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일에게는 ‘선승이자 사굴산문의 개창자라는 역사적인 측면’과 ‘대관령 및 강릉단오제와 관련된 민간의 신격화된 부분’의 이중 구조가 존재하는 것이다. 특히 시기적으로 봤을 때 역사적인 전승이 퇴색한 후에 설화적인 요소로 윤색된 것이 아니라, 역사와 설화가 상당 기간 공존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는 매우 특이한 이중 구조라고 하겠다.
--- p.16
범일은 한국 고대사에 속하는 인물로 고층에 속하는 연대상 관련 자료가 많지 않다. 자료의 부족에는 사굴산문의 종찰인 굴산사가 여말선초에 폐사되었다는 점도 한몫을 한다. 그러나 영서의 오대산이 이후 사굴산문의 영향권으로 편입되고, 지눌계 송광사 역시 사굴산문의 종찰급 사찰로 상승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범일에 대한 전승 자료가 적은 것에는 다소 의아한 측면이 존재하기도 한다. 즉 굳이 굴산사가 아니더라도 이들 사찰에 의해서 범일에 대한 전승이 유지되었을 수도 있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현존하는 자료만으로는 이런 양상은 전혀 살펴지는 것이 없다.
--- p.27
「범일전」에 기록된 범일의 탄생 신이는 크게 세 가지이다. 그것은 ① 태양을 품는 태몽, ② 13달 만의 출산, ③ 나계, 즉 나발과 정상계주와 같은 이상이다. 이에 반해 〈석증-범일〉에는 서로 연결된 두 가지만 확인된다. ① 우물가에서 태양이 배를 비추고 물을 마시자 임신됨, ② 얼음 위에 버리자 새가 덮어 주고 밤에 빛이 났다는 것이다. 양자는 동일인의 탄생 신이치고는 편차가 크다. 그러나 양자의 내용이 충돌하는 것만은 아니다. 왜냐하면 「범일전」이 태몽과 아이의 신이성에 주목하고 있다면, 〈석증-범일〉은 잉태와 버려짐이라는 논리적 층위에서 차이가 있는 영웅신화(hero myth) 구조를 띠고 있기 때문이다.
--- p.57
태양 빛이 비치고, 아이를 내다 버리니 짐승과 새가 덮어 주었다는 것은 고주몽 신화에서도 확인된다. 또 버려진 고승을 새(까치와 까마귀)가 덮어 주었다는 이야기는 고려 말 나옹의 영덕 까치소 설화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이는 새를 통한 영웅설화가 불교로 수용돼 고승의 탄생과 결합하였음을 나타내 준다.
--- p.63~64
「범일전」에는 범일이 810년 음력 1월 10일에 13개월 만에 태어났는데, “나계의 자태가 빼어났으며, 정주가 이상이었다.”라고 적시되어 있다. 또 889년(80세) 음력 5월 1일에 “우협에 누족하고 굴산사 상방에서 시적”한 것으로 나타난다. 탄생 때의 이상은 선천적인 것이며, 입적 시의 자세는 붓다를 의식한 의도적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논리적 층위가 다르기는 하지만, 시종을 붓다에 맞추려는 붓다화가 존재함을 인지해 보는 것이 어렵지 않다.
--- p.82
범일의 출가 사찰 및 종파와 관련해서 가장 유력시되는 것은 명주 지역에 있는 낙산사의 화엄종(당시는 화엄업)이다. 이와 같은 추론이 가능한 것은 「낙산이대성 관음·정취·조신」에서 범일이 의상의 제자라는 이야기가 일연 당시까지도 전해지고 있었다는 점 때문이다. 이는 범일이 의상의 제자라기보다는 의상계 화엄종의 제자였을 개연성을 추론할 수 있게 한다.
--- p.102
명주 출신의 범일이 경주에 가서 구족계를 받았다는 것은 범일이 명주불교보다 한 단계 위인 경주불교를 동경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명주와 경주의 거리를 고려하고, 또 당시에는 명주권 안의 계단에서도 구족계를 받는 것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즉 범일은 경주불교를 동경해서 수도로 가 구족계를 받는 것이다. 이는 범일이 829년 구족계를 수계한 이후에도 경주에 남아 835년까지 6년간(829~835) 수학하는 것을 통해서 분명해진다.
--- p.108
제안이 범일의 됨됨이를 높이 보아 아사리라고 칭한 판단은 매우 적절했다. 범일은 제안의 두 번째 물음에 해와 달에는 동서의 장애가 있을 수 없다고 답변한다. 이는 와도 온 것이 아니고 가도 간 것이 아닌 본체에 입각한 본질론적인 대답이다. 즉 현상의 속제에서는 가고 옴이 있으나 본질의 진제에서는 여여부동할 뿐이며, 이를 남종선의 자성이나 불성으로 환원시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 p.143
제안이 범일을 제접할 때 자기 말이 아닌 마조의 말을 사용하고 있는 것은 범일이 제안의 사법제자인 동시에 범일에게 마조의 사상이 온전히 이식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범일은 제안의 제자인 동시에 마조의 온당한 계승자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 p.146~147
삽화 우측에는 사슴 두 마리가 입에 무언가를 물고 와서 주는 것 같은 모습이 표현되어 있다. 우측 사슴은 식물을 물고 있지만, 좌측 사슴이 물고 있는 것은 판단이 쉽지 않다. 그런데 「범일전」을 보면, 범일이 844년 제리(수도)에서 회창법난을 만나 고산에 은거해 극심한 고초를 겪은 내용이 있다. 그런데 여기에는 굶주려 탈진한 범일에게 “산짐승이 입에 떡과 음식을 물고 와서는 (범일의) 자리 옆에 두었다.”라는 내용이 있다.
