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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 파산

청춘 파산

: 제2회 《한국경제》 청년신춘문예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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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4년 03월 07일
쪽수, 무게, 크기 372쪽 | 384g | 127*188*30mm
ISBN13 9788937488962
ISBN10 89374889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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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입신고했다는 것을 실감나게 해 준 것은 투표용지였다. 난생처음 받아 본 투표용지. 지난 10년 동안 두 번의 대통령 선거에 나는 모두 참여하지 못했다. 가족 모두의 주소가 어머니가 잘 아는 지방의 한 교회로 올라가 있었기 때문이다. 친구들이 생애 첫 대통령 선거투표라고 호들갑을 떨며 투표한 2002년에 나는 혹시라도 부재자 신고를 하면 사채업자들이 나를 찾아낼까 봐 투표할 엄두를 못 냈고, 2007년에는 사채업자로부터 아무런 보호도 해 주지 못하는 국가의 국민으로서 투표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35쪽

면책을 받은 후 많은 것이 바뀌었다. 무엇보다 내 행동에 큰 변화가 있었다. 나는 등을 곧게 펴고 걸었고 안경 밑으로 주변을 둘러보지 않게 되었다. 더 이상 모자도 눌러쓰지 않아도 되었다. 미행하는 자가 없는지 살피기 위해 외출 시 주머니에 늘 소지하던 작은 손거울을 빠뜨렸을 때, 다시 집으로 뛰어 들어가지 않아도 되었다. 10년 만에 출옥한 죄수처럼 낯선 편안함을 만끽했다. 물론 면책을 받은 후 한 달이 지나서의 일이었다. 35~36쪽

한 달에 30만 원 이상 용돈을 써 본 적이 없고 신용카드라고는 단 한 번도 사용해 본 적이 없는 내가 신용 불량자가 되고, 개인 파산자가 되고, 10년이 더 지나서 파산 면책 결정을 받다니. 거기다 재산 명시인지 뭔지까지. 나도 모르는 사이 풍랑에 휩쓸려 무인도에 내던져졌다가 돌아온 기분이었다.
하지만 면책을 받았으니 더 이상 아무 일 없으리라 생각했던 건 내 착각이었다. 전입신고를 한 지 한 달도 안 되어 ‘XX 자산관리대부 주식회사’와 같은 이름도 기이한 회사로부터 이상한 문서가 날아오기 시작했다. -37쪽

내 잘못이 아니니까, 내가 진 빚이 아니니까 나는 울지 않기로 했다. 50~60쪽

그날 이후 나는 단 한 번도 종원이 때문에 울지 않았다. 아무렇지도 않게 아르바이트를 하고 조금씩이나마 돈을 갚으며 끈질기게 살아남았다. -133쪽

지나고 나니 청룡열차를 탄 듯이 순식간이지만 당시에는 하품을 수도 없이 하고 하릴없이 낙서도 많이 했다. 가장 시간이 안 가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길을 몰랐기 때문일 것이다. 누군가 길 위에 내려놓아 주긴 했지만 아무도 지도를 쥐어 주진 않았다. -175쪽

그 당시 나를 구해 줄 수 있는 건 가방 아니면 가발이었다. 나는 가방 안에 가발, 하이힐, 롱부츠, 스카프, 모자, 선글라스 등을 넣어 다니며 자유자재로 변신을 시도했다. 가발은 구겨지지 않게 지퍼백에 넣어서 가방의 가장 위쪽에 넣어 두었다. 사채업자들의 눈은 단순히 상의를 바꿔 입는 것으로는 속일 수 없었다. 그들은 화려한 스카프와 자연스러운 가발, 거미 다리처럼 길게 붙인 인조 속눈썹으로 비로소 속일 수 있는 예리한 감각의 소유자들이었다.
---pp.238~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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