어 데이터를 수집하기 위한 관문 마약이었음은 두말할 필요 없다.
좋아요의 창안자 로즌스타인, 펄먼, 모겐스턴(지금은 누구도 페이스북에서 일하지 않는다)은 최근 자신들의 작업이 사회를 타락시키고 옛 고용주가 이용자 정보를 마구잡이로 수집하는 데 일조했다는 깨달음(후회까지는 아니지만)을 진심으로 표명했다. 그들은 모두 당시에는 그것이 옳은 일이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의도하지 않은 결과가 벌어지지 않도록 페이스북이 노력했어야 한다며 아쉬워한다. 그들은 페이스북의 사업 전반에서 이런 아쉬움을 느꼈으리라.
좋아요 단추의 웹 정복은 페이스북에 어마어마한 성공을 가져다주었다. 비컨의 참패를 보기 좋게 설욕한 셈이었다. 비컨은 웹사이트에서 얻은 데이터를 페이스북의 다른 이용자들에게 공유하는 방법이었다. 그러나 좋아요 단추는 페이스북이 이 데이터를 자기네 목적을 위해, 주로 이용자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해 광고에 활용하는 쪽으로 이용하게 해주었다.--- p.307~308

10장 성장, 또 성장
“저커버그는 성장에 도움이 되지 않는 기능은 뭐가 됐든 아무 관심 없다고 말했다. 성장이야말로 유일하게 중요한 관심사였다.” --- p.319

‘알 수도 있는 사람’은 페이스북의 필수 요소가 되었다. 친구가 될 만한 사람들을 보여주는 것은 회원의 경험을 향상시키는 방법이다. 이렇게 하면 그들이 더 많이 공유할 가능성을 높이고, 무엇보다 사람들이 페이스북에서 떠날 가능성을 낮출 수 있다.
많은 이들에게 ‘알 수도 있는 사람’은 반가운 기능이다. 페이스북 활동을 유익한 경험으로 만들어줄 수 있는 사람들과 관계를 맺도록 해주니 말이다. 하지만 이따금 ‘알 수도 있는 사람’은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 수 있다. 애매한 관계이거나 때로는 달갑지 않은 사람들이 왜 뉴스피드에 카메오 출연을 하는지 의아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한 매춘부는 자신의 고객들을 페이스북 친구로 추천받았다(그녀의 신원을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한 정자 공여자는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생물학적 자녀를 추천받았다. 한 정신과 의사는 페이스북이 자신의 환자들을 서로 친구로 추천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자녀의 친구들, 별로 친하지 않은 사람의 배우자, 기억하고 싶지 않은 10년 전 소개팅 상대와 관계를 맺으라는 페이스북의 권유에 수많은 사람이 역겨움을 느꼈다. --- p.328~329

하지만 2013년 국제적 성장과 관련한 페이스북의 우려는 그런 결과가 아니었다. 문제는 아무리 노력해도 조만간 이용자 수가 정점에 도달할지 모른다는 우려였다. 물론 페이스북이 10억~20억 인구를 자기네 커뮤니티에 끌어모을 수 있다는 건 대단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전 세계는 아니었다. 인터넷이 깔려 있고 데이터 이용료를 낼 돈이 있는 여유로운 인구만 페이스북 이용자가 될 수 있었다. 아직 페이스북에 가입하지 않은 수십억 명 중 상당수는 여유로운 인구에 포함되지 않았다. 페이스북이 보기에 그들은 너무 가난하거나 인터넷에 접속할 방법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또는 둘 다이거나.
해결책은 무엇이었을까? 우선 값싸게 이용할 수 있는 페이스북 버전을 만들어야 했다. 그다음에는 인프라를 구축해야 하는 한이 있더라도 그들이 인터넷에 접속할 수 있도록 해야 했다.
마크 저커버그는 이 발상을 열성적으로 받아들였다. 그 추진력은 전 세계인을 페이스북에 연결한다는 성장팀의 목표에서 비롯했지만, 저커버그는 이 사업을 수십억 명의 삶을 바꾸는 박애주의적 시도로 볼 것을 주장했다. 그가 이 인터넷 보급 사업에 붙인 이름은 비영리 단체나 재단에서 주로 쓰는 최상위 도메인 접미사를 붙인 ‘인터넷닷오그Internet.org’였다. --- p.341~342

저커버그는 전 세계인을 연결한다는 사명을 주창했지만 이를 실현하는 임무는 성장 조직 소관이었다. 그러니 페이스북의 진정한 사명은 연결이 아니라 성장이라는 주장에는 일리가 있었다. 페이스북 홍보 책임자 브랜디 바커는 2009년경 저커버그와 면담한 일을 회상한다. 그 자리에서 그는 페이스북에 더 많은 홍보가 필요한 이유는 성장과 참여를 위해서라고 말했다. 그녀가 말한다. “성장과 참여야말로 우리가 이 일을 하는 유일한 이유라는 거죠!” --- p.347

11장 빨리 움직여서 파괴하라
어떤 의미에서 페이스북의 자기규정은 6개의 알파벳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레이엄이 말한다. “우리는 회의실에 소집단으로 모여서는 이렇게 말했어요. ‘입사 지원자나 친구에게, 엄마에게, 형제에게 페이스북을 어떻게 묘사하나요? 최근 3명의 입사 지원자에게는 뭐라고 말했나요? 어떤 표현을 썼나요?’” 그러자 단어 하나가 거듭거듭 등장했다. ‘hacker’(해커)였다.
일반인에게 ‘해커’라는 단어는 첨단 기술로 무장한 대단히 위험한 허무주의자 또는 원격 시스템을 파괴하거나 신용카드 정보를 훔치는 악당을 연상시켰다. 하지만 스타트업 문화에서는 단어가 원래 의미대로 쓰였다. 바로 ‘자신의 노력이 망가진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바꾼다고 믿는 뛰어난 실력의 정의로운 코더’다. --- p.353

