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행복한 잠에 취한 산포도 아침이 되면 잠에서 깨어나 몇 분 후면 출근해야 한다는 걸 떠올리고 가기 싫다고 생각한다. 이어서 어제 있었던 싫은 일이 바로 떠올라 더욱더 내키지 않는다. 지금까지 몇 번이나 있었던 일이다.
그래도 산포는 정기적으로 찾아오는 이런 싸움에서 아직 진정한 의미로 진 적이 없다. 늦잠 자고 지각하고 땡땡이를 치더라도 평생 출근하지 않고 사는 게 좋다고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산포는 그런 자신을 참 대단하다고 여긴다. 전에 선배에게 그렇게 말하자 다들 그러고 산다는 말을 들었는데, 그렇다면 다들 대단한 거라고 산포는 생각한다. 산포는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 모두를 칭찬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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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포의 얼굴을 공격하던 알람 시계가 울리기 5분 전.
분명 산포는 오늘 싸움에도 승리하리라. 힘겹게 거두는 승리일 수도 있겠지만 분명히 승리한다.
그런 자기 자신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승리한 산포가 받는 것은 자화자찬 축복만이 아니다.
싫은 일도 괴로운 일도 별반 문제가 안 될 만큼 소중한, 이 세상에서 보내주는 선물을 받는다.
그것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좋아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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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그녀가 선택한 것, 어쩌면 선천적으로 타고난 그녀의 개성이다. 단점이고 뭐고 아니다. 만약 그녀가 지친다면? 그때는 전력으로 응원해주겠다. 그러면 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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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포! 단체 미팅하자!”
누가 걸었는지 당연히 아니까 산포는 미리 스마트폰과 귀 사이 거리를 충분히 확보했다. 변함없이 목소리가 대단하시다. 스마트폰 음량을 낮추고 다시 귀에 댄다.
“야호. 단체 미팅? 안 할 건데요?”
“일정은 어떻게 되냐면.”
“어이어이.”
인사도 없이 폭주하는 시끄러운 친구에게 산포는 딴지를 걸었다.
지각한 역사가 한 번도 없고, 강의에서 그룹으로 작업해야 하면 늘 리더를 도맡고, 술자리에서는 완벽하게 간사 역할을 해내는 친구. 산포와 그녀가 같이 있으면 대학 친구들은 산포를 비상식적인 인간처럼 여기는데 참으로 유감이다. 따지고 보면 상식인인 척하는 쪽이 위험하거든요.
그 증거로 산포가 “어이어이어이어이어이” 하고 딴지 거는 동안에도 친구는 속사포처럼 후보 날짜와 대략적인 장소와 미팅 상대의 정보까지 발표했다. 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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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산포라 해도 그 시점에서 허둥거리며 수수께끼 같은 엽서의 정체를 고민하지 않는다. 해결 방법은 알고 있지. 수신자 주소를 보는 것이다. 스스로 생각해도 빨리 발견한 해결법에 헤헤헹 가슴을 펴며 주소를 본다. 흠흠, 맨션 이름까지는 맞았군. 집 호수는, 어라? 우리 집 번호가 맞는데? 아, 아니다, 플러스 1이다.
주소를 본다는 발상을 한 대신 자기 집 호수를 까먹었다. 이 엽서는 옆집 언니 것이다. 의도치 않게 이름을 알았다. 귀여운 이름이다.
그나저나 어쩌지, 하고 고민하다가 밖에서 다시 넣어야겠다고 곧바로 생각해냈다. 다시 헤헤헹 가슴을 펴며 입구 자동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
“베엇.”
베어? 곰?
기묘한 소리를 낸 산포. 인생살이 운이 몹시도 나쁜 산포를 아는 사람이라면 우편함에 엽서가 들어 있던 시점에서 이렇게 될 것을 예상했어도 이상하지 않으리라.
의외성이라곤 전혀 없이, 마침 입구로 들어온 사람은 옆집의 자그마한 은발 언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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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포는 머리 한구석에 세워둔, 슈퍼의 특별 할인 반찬 축제를 열려던 오늘 예정을 변경했다. 그 대신 생활감이 묻어나는 요리를 만들기로 했다. 식칼과 도마가 맞부딪치는 소리나 설거지하는 소리가 옆집에 들릴지도 모르는 걸 만들자. 그리고 내일 날이 좋으면 이불을 털자. 혹시라도 옆집 언니도 같은 타이밍에 밖으로 나오면 하기노쓰키의 답례로 요새 꽂힌 대형 에비센을 하나 나눠주자.
아무것도 전해지지 않아도 좋다. 아주 조금만 살아 있는 책임을 나눠 가지면 그만이다.
--- p.111
그런 이유로 산포는 뭐가 됐든 일단 트윗을 해보기로 마음먹었다. 이 ‘그런 이유로’란, 한마디로 산포가 최악을 결심하고 한 걸음 내디디려 한 것이다.
인생, 내딛지 않으면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는다. 만약 싫어지면 처음부터 다시 하면 된다. 아무것도 안 해도 어차피 1초 전의 나는 이미 사라졌다. 그런 거창한 생각을 품고서, 조금 의미 있는 트윗을 해도 딱히 죽는 것도 아니고 병에 걸리는 것도 아니고 배가 고픈 것도 아니고 주소가 알려지는 것도 아니라고 수없이 되뇌며 산포는 결심했다. 약았다는 말을 더는 듣고 싶지 않았다. 생각보다 뿌리 깊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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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당하면 싫은 일을 남에게 하면 안 돼. 마음속으로 세 번 되뇌는데, 형씨는 자기가 말할 차례라고 생각했는지 “그때 도쿄 타워에 실제로 올라갔어요?” 하고 물어봤다. 생각이 지나치게 많은 주제에 불필요한 소리를 지껄여 결과적으로 커뮤니케이션이 어색해지는 산포 같은 인간에게 질문으로 대화 방향을 제시해주는 사람은 감사한 존재다. 그렇지만 산포는 밉살스럽게도 플라컴 이야기를 더 하고 싶은데 도쿄 타워 쪽으로 대화가 가버렸다고 생각했다.
“아, 아니요, 실제로 처음 올라간 건 도서관에서 일하기 시작한 후예요. 일하고 바로니까 2년 전인가. 그래도 플라컴은 계속 들었어요 처음 라이브하우스에 간 것도 대학생 때 플라컴을 보러 간 거였고 CD도 라디오에서 듣고 다음 날 바로 쓰타야에 빌리러 갔었고오오오.”
버벅대며 마침표도 찍지 않고 억지로 대화 흐름을 바꾸려고 하는, 오로지 자기만 아는 산포와 어울려주지 않아도 되는데.
--- pp.166-1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