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어리 한 마리를 만났을 때는 바닷속 신비로움을 향한 열정이 지속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 열정은 바닷속 세상을 발견하라며 매번 나를 더 먼바다로 이끌었다. 그리고 바닷속에 사는 매력적인 생명체들은 조용하기는 커녕 하나씩 내게로 다가와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 p.11
1989년 태평양에서는 세상에서 가장 외롭게 사는 고래의 음성을 수중 청음기로 포착하는 데 처음으로 성공했다. 그 고래는 참고래라 특정할 수 있는 노래를 불렀다. 노래의 주파수는 52헤르츠에 달했는데, 이는 튜바라는 악가의 최저음에 해당한다. 보통 10헤르츠에서 35헤르츠 사이의 음성 주파수로 소통하는 참고래들의 귀에는 지나치게 날카로운 고음이었다. 그 탓인지 이 고래는 수십 년 전부터 노래하고 말하며 계속 동료들을 부르지만, 전혀 대답을 듣지 못했다. 고래는 홀로 광활한 바다를 떠돌아다니고, 해마다 오직 수중 청음기만이 그 소리를 듣는다. 이 고래의 이상한 목소리가 어디에서 나오는지 아무도 모른다. 어떤 사람들은 그가 대왕고래와 참고래의 잡종이라 여기고, 또 어떤 사람들은 선천적인 기형이라 여긴다.
더러는 태어날 때부터 귀가 들리지 않아 목소리를 교정할 수 없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넓은 바다에서 그 언젠가 다른 고래들을 만난 적이 있었는지도 알 수 없다. 만일 만났다면 그들을 알아보았어도 말을 걸 수는 없었을텐데, 그때 그의 기분이 어땠을지도 역시 알 수 없다. 그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매년 혼자 이동하는 외로운 고래를 쫓아갈 수는 있지만, 아마도 그 고래를 관찰할 수 없었다. 인간에게 이 고래는 그의 노래로만 존재할 뿐인데, 그 노래 때문에 다른 고래들에게서 고립되었다. 한편 텅 빈 태평양에서 고래가 기대를 품고 끊임없이 부르는 희망의 노래이기도 하다.
--- pp.40~42
우리에게 고래의 행동에 관한 많은 정보와 연구 기회를 제공하고, 심지어 지금 당장은 볼 수 없지만 새로운 종을 발견하게끔 도와준 것은 결국 이 신중한 동물들의 목소리다. 바다는 이처럼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와 우리가 자신에 대해 얘기해주기를 바라는 두려움 많은 생물로 가득하다. 바다를 가득 메우고 있는 소심한 생명체들은 홀로 부르는 외로운 노래 속에 용기가 없어 함께 나누지 못한 경이로움을 간직하고 있다.
--- p.43
물고기의 공동체는 정어리 떼나 청어 떼처럼 같은 종이 무리 지어 다니는 것으로 요약되지 않는다. 바다에서 다른 물고기 종들끼리도 사회적 관계를 맺으며, 서로 닮지 않았어도 상대를 이해하기 위해 언어를 만들어낸다.
--- p.59
물고기는 학교에 갈 필요가 없다. 물고기로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다른 식으로 아주 잘 배우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물고기의 어린 시절은 약간 복잡하다. (.…) 덜 발달한 아주 작은 치어는 아무 지표도 없이 깊은 바다의 플랑크톤 속에 흩어져 있다. 아주 작은 치어는 수영도 할 줄 모르고, 영양도 섭취할 줄 모르고, 심지어 숨도 쉴 줄 모른다. 그저 이리저리 떠다니면서 알의 노른자를 통해 영양을 공급받고 피부를 통해 분출한 산소를 얻는다. 무엇이든 다 배워야 하는 존재다.
--- pp.71~72
물고기는 성장하면서 헤엄치는 법을 끊임없이 다시 배운다. 다시 배우는 것, 다시 발견하는 것이야말로 어떻게 보면 인간의 숙명이라 할 만한데, 특히 하교에 다닐 때 그러하다.