이 가치들 중 하나가 페이스북 특유의 것, 저커버그 특유의 것으로 부각되었다. “빨리 움직여서 파괴하라”는 어떤 의미에서 이미 페이스북과 동의어였다. 정확한 문구가 언제 처음 등장했는지 확실히 아는 사람은 없지만 아마 팰러앨토 해밀턴스트리트 사무실에서 열린 전 직원 회의에서였을 것이다. 회사 규모가 너무 커져 모든 아르바이트생이 댄절로나 다른 임원에게 일일이 보고할 수 없게 되자 처음으로 관리자들을 채용했을 때였다. 먹이 사슬 저 아래에 있는 사람들까지 ‘노’라고 말할 권한을 가지는 것이 저커버그에게는 중요한 관심사였다. 그래서 그는 모두에게 두려워할 여유가 없으니 빨리 움직여서 파괴하라고 강조했다. --- p.354

페이스북의 초창기(종종 현재까지) 성격을 묘사할 때 사람들은 한결같이 “기숙사 방”을 관형어로 쓴다. 이에 반해 경쟁사 구글은 대학원생 이미지였다. --- p.357~358

? 두렵지 않다면 무엇을 할 것인가?WHAT WOULD YOU DO IF YOU WEREN’T AFRAID?
“빨리 움직여서 파괴하라”가 페이스북 대뇌 피질에서 나온 것 같다면(빠른 속도는 다른 회사와 격차를 벌리는 전술적 강점이었다) 이 도발적 질문은 페이스북의 심장에서 꺼낸 것 같았다. 이 슬로건을 비공식 사훈으로 받아들임으로써 페이스북은 비즈니스를 대하는 자세뿐 아니라 자기실현에 이르는 길을 표현한 셈이었다. --- p.356

저커버그가 트위터에 쓴 수법은 이후 그가 경쟁자를 상대하는 친숙한 전략이 되었다. 첫째, 현재나 미래에 위협이 되는 회사를 찾아낸다. 둘째, 인수를 시도한다. 셋째, 팔지 않으면 베낀다. --- p.377

이제 페이스북 역시 공개의 길을 걸을 터였다. 무엇보다 저커버그는 이용약관을 개정하고 싶어 했다. 핵심 변화는 기본 설정을 ‘친구만’에서 ‘전체 공개’로 바꾸는 것이었다. 이용자가 공개를 제한하는 구체적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그들의 게시물, 좋아요, 친구 명단, 일부 프로필 정보는 페이스북 내에서 공개될 뿐 아니라 구글 같은 검색 엔진에도 표시되었다(이전에는 이용자의 이름과 어느 네트워크를 이용하는지만 공개했다).
크리스 콕스는 기자들과 전화 통화에서 트위터가 이 변화의 계기였음을 인정했다. 그러나 트위터에서 영감을 받은 부분은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진짜 추동력은 성장팀에서 왔다. 페이스북의 정보를 구글에서 더 잘 보이게 하면 사람들이 구글에서 더 많은 친구를 찾고 어쩌면 가입하지 않고 버티는 사람들의 가입까지 유도할 수 있었다.
페이스북과 이용자가 애초에 맺은 계약을 완전히 파기하는 셈이었다. --- p.386

12장 모바일 전환 위기에 대처하기
2012년이 다가오면서 페이스북은 그해가 가기 전에 10억 이용자를 돌파할 기세였다. 광고주들이 페이스북에 합류하면서 매출은 40억 달러에 육박했다. 그중 10억 달러가 이익이었다.
하지만 페이스북이 세운 모든 것이 위험에 처했다. 마크 저커버그는 자신의 업계에 닥친 거대한 변화를 준비하지 못했다. 이 변화는 페이스북의 존재 자체를 위협했다.
세상은 스마트폰 쪽으로 이동하고 있었으며 페이스북은 전환에 서툴렀다. --- p.401

그는 페이스북이 모바일과 씨름하는 과정을 쭉 지켜보았다. 그런데 그의 근심거리는 훌륭한 앱이 없다는 점이 아니었다. 그는 진화하는 모바일 생태계 자체가 페이스북의 존재를 위협한다는 사실을 간파했다. 디지털 업계에서 앞서가려면 자신의 모바일 운영체제를 운영해야 하며 그러지 않으면 그런 업체의 졸 노릇을 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버젓한 운영체제가 있는 곳은 애플과 구글뿐이었다.
팔리하피티야는 해결책은 하나뿐이라고 생각했다. 바로 페이스북이 독자적으로 스마트폰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 p.414

저커버그는 페이스북의 주식 구조 운용에 대해 확고한 견해가 있었다. 핵심은 저커버그 자신이 계속, 아마 영원히, 통제권을 쥐는 것이었다. 방법은 주주를 두 등급으로 나누어 상위 등급(자신이 절대다수의 지분을 가진 등급)에 모든 표결에서의 지배권을 부여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그의 멘토 돈 그레이엄의 《워싱턴포스트》 같은 가족 소유 신문 기업들이 소수 지분으로 회사를 지배하는 수법과 비슷했다. 구글의 래리 페이지와 세르게이 브린Sergey Brin 역시 같은 방법을 썼다. 하지만 페이스북의 계획은 창업자 1인이 가진 통제권 면에서 그들을 뛰어넘었다. 저커버그는 의결권주의 56퍼센트를 보유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다른 주주들이나 이사들의 명령에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
또한 저커버그는 페이스북의 운영 방식을 “해커 방식”이라고 불렀다. 그는 이 단어에 “(부당한) 부정적 의미”가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내가 만난 해커 대부분은 세상에 긍정적 영향을 미치고 싶어 하는 이상주의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라고 단언했다. 그는 해커 방식을 이렇게 설명했다. “해커 방식은 끊임없는 개선과 반복을 통해 만들어가는 접근법입니다. 해커들은 무언가가 언제나 더 나아질 수 있으며 무엇도 결코 완벽하지 않다고 믿습니다. 해커의 할 일은 바로잡는 것뿐입니다. 때로는 불가능하다고 말하거나 현실에 안주하는 사람들의 면전에서 그렇게 해야 합니다.” --- p.420~421

