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려난 책상 옆으로 수험생이 주저앉아 주먹으로 두 귀를 꽉 막았다. 질끈 감은 눈과 좌우로 떨리는 머리통. 빠르게 달싹이는 입술에서는 중얼거림이 새어 나왔다.
“아냐, 아냐, 아냐. 현실일 리 없어.”
방송은 계속됐다.
- 부정행위자는 인간자격시험에서 즉각 불합격 처리됩니다. 불합격자는 더는 인간이 아닙니다.
동시에 짐승의 울부짖음이 일제히 터져 나왔다. 차마 형용하기 힘든 짐승의 합창. 인간을 모독하는 듯한 불쾌한 소음.
이어, 열세 마리의 짐승이 난동을 피우면서 시험장에서 탈출했다. 우당탕퉁탕, 의자가 쓰러졌다. 책상은 열을 벗어났다. 짐승이 떨어뜨린 문제지와 답안지 따위가 마구잡이로 짓밟히면서 짐승의 발자국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질서 정연했던 시험장은 엉망진창이 되었다.
---「1권 인간자격시험」중에서
그는 응급처치를 떠올리며 뛰었다. 순식간에 거리가 좁아져 격리실의 벽 앞까지 도착했다. 그는 필연적으로 길쭉한 독서대를, 독서대 위에 자리한 이상의 옆을 지나쳤다.
지나가는 그 순간이었다.
그가 우뚝 멈췄다. 달려가다 말고, 눈동자만 굴려 책을 흘겨보았다.
이상이 뭔지 도무지 이해가 안 돼서 보았을까. 아니면 사람을 죽게 만든 원인이 뭔지 파악하려고 했을까. 그도 아니면, 책이 마술처럼 스스로 넘어가는 신기한 광경이 눈을 사로잡았을까.
피실험체 하나를 더 잡아먹은 책 앞면에 쓰인 제목이 낙인처럼 눈에 박혔다.
《내가 죽어야 하는 37가지 이유》.
사락.
책장이 넘어갔다. 그는 눈도 깜빡이지 못했다. 움직이지 않는 목과 눈꺼풀. 시야 중심에 자리한 문장이 눈을 통해 흘러들었다. 책이 사람에게 읽혔다.
---「1권 연수」중에서
이연우는 슬금슬금 물러나 우리 뒤쪽의 구석으로 몸을 숨겼다.
아빠 거인과 엄마 거인은 자식을 말리는 시늉만 하며, 판매자인 거인에게 말을 걸었다.
“품종 인증을 받은 인간이 있다고요?”
“둘이나 있습니다.”
“호, 수컷은 있습니까?”
“그럼요. 둘 다 수컷입니다. 보시겠습니까?”
“어디 봅시다.”
철컹.
거인은 제임스와 이연우의 우리를 붙잡아 꺼냈다. 제임스와 이연우는 서로 다른 자세로 창살을 붙잡고 균형을 잡았다. 그리고 아빠 거인과 엄마 거인의 시선을 받았다. 상품을 보듯 살피는 눈.
아빠 거인이 제임스와 이연우를 번갈아 보고는, 턱을 쓰다듬으며 물었다.
“혹시 중성화했습니까?”
---「1권 애완인간」중에서
데구르르.
꽝!
시간 정지에 저항하기.
차원 이동만큼이나 버거운 판정.
주사위가 구르고 실패하고, 구르고 꽝을 뽑고, 구르고 실패하고, 구르고 실패하고, 구르고 꽝을 뽑고, 구르고 꽝을 뽑았다.
얼마나 시도했을까. 그 무수한 구름 끝에, 주사위가 마침내 성공을 알렸다.
성공!
파르르.
이연우의 몸에 생명이 돌아왔다. 심장이 박동하며, 혈액이 혈관을 따라 휘돌기 시작했다. 눈꺼풀이 떨렸고, 개미가 기어가듯 천천히 움직이던 고개가 원래의 속도를 되찾았다.
