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우는 가게 옆의 좁은 골목 안쪽에 기대어 섰다. 그러고는 자신도 모르게 소리 내어 중얼거렸다.
“아, 기분 좋아.”
_ 여보세요. 듣고 계십니까?
그제야 떠드는 소리에 묻혔던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렸다.
“아, 예. 누구세요?”
_ 경찰입니다. 진영우 님 맞으시죠? 김영미 님이 어머니 맞으시고요.
단숨에 술이 깼다. 김영미. 엄마의 이름이다.
--- p.14
“우리 애는 같은 반 친구가 수업 내용 때문에 상처받을까 봐 한 말이었다고 했어요. 그렇게 다정한 아이에게 모진 말을 하다니요? 당신 같은 사람이 교생이라니 믿을 수 없어요. 당신은 선생님이 될 자격이 없다고요_”
황태현의 어머니는 괴수였다. 사람의 말이 통하지 않고 입에서 불을 뿜는 괴수. 교장이 달려 나온 후에도 괴수는 불 뿜기를 멈추지 않았다. 영우는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 서서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고민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잘못한 게 없었다. 그러나 죄송하다고 말해야만 했다. 교장이 그것을 바랐으니까.
--- p.28
“이 대학에 들어온 걸 축하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승리의 기쁨에 취해 있을 겁니다.”
그가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아직 바람이 쌀쌀한데도 목이 훤히 드러나는 옷을 입고 있었다. 추위보다 패션이 중요해서가 아니라, 자신에게 무신경한 사람 같았다.
“그런데 여러분, 이 말은 꼭 해야겠습니다. 여러분은 분명 실패할 겁니다.”
그의 눈가에 주름이 자글자글했다.
농담인가? 실패할 거란 소리를 들으러 여기까지 온 게 아닌데.
--- pp.52-53
이 학교 학생은 떠나고, 이 학교 학생이 아닌 나와 보람만 학교에 남았다.
“너는 왜 여기 오고 싶어?”
보람이 물었다. 내가 댄 이유는 뻔했다. 명문 대학교 학생증이 갖고 싶고, 이왕이면 취업 잘되는 과에 가고 싶다.
“너는?”
보람은 답이 없었다. 나는 그 침묵을 이해할 수 있었다. 학창 시절, 가장 곤란했던 질문은 꿈이 뭐냐는 것이었다. 난 하고 싶은 게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 지금도 그래도 되는 걸까? 이제 스무 살인데_ 청춘인데_
솔직히 말하면, 무섭다. 나만 청춘이 없을까 봐. 나만 이대로 늙어 버릴까 봐.
--- p.69
“쌤 집도 없고, 어머니도 편찮으시잖아요. 다른 알바 하기에는 아직 성인이 아니라 힘들고. 게다가 과외만큼 돈 많이 주는 알바도 없을 거고.”
아민은 주먹을 쥐었다가, 폈다가, 다시 한번 더 쥐었다 펴 보았다. 유정에게 제 사정을 털어놓은 적이 있었던가. 아니, 전혀. 전혀 없었다. 다만 어쩌면 알아줬으면, 하고 바랐을지도 모른다. 굳이 유정이 아니더라도 누군가가, 누구라도 자신의 힘든 상황을 알아줬으면, 열아홉이라는 나이에 지나치게 버거운 일들을 겪고 너무나 무거운 짐들을 지고 있단 사실을 알아줬으면…….
--- p.96
“아직 안 피지 않았나? 벚꽃은 4월 초쯤 피는 거 아닌가?”
“그럼 꽃이 피기 전에 비가 많이 오는 건 꽃 피는 거랑은 상관없는 거예요?”
아민은 알지 못했다. 한 번도 벚꽃 같은 것에 신경을 쓴 적이 없었으니까. 다만, 유정이 무언가를 하고 싶다고 말한 것이 처음이어서, 그리고 그곳에 아민의 자리가 마련되어 있어서, 그래서 만약 꽃이 피지 않는다면, 그건 너무 가혹하고 잔인한 일이라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이 정도는 누릴 수 있지 않은가. 쟤도, 나도.
--- p.114
나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진짜 파도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차가운 파도 대신 나를 덮친 것은 아득한, 그리움.
뭐지. 이게 뭐더라?
그리워할 게 없는데도 그 기분만큼은 명확했다.
마음과 몸을 쓸고 나가는 아련한 파도의 끝자락. 셀 수 없이 많은 모래 알갱이와 조개껍질과 발자국 들을 전부 쓸고 지나가는 섬세한 움직임.
뭐더라, 이게. 이게…… 뭐더라.
--- p.134
명령과 함께 전달받은 건, 기밀 사항이라는 것. 까마득하게 높으신 분들이 내린 명령이란 정말 잘 지켜야만 하는 거다. 하지만 지금 나는 열아홉이고, 아직 책임이라는 걸 모르는 미성년이고, 이제 막 첫사랑에 빠진 혼란스러운 수험생이다.
이 모든 걸 모으면 결론은 하나뿐이다. 대답한다. 그래서 했다.
“오늘 네 몸과 영혼에 새겨진 판결 주문을 가져오라고 했어.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 p.159
계단식 강의실은 뒤편의 창에서 햇볕이 쏟아지고 있어서 밝고 환했어. 학생들이 이삼십 명 정도 띄엄띄엄 앉아 있었지. 혹시 몰라서 자세히 살펴봤는데, 남자 친구는 아직 안 왔나 봐. 나는 출입문에서 멀리 떨어진 앞자리에 앉았어. 앞을 보니 대형 화이트보드와 그 위편의 둥그런 시계가 눈에 띄었어.
아홉 시 오십 분.
곧 남자 친구가 들어올 거라 생각하니까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어.
--- p.178
그래, 스토커는 내가 여행을 다녀오고부터 나를 쫓아다니기 시작했어. 더 나쁜 건, 내가 여행에서 돌아왔을 때 남자 친구는 이미 떠나고 없었다는 것. 집에 사정이 생겨서 급하게 군대에 가야 한댔어. 그래서 고향으로 내려갔다고, 언제 돌아올지 모른다더라고. 이것도 언니한테 들은 이야기야.
나는 기다렸어. 내가 아니면 언니한테라도, 아니, 엄마에게라도 연락해 올지 모르니까. 하지만 연락은 오지 않았어. 남자 친구도 나타나지 않았고. 꽤 긴 시간이 흘렀어. 그러다 비로소 남자 친구와의 약속을 떠올리고 그를 찾아 나선 거야.
--- p.1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