비슷한 수법으로 주가를 떠받칠 수 없게 되자 페이스북 주가는 하향세를 걸었다. 일주일이 지나자 주가는 32달러까지 떨어졌다. 2012년 9월에 접어들었을 때는 20달러 지폐로 페이스북 주식 1주를 사면 2달러와 잔돈까지 돌려받을 수 있었다.
심지어 3만 7500달러의 투자로 수억 달러를 벌어들인 초기 투자자 리드 호프먼조차 페이스북 기업공개를 “얼토당토않은 얼간이짓egregious fuck-up”으로 평했다. 그 뒤로 몇 달간 피해를 입은 투자자들은 페이스북, 나스닥, 주간사 회사에 소송을 제기하느라 여러 관할지의 법원을 계단이 닳도록 들락거렸다. 이후 몇 년에 걸쳐 페이스북, 은행가들, 나스닥은 합의금으로 수백만 달러를 지불해야 했다. --- p.425

뉴스피드 속 모바일 광고는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으며 페이스북의 연 매출을 수백억 달러로 끌어올렸다. 물론 뉴스피드 광고의 창의적 작동 방식이 언젠가 국가적 선전 공작에 악용되어 미국 대통령 선거에 영향을 미칠지 모른다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논란, 위기, 긴장의 해였던 2006년과 마찬가지로 2012년에 페이스북은 새로운 차원의 성공을 거둘 토대를 놓았다. 페이스북을 집어삼킬 듯하던 스마트폰 물결은 뉴스피드 이후 최대의 호재로 드러났다. 페이스북 홈이 참담하게 실패하긴 했지만 iOS용과 안드로이드용 네이티브 앱은 각 플랫폼에서 단연 가장 큰 인기를 끌었다. 페이스북 자체의 ‘플랫폼’으로 말할 것 같으면 수천 명의 개발자가 자신들이 만든 앱의 로그인 수단으로 페이스북 커넥트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 p.431

13장 미래를 사다
저커버그는 자신에게 지평선 너머를 볼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자부했으며, 자신의 계획에 위협이 될 만한 것은 무엇이든(회사이든 기술 변화이든) 주시했다. 2011년 구글이 자체 소셜 네트워크 상품 ‘구글 플러스Google Plus’를 출시하자 저커버그는 몇 주 동안 회사 문을 걸어 잠근 채 아무도 퇴근하지 못하게 했으며 주말에도 구내식당을 운영했다. 전 직원 대상 연설에서 그는 자신의 고대 로마 영웅 카토를 소환해 “카르타고 델렌다 에스트Carthago delenda est”(카르타고는 멸망해야 합니다)라는 외침으로 연설을 마무리했다. 아날로그연구소는 인쇄기를 켜서 이 라틴어 명구가 적힌 포스터를 찍어냈다. 사실 저커버그는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구글 플러스는 실패작이었다.
1년이 지난 지금 그는 누군가 소셜 사진 공유의 미래를 낚아채면 페이스북이 곤란해지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가장 좋은 방안은 페이스북이 인스타그램을 사들이는 것이었다. --- p.440

어떤 의미에서 스피걸의 거절은 2006년 저커버그가 야후의 인수 제안을 거절한 것과 비슷했다. 두 경우 다 창업자들은 큰 회사가 일을 망칠 것이라 생각했다. 10년 전 저커버그는 인터넷에서 성장한 십 대였으며, 이런 이점 덕에 당시 기술 업계를 지배하던 늙은 용의 목을 벨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신세대의 기술 DNA에는 모바일 사고방식이 속속들이 배어 있었다. 젊은이들은 페이스북을 낳은 웹사이트 세상이 한물갔음을 알고 있었다. --- p.451

마크 저커버그는 그런 일이 일어나도록 내버려둘 생각이 없었다. 오나보 수치에 따르면 왓츠앱은 세계적 강자가 될 터였으며 전 세계에서 페이스북 자체 메시징 사업의 걸림돌이 될 수 있었다. 왓츠앱 이용자는 4억 5000만 명이었는데 인도가 4000만 명, 멕시코가 3000만 명이었다. 어떤 나라에서는 시장의 3분의 2를 장악했다.
고작 2년 전인 2012년 저커버그는 인스타그램이 평가액의 절반으로 라운드를 종료할 때 10억 달러를 제시해 세계를 놀라게 했다. 이제 그는 왓츠앱에 훨씬 큰 금액을 쓸 각오가 되어 있었다. 쿰과 액턴이 자기네 회사를 트위터 수준(당시 약 200억 달러였다)으로 평가해달라고 요구했을 때 그는 멈칫거리지 않았다. 충격적이었다. 그때 왓츠앱은 직원이 55명가량에 불과했다. 대다수 미국인은 왓츠앱을 들어본 적조차 없었다. --- p.466

