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속학이란 사람들의 ‘애달픔’과 ‘하찮음’에 다가가는 학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러한 표현은 지나치게 문학적일지도 모르겠다. ‘애달픔’이란 사람들 저마다가 살아가는 시대, 지역, 상황 속에서 한결같이 인내와 궁리를 거듭하며 열심히 하루하루의 생활을 영위하고 있는 것에 대한 감탄과 찬사이다. 한편으로 그러한 사람들이 종종 사려분별 없는 차별, 억압, 폭력의 피해자가 되기도 하고 역으로 가해자, 혹은 무책임한 방관자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그 잘못으로부터 배우지 못하고, 혹은 배워도 바로 잊어버리고는 또다시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안타깝게도 그러한 사람들이 안고 있는 ‘하찮음’도 인정해야 하는 것이 세상의 일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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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에피소드에는 ‘알몸’과 ‘의복’의 근원이 제시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고간을 통으로 가리기만 하는 남성, 하반신을 짧은 도롱이로 가리기만 하는 여성은 상식적으로는 알몸으로 생활하는 민족이라 칭해도 무방할지도 모른다. 사실 서구에서 온 두 청년은 그렇게 생각하고, 자진해서 알몸이 됨으로써 그 속으로 뛰어들려고 한다. 그러나 뉴기니아인 당사자들의 감각은 달랐다. 그들은 자신들 스스로가 가려야 할 부분을 가린 ‘착의’임을 의심하지 않고, 문자 그대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두 청년은 그들을 당황스럽게 하는 ‘알몸’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즉 ‘알몸’과 ‘착의’의 구분은 인류 사회에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것이지만, 어디까지가 ‘착의’이며 어디부터가 ‘알몸’인지에 대해서는 시대, 지역, 사회 계층에 동반하는 변화가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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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 신경이 쓰이는 것은 슬로푸드의 캐치프레이즈가 패스트푸드 마케팅에 안이하게 회수되어 버리는 점이다. 음식의 생산 유통 과정이 안전성 확보와 전통의 보전, 노동 환경의 적정성을 어느 정도 배려하고 있는지는 개별적으로 검증되어야 하지만, 슬로푸드에 관한 것이 상품을 차별화하는 일종의 기호가 될지도 모르는 상황이 전통음식과 그 관계자의 현장을 뒤덮어 버리는 위험성에 대해서는 단단히 주의해야 한다. ‘와쇼쿠’의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 등재(2013년)도 일본의 풍토 속에서 쌓아 올린 일본 음식의 독자적인 미학과 효용이 평가받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한편, 재료와 관련자 측도 많은 곤란을 안고 있으며, ‘와쇼쿠’의 내실은 유례가 없을 정도로 애매모호해졌다. ‘패스트’와 ‘슬로’와 ‘슬로와 같은 패스트’의 공방에 우리의 음식은 여전히 흔들리고 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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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주거는 전통적인 집과 현대적인 DK양식을 양극으로 하는 벡터의 사이에서 다양한 변화의 양상을 가지고 있다. 주거가 서민에게 있어서 인생 최대의 쇼핑이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그리 편하게는 고칠 수 없고 특별한 문제가 없는 한 현상을 유지한다고 하는 일종의 보수주의 편향이 작동하는 것도 이유가 없지는 않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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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도 아니 그렇기에 이에의 부활을 말하는 반격도 등장하게 된다. 보수파에 의한 ‘옛날의 좋았던 이에’로의 회귀 소망은 각 방면에서 나타나고 있는데, 단적인 것은 ‘부부 별성’을 둘러싼 혼란이다. 이른바 ‘부부 별성 선택제도’는 법안이 작성된 후 이미 20년 이상 지났지만 아직 시행되고 있지 않다. 법안의 의도는 ‘부부가 희망하면 각자의 성을 사용해도 좋다’라는 것이며 희망하지 않는 부부는 지금처럼 지내도 된다. 그런데도 법안에 반대하는 것은 자신 이외의 누군가가 부부 별성이 되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쓸데없는 참견’이라고 밖에 할 수 없다. 반대파의 논거는 ‘일본의 전통에 반한다’라거나 ‘각자의 성을 사용하면 가족의 일체감이 사라진다’와 같은 내용인듯하지만, 원래 일본의 서민이 성을 가지게 된 것은 그다지 전통적은 아니며 부부 별성과 가족의 일체감은 별로 관계가 없다(‘동성 불혼同姓不婚’을 원칙으로 하는 한국, 중국 등에서는 결혼해도 부부의 성이 다른 것이 보통이지만 그것이 가부장제를 방해하지는 않는다). 이와 같은 사실관계에 근거한 반론이 가능하다. 하지만 반대파는 애초 사실이 아니라 감정에 기인하고 있으므로 논의는 암초에 부딪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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