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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어라 수선화

피어라 수선화

창비소설집-01이동
공선옥 | 창비 | 1994년 11월 30일   저자/출판사 더보기/감추기
리뷰 총점7.4 리뷰 5건 | 판매지수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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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1994년 11월 30일
쪽수, 무게, 크기 336쪽 | 148*210*30mm
ISBN13 9788936436315
ISBN10 8936436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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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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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자는 새삼스럽게 아랫배를 슬며시 눌러본다. 바로 그것인가. 뜬금없이 들어차서 얼마간 혜자를 놀래켜주기도 하고 슬픔에 빠지게도 했던 생명. 이제부터는 제가 있어줄테니 절대로 쓸쓸해하거나 눈물짓지 말라고 가만히 혜자 자궁 속에서 속삭여오는 또 하나의 목숨. 혜자는 뜨거운 밥냄비를 발 밑에다 놓고 냄비째로 밥을 먹기 시작했다. 어쩐지 밥을 많이 먹어야 튼튼한 애기가 나올 것만 같았다. 배가 불러오자 뱃속으로부터 이상한 느낌이 전해져왔다. 그것은 은밀하고도 미세한 움직임이다. 꿈틀거리는 생명체. 저도 오랜만에 포식했다는 표시인가. 배가 불러오자 그때서야 여독이 느껴졌고 졸음이 오기 시작했다. 혜자는 제 배를 따스하게 감싸안고 잠이 들었다. 잠속에서 꿈을 꾸었다. 뱃속의 아이가 이미 태어나 조잘대었다. 아이가 둘었다. 큰아이, 작은아이, 홍이와 홍이 동생이었다. 혜자는 두 아이를 끌어안고 더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어갔다. 꿈 속에서 혜자는 행복했다.

습기 먹은 상현달이 무거운 구름장을 재빠르게 벗어나와 혜자의 조그만 들창 안을 살짝 들여다보고는 달아났다. 달님이 들여다보는 줄도 모르고 잠든 혜자 얼굴이 어둠 속에서 달빛처럼 말갛게 떠올랐다.
--- 157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두 남녀가 비틀거리며 일어나 여인숙 골목으로 들어가는 것을 건조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가 혜자는 셔터문을 내렸다. 맞은 편 골목 전신주 밑에서 왝왝거리며 구토를 해대던 사내가 혜자를 향해 급하게 손을 들어보였다. 문을 닫지 말라는 신호다. 이미 억병으로 취한 사람한테 더 이상 물을 팔소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렇지 않더라도 초저녁부터 억지로 해오던 장사가 아니었던가. 혜자느 ㄴ일부러 셔터문을 요란하게 끌어내렸다. 셔터고리를 잠그고 홀 안으로 돌아선 잠시 후 철문의 푸른 주름이 파도처럼 출렁이며 사내의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불을 껐다. 철문 새로 희미하게 가로등 불빛이 스며들어왔다. 찬참을 시끄럽게 굴던 사내가 마지막 발악으로 문을 겆어차고 나서 오줌을 내갈기는지 철문 안으로 냄새하는 물줄기가강을 이룬다. 늘 하던 성질대로의 혜자라면 그냥 있을 수는 없다. 철문을 걷어내고 나가 파출소로 가는 한이 있다 해도 드잡이를 하든지 사내의 그것을 잡아 비틀어 내든지 둘중에 하나는 하고 말 것이다.
--- p.115
누군가가 내게 '인생'을 이야기해온다면 나는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이 진정 인생을 아느냐고. 나는 일곱살 그해 겨울, 캄캄한 변소간 속에서 우리 인생에서 일컬어질 수 있는 모든 것을 다아 알아버렸노라고. 사랑도 미움도 기쁨도 슬픔도 나는 그 순간에 다아 알아차려버렸노라고. 심지어 살의의 유혹도 물리치는 방법까지도.
--- p.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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