며칠 만에 저커버그는 가상현실이 단순히 근사한 잠재적 묘기가 아니라 훨씬 큰 무엇이라고 결론 내렸다. 가상현실은 차세대 플랫폼이었다.
이것을 놓치는 것은 모바일을 놓쳤을 때와 같을 터였다. 페이스북이 모바일이라는 중심축에서 거의 탈락할 뻔한(저커버그에게는 사망 선고를 방불케 한) 사건을 겪은 지 2년밖에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가상현실은 10년 뒤에야 빛을 발할지 모르지만 여기 그 토대를 닦는 회사가 있다고 저커버그는 생각했다. 페이스북이 이 회사를 소유하고 돈을 쏟아부어 가능성을 현실로 만들면 저커버그는 다음번 패러다임 전환에서 단순히 뒤처지지 않는 게 아니라 ‘주인’이 될 터였다. --- p.473

14장 대통령 선거가 몰고 온 파란
그즈음 모런은 러시아정보총국 관련 계정들에서 더 많은 활동을 포착했다. 이번에는 피싱이나 표적 검색이 아니었다. 러시아인들은 페이스북 ‘이용자들’을 조종하고 있었다. 기본적으로 그들은 페이스북 엔지니어들이 설계한 방식대로 페이스북을 공유 시스템으로 활용하고 있었다. 위협정보팀과 페이스북은 이런 활동을 예상하지 못했으며 대처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2008년과 2012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페이스북은 시민 참여를 촉진해 호평받았다. 페이스북은 선거 운동에 요긴한 수단임이 입증되었으며, 공동 창업자 크리스 휴스는 오바마의 첫 번째 당선에 한몫했다. 2008년을 시작으로 페이스북은 이용자들이 후보들에게 질문을 던질 수 있는 토론회를 공동 후원했다. 하지만 네드 모런이 발견한 것은 2016년이 페이스북에 끔찍한, 너무나 끔찍한 해가 되리라는 첫 신호였다. --- p.481

“페이스북 소셜 메시지는 약 6만 명의 유권자로부터 직접적으로 투표수를 증가시켰고 사회적 전염을 통해 또 다른 28만 명의 유권자로부터 간접적으로 투표수를 증가시켜 총 34만 표를 더 끌어냈다. 이는 2010년 투표 연령 인구인 약 2억 3600만 명의 약 0.14퍼센트에 해당한다.” 이 정도면 박빙의 승부가 펼쳐지는 나라에서는 선거 결과를 좌우할 수 있는 수치다.
더 심란한 사실은 페이스북이 이 힘을 이용해 선거 결과를 자기 뜻대로 조작할 수 있다는 발상이었다. --- p.486

인기뉴스의 진짜 결말은 거짓 정보와 교묘히 자극된 분노가 뉴스피드를 집어삼켰다는 것이다. 이런 게시물은 ‘가짜뉴스’로 불리게 되었다. 한편으로 가짜뉴스는 성장팀이 참여율을 높이는 데 성공한 결과였다. 당신에게 친구가 거의 없어도 페이스북은 친분이 거의 없는 지인까지 동원해 당신이 반응할 가능성이 가장 큰 이야기를 보여준다. 댓글을 다는 것, 좋아요 단추를 누르는 것, 심지어 게시물을 보려고 몇 초간 스크롤을 멈추는 것 등이 전부 반응이다. 당신의 눈이 게시물 위에 머물러 있으면 페이스북은 이것 역시 관심의 표현으로 간주한다.
설상가상으로 이용자가 웹사이트 링크를 공유하면 페이스북은 링크 출처가 100년 역사의 정론지이든 2주 전에 급조된 가짜 사이트이든 상관없이 똑같은 양식으로 표시했다. 이용자들이 출처를 확인하는 일은 드물었다. 페이스북의 참여 유도 전략과 부실한 필터링 덕에 그 뒤로 몇 년간 가짜뉴스 제작자들은 이 플랫폼이야말로 광고 수익을 거두거나(누군가 게시물을 클릭할 때마다 발생한다) 급진적 이념을 주입하는 금광임을 발견했다. --- p.495~496

페이스북의 많은 사람들이 알았듯, 트럼프 진영이 페이스북 플랫폼을 스트라디바리우스 바이올린처럼 연주했다면 힐러리 진영은 부서진 탬버린처럼 두드렸다. --- p.508

저커버그와 마찬가지로 샌드버그는 페이스북이 가짜뉴스 문제에 너무 늑장 대응했다고 훗날 인정했다. 하지만 선거철이 시작되었을 즈음에는 페이스북 플랫폼 자체가 이상적인 거짓 정보 유포 기계가 되어 있었다.
뉴스피드의 설계와 알고리즘 때문에 가짜뉴스는 사실상 제품 문제, 즉 저커버그의 영역이었다. 하지만 문제 해결에 엔지니어링을 적용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었다. 거짓 정보가 근절되지 않은 한 가지 이유는 저커버그를 필두로 한 페이스북 전체가 표현의 자유를 신봉했으며 사람들이 거짓을 말할 때조차 표현의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고 생각했다는 데 있다. 저커버그는 인류의 선함에 대해 팡글로스Pangloss식 낙관주의를 견지했으며 사람들 스스로 진실을 가려내리라 생각했다(팡글로스는 볼테르의 소설 《캉디드》에 등장하는 낙천주의 철학자다-옮긴이). 게다가 그는 진실성을 판단하는 일에 페이스북이 말려드는 것을 몸서리치도록 두려워했다. --- p.512

