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천의 천태종 개창은 그의 국내외 불교계 활동과 불교 인식, 그리고 숙종 대 정치 동향과 불교 정책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의천의 천태종 개창은 고려의 법화신앙 및 천태교학의 전통을 기반으로 이루어졌고, 특히 선종과 천태종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송나라의 불교계 동향과 관련이 있다. 의천은 국내에서 화엄교관과 천태교관의 상통성을 찾는 한편, 송나라에 가서 천태종을 비롯한 불교계의 여러 종파와 교류했다. …… 의천은 선관 중심으로 전개되는 송의 불교계 동향에 대해 교학과 관행을 겸수하는 천태종의 개창을 통해 고려 불교의 외연을 확장하는 한편, 교학이나 선관의 어느 한쪽에 편중된 불교계의 경향을 바로 잡고자 했다. 이러한 의천의 천태종 개창은 숙종 대에 왕권을 강화하여 문벌귀족을 개혁하려는 정국 동향과 이를 반영한 불교 정책으로 불교계를 재편하여 천태종을 개창했다.
--- p.37~38
대장경 조성은 몽골 침략이라는 대외적인 위기와 강화 천도에 따른 고려 사회 내부의 불만을 해결하고 지배층과 피지배층을 결속할 뿐만 아니라 최이 정권이 주도하는 대몽 항쟁과 정권 안정을 구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제시된 국가적인 이벤트였다. 불교가 고려의 국가적인 종교이므로 대장경 조성이라는 신앙적인 이벤트는 정치·사회적 갈등을 완화하는 결속의 매개로 작용했던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 고려대장경을 이른바 ‘국난 극복’을 위한 사례로 이해하거나, 불교문화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한 이해보다 세계적인 문화유산이라는 단면만을 내셔널리즘의 시각에서 과도하게 앞세우는 태도는 지양해야 한다.
--- p.51
이처럼 몽산 덕이를 비롯한 중국 임제종 승려들의 직접적인 영향력이 고려 승려들에게 미쳤던 것은 원 간섭기라는 시대적 상황에 기인했다. 고려와 원 간의 자유로운 왕래가 가능해지면서 고려 승려들은 직접 원에 들어가 당시 세계 제국이었던 원에서 새로운 사상과 문화를 경험할 수 있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 임제 간화선을 중심으로 한 다양한 원의 불교가 고려에 소개되기도 했다. 원에 들어가 새로운 학문을 배우고 들어오는 분위기는 불교뿐만 아니라 사대부들 사이에서도 유행했다. 고려의 유학자들은 원나라 수도인 대도에 들어가 성리학을 배웠고, 원에서 실시하는 과거에 급제해 원에서 관료로 지내다가 귀국하기도 했다.
--- p.60
선에 대한 이해와 실천은 사대부가 주자학을 수용하고 이해하는 데에도 사상적으로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사대부는 선의 심성론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주자학의 심성에 대한 문제를 이해했다. 또한 사대부는 주자학의 실천에서 강조하는 경을 좌선과 유사한 것으로 파악했고, 주자학이 지향하는 격물치지에서 치국평천하에 이르는 자기완성과 사회실천을 불교의 마음 수행과 자비라는 범주와 같다고 인식했다.
--- p.99
충렬왕 12년(1286)에 염승익(廉承益, ?~1302)이 후원해 제작한 아미타 내영도에는 본인이 임종할 때에 죄장(罪障)이 모두 사라지고 아미타불을 만나 극락에 왕생하고 싶다는 발원 내용이 담겨 있다. 『관무량수경』에는 온갖 악업을 무수히 지은 하근기의 사람일지라도 칭명염불을 통해 죄가 사라지고 극락왕생을 할 수 있다고 설한다. 고려시대 사람들의 인식 속에서 파지옥의 끝은 극락에 닿아 있었던 것이다.
--- p.119
불교의 사상 체계는 당대(唐代)까지 대부분 제시되었고, 송대 이후에는 선종과 정토신앙이 불교를 주도했다. 결국 불교는 이론과 실천 양면에서 더는 사상적 발전을 이루지 못했다. 선이 제 아무리 개인의 주체성을 자각하게 하고 개인의 내면세계에 강렬한 매력으로 다가가지만, 그것만으로 개인이 복잡한 사회 현실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답을 해줄 수 없다. 나아가 불교는 하나의 사회를 어떻게 운영하고, 현실 상황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에 대해 구체적인 사상 체계를 충분히 제시하지 못했다.
--- p.131
승정(僧政)은 승려를 관리처럼 임명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인사 행정을 의미한다. 불교가 처음 생겨난 인도에서 승려는 세속 밖의 존재였지만, 중국에서는 황제의 지배를 받는 백성으로 예속되었다. 그러므로 중국에서는 새로운 종교의 성직자인 승려를 우대하고 역경(譯經) 등에 참여한 승려를 포상하기 위해 그들에게 세속 관직을 하사하기도 했다. 또한 사원과 승려가 증가하면서 이들을 통제해야 할 필요성이 높아졌으므로 승려 중 모범이 될 만하거나 지배층과 밀접한 관련을 맺은 이들을 승관(僧官)으로 임명해 불교계를 통치권 안으로 포섭했다. 승관을 임명하는 방식은 우리나라에 불교가 전해지면서 함께 전승되었는데, 신라의 국통(國統) 등이 이에 해당한다. 고려가 건국된 이후에 승관의 임명과 조직이 체계화되었고, 이 과정에서 승정의 운영 방식이 정비되었다.
--- p.135
불화에서 주로 사용되는 색상은 붉은색·녹청색·군청색으로, 붉은색은 진사(辰砂), 녹청색은 공작석(孔雀石), 군청색은 남동광(藍銅鑛)과 같은 광물로 만든다. 안료 원료인 암석들은 금값에 견줄 정도로 값비싼 광물로서 대부분 수입하여 사용했다. 따라서 고려 불화 조성을 발원하고 후원했던 사람들은 고가의 귀한 재료를 구하거나 제공할 수 있는 왕실과 개경의 귀족, 혹은 지방 귀족 계층이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 p.2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