---「2권 시간」중에서
전기 뱀은 순식간에 덩치를 키웠다.
전봇대를 따라 구역 하나를 빙글빙글 돌아 똬리를 틀었고, 쉴 새 없이 번쩍이는 전광이 온 세상을 푸르게 물들였다.
뱀이 하늘을 향해 고개를 쳐들고는 입을 쩍 벌렸다. 포효는 없었으나, 마치 번개가 거꾸로 치솟은 느낌이었다. 번개가 용의 형상을 취했다.
푸른빛 아래, 사람들은 입을 벌리고 머리 위를 올려다보았다. 몰아치는 번개의 섬광 때문에 눈이 아픈데도, 좀처럼 시선을 떼지 못했다.
“와…”
나직한 감탄사만 흘러나왔다. 경찰들은 본분을 잊었고, 도망치던 사람들은 걸음을 멈췄으며, 카메라 앱을 켠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핸드폰을 들어 올렸다.
처음 보는 거대한 이상 개체에 모두가 정신이 반쯤 나갔다.
---「2권 테러」중에서
이연우는 편의점으로 다가가다 멈칫, 걸음을 멈췄다. 그는 편의점의 유리문을, 유리문 앞에 서 있는 남자를 보았다.
‘뭐지?’
웬 남자 하나가 유리문 앞에 미동도 없이 서 있었다. 들어가지도 않고, 유리문에 이마를 기댄 채 가만히.
“흐흠.”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기울인 이연우는 괜히 헛기침을 하며, 남자 옆의 문을 열고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유리문이 열리며 종소리가 울렸다.
딸랑딸랑!
문가에서 스치는 몸. 이연우는 곁눈질로 남자를 살폈다. 무표정한 남자가 마네킹처럼 문에 기대 있었다. 눈은 유리문을 똑바로 노려보고 있었다.
---「2권 문 앞의 남자」중에서
좌우로 길게 뻗은 복도의 문들이 일제히 열렸다. 문고리를 잡았던 손들이 떨어지자, 그 손들을 따라 이연우의 시선은 문고리 아래의 바닥을 보았다. 머리가 바닥에서 기어 나왔다.
“끄으으, 비… 비! 불!”
꿈틀꿈틀, 인형 탈을 쓴 사람들이 콘크리트 도로 위로 올라온 지렁이처럼 젖은 바닥을 기었다. 머리를 뒤로 꺾어 물줄기를 환영하며, 온몸을 물기 가득한 바닥에 비벼대며.
방에서 기어 나오는 인간 지렁이들이 많았다. 좁은 복도가 순식간에 인형 탈들로 가득 찼다.
마치 사람을 엮어 하나의 거대한 지렁이로 만든 모양새.
몸통이 뒤엉키고 팔과 다리가 얽혀 있었다. 툭툭 튀어나온 머리들이 흔들렸다. 인형 탈 너머에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래로! 아래로! 땅 아래로!”
“위대한 분이 계신 아래로! 축축하고 어두운 아래로! 불길이 닿지 못하는 아래로!”
---「3권 벌레」중에서
최악을 가정해야 했다. 지금, 가장 목숨이 위험한 경우를.
‘이게 살아 있다면? 조건이 계속 바뀐다면?’
이연우가 흔들리는 눈으로 문자를 보았다.
??하면 죽는 집.
까맣게 칠해진 문자가 꿈틀거리는 듯했다. 악의를 가지고, 살의를 품고.
피부 위로 섬뜩한 감각이 느껴졌다. 괴물의 아가리 안으로 들어온 기분.
‘조건이 중요한 게 아니야.’
죽는 집. 사람을 죽이는 집. 대실패의 결과물. 주사위가 만든 최악의 적.
얼음물을 뒤집어쓴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연우는 오직 무언가를 죽이기 위해 존재하는 이상 개체의 안에 있었다. 부활의 가능성조차 없이 그를 죽일 수 있는 것 안에.
‘진짜 망했다.’