15장 프로파간다의 도구와 올바른 길
“러시아인들이 소셜 미디어를 이런 식으로 이용하리라는 건 100퍼센트 예상할 수 있는 사실이었죠. 우리가 미리 생각하지 못하고 찾아내지 못한 건 부끄러운 일이에요.”
사태가 더욱 복잡해진 것은 페이스북이 러시아의 프로파간다를 적발했을 때조차 내부 규칙에 완벽히 부합하는 콘텐츠와 구별할 방법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조사팀은 3000개의 광고와 8만 건의 게시물을 주제별로 분류했는데 ‘인종주의’ ‘안티 힐러리’ ‘LGBTQ(성소수자)’ ‘총기’ ‘이민’ 등은 모두 페이스북에서 허용되는 토론 주제였다. 절대다수 프로파간다는 저커버그가 이용자의 ‘표현의 자유’로 간주한 범주 안에 들어 있었다. 페이스북이 인터넷연구소 페이지들을 폐쇄한 것은 내용 때문이 아니라 ‘개설자’ 때문이었다.
골드먼이 말한다. “마침내 이 광고들의 저의를 알게 되었을 때 가장 골치 아픈 문제는 이것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였어요. 이 광고들을 막으려면 정책을 어떻게 바꿔야 할까요? 사실 이 광고들이 전부 우리 정책에 위배된 건 기묘한 이유 때문이었죠. ‘가짜 계정’이 만든 광고들이었거든요. 만일 진짜 계정이 만들었다면 광고를 중단하기가 여간 힘들지 않았을 겁니다. 이민에 대한 광고를 내보내면 안 된다고 말하고 싶어도 내세울 기준이 전혀 없어요. 이민 논의를 기본적으로 차단하는 기준을 적용하면 미국 시민들과 정치인들이 이민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조차 가로막게 됩니다.” 그렇게 인터넷연구소 페이지들은 삭제되었고 근거는 유령 계정으로 게시물을 올렸다는 것이었다. --- p.537

페이스북은 어떤 게시물에 최고 순위를 부여할지를 결정하는 ‘에지랭크’ 알고리즘을 몇 년에 걸쳐 발전시켰다. 하지만 결국은 시스템이 너무나 복잡해져서 10만 개 이상의 기준이 뒤섞인 디지털 잡탕이 되어버렸다. 가중치와 균형추는 뉴스피드팀 내에서 일하는 데이터과학자들이 끝없는 실험을 반복한 결과물이었다. 그들의 보고 대상은 성장팀이었다. 따라서 성공의 잣대가 성장팀의 관심사인 이용자 저변 구축과 유지임은 놀랄 일이 아니었다. 참여 역시 여전히 중시되었다.
이런 시스템의 결함을 가장 잘 표현한 사람은 구글의 전 인터페이스 엔지니어 트리스탄 해리스Tristan Harris다. 일찍이 그는 자신의 회사가 중독 기법을 쓴다고 비판했다. 주의력을 붙잡아두는 전통적 방법(TV와 연재소설에서 잘 드러나는 방법)이 21세기 들어 디지털 도구와 인공지능 기술 때문에 유해한 중독성 면에서 새로운 차원에 도달했다는 것이 그의 기본 논지였다.
그는 뉴스피드를 비롯한 ‘무한 스크롤’이 최악의 범인이요 페이스북은 최악 중의 최악이라고 생각했다. 미국에서는 모바일 인터넷 이용 시간 중 4분의 1가량이 페이스북에 쓰이고 있었다. 이보다 심한 나라도 있었다. 해리스가 보기에 이 서비스들은 단순한 중독성 오락거리가 아니라 인류의 생존에 대한 위협이었다. 영화에서는 인공지능의 위협을 터미네이터풍 로봇들이 우리를 쫓아다닌다는 식으로 묘사하지만 우리가 정말로 두려워해야 할 것은 마크 저커버그라고 그는 주장했다. 저커버그의 알고리즘은 거부할 수 없는 디지털 정크 푸드로 우리의 혼을 빼놓는다고 말이다. 가짜뉴스는 선정적이고 폭력적인 콘텐츠에 눈길이 가는 우리의 본성을 악용해 점점 세력을 키웠다.
해리스가 말한다. “우리는 사실 인간 지능보다 강력한 인공지능을 만들어놓고 그걸 사회로부터 숨기기 위해 다른 이름을 붙였어요. 그걸 페이스북 뉴스피드라고 부른 탓에 고삐가 완전히 풀려 아예 부릴 수 없는 인공지능을 우리가 만들었다는 사실을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했죠.” 해리스는 뉴스피드를 이용하는 것이 무적의 컴퓨터 체스 선수와 대결하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우리의 약점을 알기에 매번 우리를 이긴다는 이유에서다. --- p.549~550

16장 사상 최악의 정보 유출 사건
우리가 공원에 들어가 벤치에 앉자 그는 전문적인 통계 네트워킹 이론을 조금 가르쳐주었다. 하지만 왜 페이스북 이용자 8700만 명의 개인 정보를 미심쩍은 정치 컨설팅 업체에 넘겨 도널드 트럼프의 당선에 이용되도록 했는지는 두 번째 인터뷰에서 설명했다.
2018년 3월 이 뉴스가 보도되면서, 선거 이후로 페이스북에 대해 쏟아져 나오던 온갖 부정적 보도가 아무렇게나 부려둔 화약 더미처럼 쌓여가다 순간적으로 폭발한 것 같았다. 마블 영화의 클라이맥스를 방불케 하는 불덩이를 일으키며.
영원히 불명예로 남을 컨설팅 업체의 이름은 케임브리지 애널리티카였다.
참사의 뿌리는 페이스북이 몇 해 전 내린 결정들로 거슬러 올라간다. ‘플랫폼’에서 개발자들에게 정보를 공유하기로 한 결정, 선정적 콘텐츠가 득세하도록 뉴스피드를 변경하기로 한 결정, 이용자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해 구축한 한없이 광범위한 신상 정보를 바탕으로 광고주들이 마이크로타기팅을 할 수 있게 한 결정 말이다. 페이스북의 주된 강점이자 약점인 성장 숭배는 말할 것도 없다. --- p.568~569