--- p.149
약산은 범일을 긍정하고 칭탄하며, ‘신라의 청풍이 중국의 선승을 얼려 죽인다.’라는 심법의 전수를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 이는 신라의 범일이 중국의 선승보다 낫다는 극찬이다. 이 사건을 통해서 범일은 제안의 마조계를 중심으로 약산으로 대표되는 석두계마저 통합하는 모습을 확보하게 된다. 즉 약산이 석두에게 격발되어 마조에게서 깨침을 얻음으로써 ‘석두를 중심으로 하는 마조의 구조를 확립’했다면, 범일은 이와는 반대로 ‘마조계를 중심으로 석두계가 보조가 되는 통합을 완성’하고 있는 것이다.
--- p.162
범일의 위치는 명주의 주통으로 판단되는데 이는 범일이 일정 부분 명주도독의 스승과 같은 역할도 했음을 의미한다. 이와 관련해서 가장 주목되는 유물이 1978년 관동대학교의 지표조사 때 발견된 ‘명주도독’이 새겨져 있는 비편이다.
--- p.280
낙산사의 관음전 옆에 정취전이 조성된 것은 신라 하대 관음 신앙에 큰 변화가 발생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 이는 범일의 사굴산문 영향이 낙산사에 강하게 작용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 p.322
‘오대산 금강사’ 명문 기와의 발견은 기존에 발견된 ‘오대산’ 명문 기와의 타당성을 강화하는 동시에 오대산의 영향을 더욱 구체화해 주는 것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또 이는 오대산의 굴산사에 대한 영향이 나옹 이전에도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한다. 그리고 굴산사의 위상을 고려해 봤을 때 굴산사의 영향 또한 오대산에 미쳤을 것이라는 추론은 무리한 판단일 수 없다.
--- p.367
현행 강릉단오제의 주신은 대관령 국사성황신인 범일국사이다. 이는 성황제가 조선의 성리학 이전에는 무속적인 요소가 강력했다는 점에서 불교의 민간화를 나타내 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특히 고승인 범일이 남성 국사성황신인데도 불구하고, 강릉의 정씨녀를 국사여성황신으로 등장시켜 합사(합배)하는 방식은 고승에 대한 인식이 크게 변모한 측면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즉 민간 신앙화 과정에서 불교보다도 무속적인 요소가 더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 p.401
범일의 민간 신앙 수용 시기와 관련해서 주목해야 할 점 중 하나는 대관령의 비중 차이이다. 주지하다시피 명주에는 대관령이라는 영동과 영서를 분기하는 험난한 지형이 존재한다. 신라시대에는 경주가 수도였기 때문에 영서보다는 영동의 강릉을 중심으로 명주가 움직였다. 즉 동해안 길을 따라서 이동하는 경주와 강릉의 관계가 중요한 것이다.
--- p.454
범일의 민간 신앙 수용에 따른 구조는 총 네 가지로 살펴진다. 첫째, 영웅신화적인 측면으로 이는 〈석증-범일〉을 통해서 확인된다. 여기에서는 태양 숭배와 무염수태, 그리고 탄생 후의 이적 양상이 기록되어 있다. 둘째, ‘국사’와 ‘국시’, ‘국수’ 등의 명칭에 대한 부분이다. 국사는 불교의 국사와 발음과 내용적인 부분에서 연결되는 측면도 있지만, 여기에는 전통적인 무속의 산신이나 성황신과 같은 신을 지칭하는 측면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셋째, 조선 후기에 편입되는 정씨녀에 대한 부분이다. 이는 호환과 연관된 산악 숭배의 양상을 잘 나타내 준다. 또 범일을 승려라기보다는 무속의 신으로 보는 관점이 강하다는 점에서 주목되는 측면이다. 넷째, 대관령 국사성황당의 〈무신도〉에서 확인되는 표현이다. 여기에 범일은 산악 숭배 및 무인의 측면이 강하게 부각되어 있는데, 이 역시 무속적인 강자에 대한 의지를 잘 나타내 준다.
--- p.461
그렇다면 무속적인 관점에서는 승려인 범일의 결혼도 가능할까? 민간 신앙적인 무속에는 일관된 체계성보다는 강함에 대한 의지가 더 중요하다. 특히 국사성황신은 범일이라고 하더라도 이미 민간 신앙적인 변화를 거친 무속적인 신으로서의 범일이다. 즉 불교적인 사굴산문의 범일과는 동일인인 동시에 논리적 층위를 다르게 확보하고 있다는 말이다. 이런 점에서 2차 변화 시기에 국사성황신의 결혼 구조가 발생한다고 해도 큰 문제는 없다. 왜냐하면 국사성황신이 범일이라고 하더라도 이것은 불교적인 범일이 아닌 민간 신앙에 수용된 무속적인 범일이기 때문이다.
--- p.473
강릉단오제의 주신으로서 범일은 대관령과 관련된 이승의 불교적인 측면을 계승하는 동시에 민간 신앙에 의해 오늘날과 같은 모습으로 완성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또 대관령 성황은 임진왜란 이후 민중적인 요청 구조에 의해 강력한 무장인 김유신과 관련된 혼란이 발생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대관령 성황으로서 민간 신앙에 의해 완성되는 범일이 주류였음을 인지해 볼 수 있다. 즉 강릉단오제의 주신은 불교적인 흐름과 연결된 범일로 보는 것이 타당한 판단이라고 하겠다.
--- p.497~4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