이것이 이연우를 죽이고, 부활하면 죽는 집으로 조건을 바꾼다면.
그 어떤 때보다 강렬한 생명의 위험.
---「3권 조각」중에서
횃불 아래, 붉게 물든 마을 사람의 얼굴이 희망과 열망으로 달아올라 있었다.
마을 사람은 횃불을 휙휙 휘둘렀다.
“그분께서 약속하셨어!”
“뭘, 뭘 말입니까?”
사내가 묻자, 마을 사람이 웃었다.
“우리를 이 수라도에서, 무간지옥에서 빼내주겠다고! 우리가 짊어진 굴레를 벗게 해주겠다고! 그 첫걸음으로 무당부터 벌하겠다고!”
지우개로 보여준 희망찬 미래. 더 이상 죽음을 바치지 않아도 되는 삶.
그와 동시에 “와아아아”하는 외침이 파도가 되어 몰려왔다. 흔들리는 횃불의 무리가 우르르 이쪽으로 다가왔다.
사내의 눈이 커졌다.
담장 위로 고개를 내민 횃불과 꼿꼿하게 솟아 위태롭게 흔들리는 깃대.
하얀 천과 붉은 천이 휘날리는 무당집의 깃대 끝에 무당이 걸려 있었다. 머리가 지워진 상태로, 사지를 꿈틀거리면서.
---「3권 도시」중에서
이연우가 주사위를 부르려는 순간.
목소리가 들렸다. 김포도의 지친 목소리가.
“도망칠 생각은 마시죠. 당신 몸에 씨앗을 심었거든요. 어디든 이동하는 순간 씨앗이 당신을 비료 삼아 자라날 겁니다. 당신 죽는다고요.”
깨어난 걸 들켰다. 이동도 사전에 차단됐다. 엄중하게 격리된 이상 개체에 가까운 취급이었다.
이연우는 더는 연기하지 않고 눈을 떴다. 질척하게 가라앉은 눈동자가 김포도를 보았다.
몸이 엉망인 김포도가 이연우 앞으로 다가와, 털썩 주저앉았다.
“이렇게 빨리 깨어날 줄은 몰랐는데. 몸도 평범한 인간 수준이 아니네요?”
“…”
“아, 그렇다고 저한테 뭘 굴릴 생각은 마시고요. 저한테 무슨 일 생기면 그 부비트랩 터집니다. 제가 잠들거나 설득되더라도요.”
완전히 파악당해서 약점만 찔린 느낌. 습격당했고, 몸은 묶였고, 지금껏 썼던 주사위 판정에는 상대가 대비했다.
---「4권 나무」중에서
그리고 그 일이 일어났다.
갑자기 화면이 변했다. 노트북은 건드리지도 않았는데, 다른 관측 장치의 화면으로 변했다.
예술가협회장이 걸어 나오는 그곳으로. 그녀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기 위해.
그것은 순식간에 일어났다. 반응하기도, 경계하기도 전에,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방해는 없었다. 생물과 무생물을 가리지 않고, 모든 것이 그녀의 아름다움을 찬양하기 위해 움직였으니까.
“…”
“…”
말할 수 없었다. 움직일 수 없었다. 그저 화면을 보며, 그들은 눈물을 줄줄 흘렸다.
영혼을 울리는 예술, 영혼을 사로잡는 예술을 초월해 영혼을 향한 폭력에 가까운 예술이 그곳에 있었다.
“아…”
마크 정이 울음과 환희와 사랑이 뒤섞인 신음을 토했다.
---「4권 전쟁」중에서
“하, 하하. 예, 그… 여기 꿈은 돌려드리겠습니다. 원하는 꿈 있으면 몇 개 드릴 테니까, 앞으로 서로 마주치지 않는 게…”
하지만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가게 주인은 순간 끔찍한 불길함을 느꼈다. 가게 주인이 떨며 고개를 들었다. 흔들리는 후드 너머로 이연우가 보였다.