결론부에서 그들은 좋아요가 선호도를 남들에게 알리고 제품과 서비스를 개선하는 장점이 있지만 자신의 비밀이 본의 아니게 노출되는 단점이 이를 상쇄할지 모른다고 언급했다. “기업, 정부 기관, 심지어 자신의 페이스북 친구들이 소프트웨어를 이용해 자신이 공유를 의도하지 않았을지 모르는 지능, 성적 취향, 정치적 견해 같은 속성을 추론할 수 있다. 이런 예측이 (설령 부정확하더라도) 개인의 안녕이나 자유, 심지어 생명에 위협을 가할 수 있는 상황을 상상할 수 있다.”
그 뒤로 몇 달간 코신스키와 스틸웰은 예측 방법을 개선했으며 좋아요를 이용하는 것만으로 연구자가 누군가를 동료나 가족, 심지어 배우자보다 더 잘 알 수 있다고 주장하는 논문을 발표했다. 그들은 이렇게 썼다. “평균적인 직장 동료, 동거인이나 친구, 가족, 배우자보다 컴퓨터 모형이 더 우수한 예측 능력을 발휘하는 데 필요한 좋아요 개수는 각각 10개, 70개, 150개, 300개다.” --- p.574

사실 데이터베이스는 1500만 명보다 훨씬 많았으며, 어쩌면 코건이 도시락 오찬에서 예측한 5000만 명보다 많았을지 모른다. 페이스북의 계산에 따르면 8700만 명까지 가능했다. 하지만 세상은 그 뒤로 2년이 지나도록 이 사실을 알지 못했다. --- p.593

자료에 따르면 오픈 그래프를 악용한 것은 케임브리지 애널리티카만이 아니었다. 페이스북은 이 문제를 점검해 400명 이상의 개발자가 비슷한 방식으로 규정을 위반했음을 발견했다. 6만 9000개의 앱에 일시 정지 조치가 취해졌는데 그중 1만 개는 페이스북 이용자 데이터를 부정하게 사용했을 가능성이 있었다. 하지만 이 어마어마한 수치는 별 반향을 일으키지 못했다. 이즈음 페이스북 스캔들이 하도 널리 퍼진 탓에 또 하나의 그저 그런 뉴스로 취급받았기 때문이다. --- p.613

17장 표현의 자유 대 검열
중동에서 ‘아랍의 봄’ 운동이 벌어지는 동안 페이스북은 자유를 가져다주는 힘으로 칭송받았다. 페이스북 페이지를 운영하는 이용자들은 2010년 튀니지 봉기(튀니지 혁명 또는 재스민 혁명)를 조직하는 데 일조했다. 2011년 이집트의 정부 전복 운동(이집트 혁명)에서도 윤활유 역할을 톡톡히 했다. 한 컴퓨터 프로그래머가 경찰에게 살해되자 ‘우리 모두가 칼레드 사이드다We Are All Khaled Said’라는 이름의 페이스북 페이지가 개설되어 저항 운동을 촉발했으며 이로 인해 정권이 무너졌다.
페이스북 정책 담당 임원을 지낸 팀 스파라파니는 〈프런트라인〉에 이렇게 말했다. “페이스북에 특별한 힘이 있는 것 같아요. 선을 행하는 힘 말입니다. 사람들이 이 도구를, 공짜 도구를 이용해 그전에는 결코 할 수 없었던 일을 하고, 조직하고, 자신들의 세상을 공유하고, 봉기를 막으려던 정권이 자신들에게 덮어씌운 폭력 혐의를 폭로하는 것을 보고 들떴던 기억이 납니다. …… 그보다 더 실감 날 순 없었죠.
몇 년간 정의로운 운동가들에게 힘이 되었던 후광 효과 때문에 페이스북은 다른 나라에서 악용될 가능성을 보지 못했다. 멘로파크에서는 페이스북 플랫폼이 가진 해방의 마력이 권력자에게 분열과 지배의 수단으로 쉽게 악용될 수 있음을 상상하기 힘들었다. --- p.617

사람들은 자기 목숨만 끊은 것이 아니었다. 살인 역시 페이스북의 골칫거리였다. 이를테면 2016년 6월 안토니오 퍼킨스Antonio Perkins라는 스물여덟 살 남성이 페이스북 라이브로 스트리밍을 하고 있었는데 누군가 그의 머리와 목에 총을 쏘아 치명상을 입혔다. 페이스북은 잔혹한 장면이 들어 있지 않아서 정책 위반이 아니라며 동영상을 그대로 두었다. 바로 전날에는 프랑스에서 한 청년이 경찰 2명을 살해한 직후 13분간 페이스북 라이브로 폭언을 늘어놓았다. 페이스북 직원들은 이 사건을 보고서 불안감이 들었다. --- p.626