--- p.73
문어의 초기 삶은 몹시 슬프고 극적이다. 일단 알이 수정되면 수컷은 다른 일을 하러 가버리고, 암컷은 알을 낳은 동굴 속에 남아서 태아들이 꿈틀거리고 있는 종유석 모양의 작은 흰색 덩어리를 돌보고 산소를 공급한다. 알이 부화할 때까지는 시간이 오래 걸린다. 헌신적으로 알을 보호하던 암컷은 알을 낳은 뒤로 먹지 못한 탓에 새끼가 부화하기 직전에 쇠약해져 죽고 만다. 암컷은 결코 새끼와 대화를 할 수도 없고 자신의 지식을 새로운 세대에게 전해줄 수도 없다. 달라서 어린 문어는 모든 것을 스스로 발견해야 한다.
--- p.84
바다 생명체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면, 그 속에는 때로 이런 식의 구조 요청이 숨겨져 있다. 이틀이 보내는 고뇌의 신호를 알아채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 p.116
선별적으로 잡을 수 있는 해저를 보호할 수도 있는 낚싯줄 대신에 대구 떼를 모조리 잡기 위해 트롤망을 사용해 서식지 전체를 긁어내기 시작했다.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 언제나 더 많은 대구를 잡아야만 했다. 잡은 것 가운데 일부만 소비하는 한이 있더라도 어린 대구까지 잡아 시장을 포화상태로 만들었다. 낭비가 이익의 동의어가 되었다. 매년 200만 톤씩 대구를 잡다 보니 600년 동안 인류를 먹여 살릴 만큼 놀랍도록 풍부했던 대구는 10년 만에 씨가 말라버렸다.
--- pp.128~129
인류가 만족할 줄 모르는 기계를 공급하고, 미친 듯이 돌아가는 기계를 통제할 수 없게 되는 동안, 사람들은 생명을 보존하고 바다를 복원할 방법을 찾는다. 그들은 미래를 위한 진취적인 생각을 고안하거나, 과거의 현명한 원칙을 새로이 바꿔 나가는 방식을 취한다.
--- p.142
바다는 우리 모두의 것이며, 바다에서 나오는 산물의 공평한 분배는 연대, 어선단과 조업 장비의 제한 그리고 직업의 다양성에 바탕을 둔다는 사실을 알았다. 기본 원칙은 간단했다. 다들 배부르게 먹을 수 있어야 한다. 단, 바다가 줄 수 있는 것 이상을 채취해서는 안 된다.
--- p.143~144
운 좋게도 나는 바닷속 생물의 삶과 비밀을 자주 목격했다. 해저에서 펼쳐지는 스펙터클을 통해 바다의 이야기를 직접 듣는 일은 무척이나 행복하다. 바다에서 멀리 떨어진 상점의 상품이나 조리된 요리에서 들리는 그들의 이야기 또한 즐겁다. 상품의 기원과 투명한 팩에 담긴 생선 덩어리에 관심을 두고, 이 생선은 어디에서 왔으며 그의 바닷속 삶은 어떠했을지 상상해보기. 이것이 바로 자연과의 끊어진 관계를 회복하는 첫걸음이자, 먹이사슬에서 우리의 위치를 파악하고, 그 안에서의 우리 역할을 이해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과정에는 당연히 존중이 전제되어 있다.
--- p.145
무엇이든 더 사라고 부추기는 상점과는 달리 자연은 우리에게 한계를 지키라고 제안한다. 생태계에서 우리의 자리와 역할을 자각한다면 자연은 우리가 생태계를 지킬 수 있게 이끌어줄 것이다.
--- p.146
운명의 부름에 따라 대양으로 가야 하는 장어. 불행히도 극복할 수 없는 장애물이 길을 막고 있다 할지라도, 영원히 기다려야 한다면 장어는 그럴 준비가 되어 있다. (.…) 마치 불사신처럼, 장애물이 사라질 때까지 필요한 시간을 기다린다. 자신의 운명을 실현할 때까지 죽지 않기로 결심한 듯하다.
--- p.158
오늘날 존재하는 종들이 자꾸 사라져간다는 사실에 불안해하는 것은 아주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존재들의 소멸에 누가 불안감을 느낄까? 그들 역시 큰 위협을 받고 있는데 말이다!