웃고 있는 이연우가.
“자, 그럼 네 번째 판정 굴릴까요?”
“…세 번만 하겠다며!”
“마음이 변했어. 그리고 이게 더 재밌잖아.”
약속? 그걸 왜 지켜야 하나? 재미도 없는데.
그 순간 가게 주인은 자기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깨달았다. 생존, 그 꿈을 잃어버려 사람을 억제하는 선 또한 잃어버린 자.
‘이 꿈을 빨리 돌려줘야 해!’
그렇지 않으면, 가게 주인은 이연우의 기분이 풀릴 때까지 놀아날 것이었다. 어쩌면 죽을 때까지.
가게 주인은 벌떡 일어나 몸을 던졌다. 박동하는 심장 모형, 이연우의 꿈을 제일 앞으로 내세우며.
또한, 이연우가 말했다.
“네가 너의 꿈을 잃어버릴 가능성.”
---「4권 꿈」중에서
점심시간이라 그런지 사람이 많았다. 이연우는 괜히 자동차나 하늘을 주의하며 걸었다.
그리고 여자를 보았다. 평범하게 생겼나? 하지만 이연우는 시선을 떼지 못했다.
칙, 칙.
길을 걸으며 향수를 뿌린 여자. 바람이 불어오며 향이 이연우에게 다가왔다. 향은 이연우가 들이마시는 숨을 타고 그의 폐 깊이 파고들었고, 즉각 효과를 발휘했다.
사랑의 묘약이었다.
‘아.’
이연우는 사랑에 빠졌다. 첫눈에 반했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손바닥에 땀이 맺혔다. 아드레날린이 쏟아졌다.
그 반응은 위기를 느꼈을 때의 그것과 같았고.
‘망했다!’
이연우는 사랑을 위기로 느꼈다. 흔들다리 효과가 반대로 적용되었다. 위험 상황에서 흥분하면, 사랑과 비슷한 신체 반응이 일어나 흥분과 사랑을 분간하지 못한다고 했던가.
---「5권 사랑」중에서
생존의 길은 고독한 법. 애초에 시험 따위의 이상 개체에 의존한 게 잘못이었다. 필요한 자원이 있으면 스스로의 힘으로 구하고, 만든다.
이연우는 신중하게 자격증을 만들었다.
‘남의 보증에 기대면 안 되지.’
오늘 겪은 것처럼 남의 마음대로 갑자기 취소될 수도 있었고, 대가를 요구받을 수도 있었고, 뭔가에 간섭당해 위험한 일을 겪을 수도 있었다.
그럴 바에는 스스로 만드는 편이 나았다.
철퍽, 이연우는 접착제가 잔뜩 묻은 증명사진을 A4 용지에 삐뚜름하게 붙였다. 그러고는 그 아래에 글을 썼다.
[인간 자격증]
- 성명: 이연우
- 내가 인간임을 내가 보증하고 증명함.
- 유효기간: 내가 죽을 때까지.
---「5권 인간」중에서
회장도 공격을 멈추고, 이연우의 판단을 기다렸다.
- 회사가 무너지면 우리들의 세상이 옵니다. 죽지 않는 6레벨끼리 싸우겠습니까? 당신은 그저 편안하게 살면 됩니다. 사람들도 변함없이 살아갈 거고요.
“…아니야.”
이연우가 고개를 들었다. 그 눈에는 주사위가 선명하게 비쳤고, 둔한 생존 본능이 은은히 감돌고 있었으나, 이연우의 생각이 가장 강렬하게 빛났다.
“내가 착각했어. 원래 세상이 살기 좋아서 돌아가고 싶다고. 그게 아니야.”
생존은 이유가 될 수 없었다. 생존 본능으로 6레벨에 오른 이상 어떤 세상에서 살든 죽지 않는다.
그가 원래 세상을 원하는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여기는 내 세상이 아니야. 나는 내 세상을, 내가 살아왔던 세상을 원해.”
---「5권 리메이크」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