콘텐츠관리자들은 전 세계에서 일하며, 이용자들에 의해 부적절한 콘텐츠로 신고되었거나 인공지능 시스템에 의해 규정 위반 가능성이 제기된 수백만 건의 콘텐츠를 걸러낸다. 그들은 게시물들이 페이스북 규정을 실제로 어겼는지 재빨리 판단한다.
하지만 콘텐츠관리자의 절대다수는 엔지니어, 디자이너, 심지어 규칙을 정하는 정책 담당자와 접촉이 거의 없다. 또 대부분은 정식 직원이 아니다. 페이스북은 마닐라와 인도에 사무소를 연 2012년 이후로 아웃소싱 회사에 콘텐츠관리자의 채용과 투입을 위탁하기 시작했다. 콘텐츠관리자들은 전 직원 회의에 참석할 수 없으며 페이스북 물품을 지급받지 못한다.
페이스북만 콘텐츠관리자를 두는 것은 아니다. 구글, 트위터, 심지어 소개팅 앱 틴더 같은 곳도 플랫폼에서 벌어지는 일을 감시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페이스북은 단연 독보적이다.
전 세계 콘텐츠관리자 인력이 서서히 수만 명으로 증가하는 동안 처음에는 눈여겨보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맨 처음 주목한 곳은 학계였다.
대학원생이던 세라 T. 로버츠Sarah T. Roberts는 여느 사람과 마찬가지로 인공지능이 이 일을 하는 줄 알았다. 그러다 컴퓨터과학을 공부하는 로버츠를 비롯해 이 현상에 주목한 사람들은 새로운 유형의 노동자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기술 기업이 선호하는 엘리트 학위와 공학 배경은 없지만 기업 운영에 꼭 필요한 인력이었다. 그들의 존재는 21세기 인터넷이 이전 시대를 특징짓는 이상주의로부터 진로를 변경했음을 상기시키는 징후이기도 했다.
마크 저커버그는 페이스북을 시작하면서 약간의 일손이면 충분하리라 예상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의 보좌진은 불쾌하고 (심지어) 불법적인 콘텐츠로부터 대중을 보호하기 위해 하루 종일 페이스북 콘텐츠를 감별할 인력이 필요할 것임을 일찌감치 알아차렸다. 그들을 공장에 집어넣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들은 디지털 세계의 청소부가 되어, 귀한 대접을 받는 직원들이 퇴근해 잠든 밤에 나타나 바닥을 쓸고 닦는 그림자 노동력처럼 뉴스피드를 청소했다. 흐뭇한 광경은 아니었다. 게다가 이런 청소 작업은 고역일 때가 있었다. 그들은 강간, 불법 수술, 끝없는 성기 사진을 매일같이 들여다봐야 했다. 그 모든 역겨운 콘텐츠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거북했던 페이스북은 이 때밀이 부대의 존재를 숨기는 편을 선호했다. --- p.631~632

페이스북이 인공지능 적용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는 또 다른 고질병은 어마어마한 개수의 가짜 계정 문제다. 가짜 계정이 사기, 증오 발언, 거짓 정보의 온상임은 놀랄 일이 아니다. 2019년 1월부터 3월 사이에 페이스북이 차단한 가짜 계정 개설 시도가 20억 건이라는 발표에 사람들은 경악했다. 이것은 시스템상의 실제 이용자 수에 맞먹는 수준이었다. 그중에는 가짜 페이스북 신분을 대량으로 만들려는 어설프지만 끈질긴 시도가 압도적이었다. 앨릭스 슐츠는 《뉴욕타임스》에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차단하는 계정의 절대다수는 지극히 어수룩한 적들이 만든 것입니다.” 하지만 모두가 지극히 어수룩한 것은 아니다. 인공지능을 이용하고 온갖 수단을 동원했지만 페이스북은 활동 계정의 약 5퍼센트가 가짜라고 인정한다. 개수로는 1억 개를 훌쩍 넘는다.
이것이 페이스북의 딜레마다. 규모가 너무나 커서 문제 해결에 진전이 있다 한들 남은 문제가 어마어마하다는 말이다. 그리고 게시물을 올리기로 작정한 사람들은 페이스북의 전술에 적응하는 법을 배운다. --- p.645

저커버그가 느끼는 불편함의 일부는 감시를 달가워하지 않는 그의 성향에서 비롯한다. 그는 페이스북의 콘텐츠가 해롭거나 심지어 치명적일 수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표현의 자유가 해방의 원동력이라고 믿는다. “표현의 자유는 페이스북의 창립 이념이에요. 사람들에게 발언권을 부여하면 그들은 자신의 경험을 공유해 세상을 더 투명하게 만들 거예요. 사람들에게 경험을 공유할 개인적 자유를 부여하면 결국 긍정적인 결실을 거두게 될 거라고요.” --- p.650

콘텐츠관리는 아웃소싱할 수 있을지 몰라도 페이스북 플랫폼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한 책임을 아웃소싱할 수는 없다. 저커버그 자신이나 자신의 회사가 전 세계 표현의 결정권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저커버그의 말은 옳다. 하지만 세계를 연결함으로써 그는 그 거북한 위치에 스스로 올라섰다.
그의 소관이다. 크라이스트처치 학살 사건을 비롯한 모든 것이. --- p.652~653

18장 진실성 회복하기
이 재앙으로부터 몇 주 지나지 않아 페이스북은 해커들이 시스템의 결함을 악용해 이용자 5000만 명에 대한 정보 접근권을 얻었다고 발표했다. 샌드버그와 저커버그의 계정까지 포함되어 있었다.7 케임브리지 애널리티카 때와 달리 이것은 문자 그대로 ‘유출’이었다. 침입자들이 이용한 취약점은 1년 넘게 알려져 있던 것이었다. --- p.661

한때 페이스북은 실리콘밸리 최고의 인재 레이더였다. 하지만 이제는 경쟁사들이 페이스북 인력을 사냥했다. 직원들은 퇴사해 스타트업을 차리기에 좋은 시기라고 생각했다. 규모가 큰 인공지능 교육 기관의 한 컴퓨터과학 교사는 페이스북이 한때 최고의 취직 자리였다고 말한다. 그런데 지금은 학생 중에서 30퍼센트는 페이스북을 고려하지 않을 거라고 그는 추측한다. 도덕적 이유 때문이다. --- p.668