--- p.168
우리가 얻은 현재의 시식이 분명 여전히 미미하며, 과거의 지식이 잘못된 것으로 밝혀지듯 현재의 지식이 미래에 정확하지 않다고 판명날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 안심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가 ‘지구는 평평하며 바다에는 오직 74종의 물고기만 산다’는 과거의 믿음과 확신을 조소하듯, 우리 시대의 확신도 언젠가는 조롱당할 수 있다. 지금은 바다 생물의 약 91퍼센트가 여전히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니 계속해서 신화를 쓰고, 빈 페이지를 꿈으로 채워야 한다. 존재하기 위해서, 그들의 전설을 우리가 믿게 하기 위해서 오직 우리의 꿈을 기다리고 있을 미래의 발견이 바다의 어둠 속에서 헤엄치고 있다.
--- pp.182~183
인간의 기술이 바다 생물의 기술을 모방해 발달하는 것처럼, 우리 사회도 그들의 생존 원칙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발전할 수 있다. 거울의 전설은 수중 문명의 존재를 가정했지만, 사실 바다 밑에는 이미 우리가 모델로 삼을 만한 공동체를 이룬 수많은 존재가 있다!
바다는 우리 세계에 아이디어를 제공해줄 수 있는 동력을 지녔다. 수생 생태계에는 진창도 없고 쓰레기도 없다. 산호초의 공간을 최적화해서 우리 도시에 영향을 줄 수도 있다. 산호초에서 여러 종이 함께 살아가는 방법은 우리 사회에 모범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리더 없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물고기들의 의사결정은 정치적으로 새로운 아이디어를 낳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왜 우리는 발명가들의 연구와 도시 계획가들의 결정을 기다리고 있을까? 개인적인 차원에서 보더라도, 해양 생물과 그들의 놀라운 삶은 우리 각자에게 좋은 아이디어를 제공해줄 수 있다.
--- pp.198~199
우리는 이야기 나누고 싶었던 모든 것을 서로에게 다 이해시킬 수는 없었다. 그러나 어떤 대화에서든 모든 것을 다 이해시킬 필요는 없다. 그건 심지어 언제나 불가능한 일이다.
--- p.203
고래류는 인간이 사는 세계를 바라보며 우리를 관찰하기를 좋아한다. 태평양의 혹등고래가 우리를 더 잘 살펴보기 위해 눈을 물 밖으로 끄집어내고, 공중에서 긴 가슴지느러미를 부딪쳐서 신호를 보내려 애쓰며 우리의 반응을 관찰하려고 할 때, 우리는 이 존재들이 우리와 소통하기를 얼마나 바라는지 깨닫는다.
--- pp.204~205
이들은 바다 동물에게 말을 가르치기 위해 동물들을 조련하지 않는다. 단어들 너머에 있는 것을 동물들과 함께 나누려고 애쓴다. 사람들 자신이 바다 생물이 사는 세계의 일부가 되려고 노력한다. 저마다 상대의 소리를 해석하지만 무슨 뜻인지 완전히 알지는 못한다. 그렇지만 의도는 언어의 장벽을 넘어선다. 우리는 언젠가는 과학이 바다 생물의 언어를 해석하리라는 희망을 품을 수 있다. 어쩌면 그들이 우리의 언어에 접근하거나, 우리의 대화를 서로에게 통역해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통역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다. 수천 년 전부터 어떤 이들은 통역 없이 그들에게 말을 걸어오지 않았던가
--- p.221
바다의 세계는 단어의 세계와 비슷하다. 자유의 공간이며, 계속 그렇게 남아 있어야 한다. 단어를 구속하고 표현과 말에 규칙을 강요하는 사람들은 바다에 장벽을 세우려고 하는 사람들과 같다. 바다는 어느 누구의 것도 아닌 모두의 것이다. 상상력도 마찬가지다. 그러니까 우리, 자신만의 언어로 말하는 외로운 고래가 되어보기도 하고, 거대한 무리를 이루는 안초비 한 마리가 되어보기도 하자. 또는 창조적인 문어나 끈적끈적한 빨판상어 아니면 신중한 바닷가재가 되어보자. 저마다의 방식대로 우리 이야기를 자유롭게 노래해보면 어떨까. 물속에서 펼쳐지는 이런저런 공상들이 당신에게 어떤 몽상과 아이디어 그리고 그것을 친구들과 나누고 싶다는 욕구를, 어쩌면 당신이 무관심했던 생물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선과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알아가고, 보호하고 싶다는 마음을 심어주기를 바란다.
--- p.2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