사실 페이스북은 사람들의 음성을 엿들을 필요도 없었다. 페이스북은 광고 대상의 범주뿐 아니라 그 범주에 해당하는 개개인의 정확한 신원까지 광고주가 타기팅할 수 있도록 하는 데 필요한 모든 개인식별정보 데이터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미국 내 전체 광고 지출의 대다수가 디지털 광고로 넘어가는(이 목표는 2019년 실제로 달성되었다) 와중에 페이스북은 광고주들에게 필수 광고 매체가 되었다. 디지털 광고에서, 특히 주무대인 모바일 분야에서 페이스북의 유일한 경쟁 상대는 구글이었다. 두 회사는 전체 디지털 광고 시장의 약 60퍼센트를 차지했으며 모바일 시장의 3분의 2 이상을 점유했다. --- p.673

페이스북 이용자들은 아무 데도 가지 않았다. 매출 또한 마찬가지였다. 프리처드가 말한다. “분명한 것은 사람들이 여전히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을 이용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여전히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에 광고를 싣고 있고요.” --- p.675

문제를 더 꼬이게 만든 것은 갑자기 일상생활의 지배자가 된 거대 기술 기업들에 대한 언론과 정부, 그리고 어느 정도는 대중의 극적인 태도 변화였다. 기술 업계 내부자들은 이것을 ‘테크래시Techlash’라고 불렀다. 이 역풍을 맞은 웨스트코스트(미국 서부 해안 지역) 공룡들 중에서 페이스북은 가장 큰 조롱과 우려의 대상이 되었으며, 저커버그는 한때 기술 업계를 둘러쌌던 찬란한 후광이 사라지는 데 일조한 인물로 치부되었다.
하지만 반목하는 강대국 정상들이 정상회의에서 얼굴을 마주하듯 저커버그와 쿡은 매년 여름 투자은행 허브 앨런이 주최하는 선밸리 콘퍼런스에서 연설하기 위해 대개 시간을 냈다. 2017년에 저커버그는 쿡의 졸업식 축사에 화가 나 있었다. 쿡은 졸업생들에게 좋아요로 자신의 가치를 평가하지 말라고 했는데, 저커버그는 이를 자신에 대한 비판으로 받아들였다.
팀 쿡은 연설할 때마다 저커버그를 꼬집었다. 그즈음 쿡은 프라이버시를 애플의 고객 응대를 떠받치는 기둥으로 홍보하고 있었다. 그의 험담은 구글과 페이스북을 겨냥했다. 하지만 사실상 구글만이 애플의 직접 경쟁자였기에 저커버그는 난데없이 뒤통수를 맞은 꼴이었다. 케임브리지 애널리티카 사태 이후에 쿡은 자신이 저커버그의 입장이었다면 어떻게 했겠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그가 말했다. “나라면 그런 상황에 처하지조차 않았을 겁니다.” 직후에 실시된 인터뷰에서 저커버그는 쿡의 발언에 대해 “입으로야 무슨 말을 못 하겠어요”라고 평했다. --- p.682

애플은 페이스북의 엔터프라이즈 프로그램 접속을 아예 차단하기로 결정했다. 경고도 없었다. 내부 애플리케이션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것은 회사의 전기를 끊어버린 셈이었다. 오나보 앱만 먹통이 된 것이 아니라 개발 중이던 프로그램의 모든 시험 버전이 작동을 멈추었다. 게다가 구내 카페들의 메뉴를 보여주는 등 페이스북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유용한 서비스들까지 갑자기 작동을 멈추었다. 페이스북 사람들이 드넓은 본사 단지를 돌아다닐 때 널리 애용하는 직원 셔틀버스 내부 앱 역시 작동하지 않았다. --- p.684

페이스북의 명성이 깎여 나가는 와중에 사업은 승승장구하는, 두 측면의 단절을 상징하는 분할 화면 같은 순간이었다. 페이스북 캠퍼스가 멈추어선 것은 위태로운 프라이버시 관행이 초래한 직접적 결과였다. 하지만 돈은 계속해서 쏟아져 들어왔다.
--- p. 6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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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스북이 꿈꿨던 연결은 무엇일까요? 그들은 무엇을 고민하고 있을까요? 그 고민을 어떻게 풀어가고 있을까요? 그들이 바라보는 미래는 어디일까요? 그들의 과거, 현재, 미래가 궁금한 이들에게 이 책을 권합니다.
- 김상균 (인지과학자, 강원대학교 교수, 《메타버스》 저자)
현재 애플,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아마존, 심지어는 테슬라까지 포함해서 실리콘밸리의 어떤 기업도 페이스북처럼 당돌한 야심을 갖고 있지는 않은 것 같다. 이 책은 실리콘밸리에서 가장 당돌한 기업 페이스북의 야심이 얼마나 큰지에 대한 기록이라 읽어도 흥미로울 것이다.
- 신현규 (《매일경제신문》 실리콘밸리 특파원)
페이스북이 인류에 심대한 영향을 미치면서 지구인 3분의 1의 마음을 사로잡은 이야기는 정말 경이롭다.
- 뉴욕타임스
긴박감과 긴장감 넘치는 페이스북의 역사.
- 워싱턴포스트
수십억 명의 이용자를 연결하고 그들이 “좋아요” 할 정도로 많은 콘텐츠를 제공함으로써 페이스북은 자신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고 있는 걸까?
- 월스트리트저널
생생하고, 최신 정보로 가득하며, 내부로 깊이 파고든다.
- 이코노미스트
저커버그는 무한한 야망과 수많은 코드 라인을 통해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제국을 건설했다.
- 더타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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