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가르침은 종교적 가르침을 담고 있는 동시에 철학의 가르침과 과학의 가르침도 지니고 있습니다. 논리적이라는 특성이 불교의 장점인 동시에 단점입니다. 반면 일신교는 맹목적인 신앙을 강조하는 까닭에 비논리적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사회에서 번창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본성은 절대적인 자유를 추구하면서도 남에게 의지해 종속되고 싶어 합니다.
타력신앙인 일신교의 가르침과 달리 불교의 가르침은 자력신앙인 까닭에 자율성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각기 다른 종지 종풍을 지닌 종단들이 난립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게다가 각기 종단의 가르침도 통일돼 있지 않아서 출가자들을 대상으로 한 교육 내용은 물론이고, 신도들을 대상으로한 법문 내용도 제 각각입니다. 같은 경전의 같은 경구라고 해도 강사마다 해석을 달리 하는 것입니다.
납승도 불교를 공부하면서 가장 어려웠던 것은 교육제도가 통일돼 있지 않고 체계적이지 못하다보니, 만나는 강사마다 가르침이 달랐다는 것입니다.
어찌 보면 이러한 문제는 불교가 원체 심원한 가르침이기 때문에 비롯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팔만대장경을 살펴보면,불교의 근본 도리에 대해서도 경전마다 각기 다르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화엄경』에서는 일심一心이라고 표현하는가 하면, 『법화경』에서는 실상實相이라고 표현했고, 『금강경』에서는 반야般若 내지는 공空이라고 표현했고, 『원각경』에서는 원각圓覺이라고 표현했고, 『능엄경』에서는 신주神呪라고 표현했고, 『범망경』에서는 계율이라고 표현했고, 『아미타경』에서는 정토淨土라고 표현했고, 『부모은중경』에서는 은혜라고 표현했습니다. 이처럼 다양한 표현이 있지만 결국 이 표현들은 하나의 의미인 것입니다. 이를 일컬어 선문禪門에서는 ‘본래면목의 주인공’이라고 합니다.
납승은 불교적인 깨달음을 성취하고자 염불, 기도, 만행, 주력, 참선 등 다양한 수행을 해봤습니다. 여러 수행 끝에 납승은 불교의 진정한 가르침은 아픈 사람들의 눈물을 닦아주고, 병상에 염주를 걸어주는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대지도론』의 가르침처럼 ‘중생이 겪고 있는 고통의 뿌리를 제거하고 마침내 행복의 언덕에 오를 수 있도록 인도하는 것’이 바로 불제자의 역할일 것입니다.
『불본행집경佛本行集經』에 따르면, 부처님께서는 이러한 원력을 세우셨다고 합니다.
“나는 응당 정진하는 마음을 내어 복덕을 기르고 큰 서원을 일으켜 세간을 건지리라. 구해줄 이가 없는 중생에게 구호가 되며, 양육할 이 없는 사람들에게 귀의할 데가 되고, 집이 없는 중생에게 집이 되리라.”
안으로는 깨달음을 구하고 밖으로는 중생을 구제하는 것이 불제자의 본분사本分事임을 잘 알기에 납승은 법문 요청에 응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납승의 재적 사찰인 백련사에는 금봉 스님이 주석하고 계셔서 법회 때마다 백련사 대중은 감로법문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납승의 세납 39세에 백련사 대중의 요청이 잇따라서 부득이 백련사에서도 법문을 하였습니다. 다행히 납승의 법문에 대한 신도들의 반응이 좋았습니다. 언젠가부터 납승이 법문을 하면 법당은 물론이고 마당까지 신도들이 모여 앉기 시작했습니다.
납승은 젊었을 때는 수첩에 간단히 메모한 내용만 보고서 법문을 했습니다. 그런데 한국불교태고종 종정이신 보성 스님께서 두 차례나 “원고를 작성한 뒤 법문을 하라”고 일러주셨습니다. 하여 경오년(1990)부터 노트에 법문 원고를 쓴 뒤 그 원고를 바탕으로 법문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세월이 쏜살같이 지나서 30여 년 넘게 법문을 하다 보니 납승이 쓴 법문 노트도 15권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 법문 노트들을 본 제자들과 신도들이 후학을 위해서라도 법문집을 출간하길 권유하였습니다. 이런 권유에 납승은 처음에는 손사래를 쳤습니다. 그런데 여러 차례의 권유를 듣다 보니 빈한한 납승의 살림살이도 누군가에게는 도움이 될 수 있다는 데 생각이 미쳤습니다.
『벽암록』의 제43칙의 주제는 동산 선사의 ‘무한서無寒暑’ 화두인데 그 내용인즉슨 이렇습니다.
한 스님이 동산 스님에게 와서 물었습니다.
“추위와 더위가 닥치면 어디로 피해야 합니까?”
“그대는 왜 추위도 더위도 없는 곳으로 가지 않느냐?”
“추위와 더위가 없는 곳이 어디입니까?”
“추울 때는 그대가 추위와 혼연일체가 되고, 더울 때는 그대가 더위와 혼연일체가 되어라.”
동산 선사의 말씀에서 피할 수 없는 것이라면 직접 부딪혀야 한다는 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더위, 추위와 마찬가지로 삶과 죽음은 도망갈 수도 없고 피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더위와 추위는 생사망념生死妄念의 차별심인 반면 추위와 더위가 없는 곳은 불생불멸不生不滅의 경지를 일컫습니다. 동산 스님이 설한 ‘무한서’와 유사한 내용이 백낙천의 시구에도 있습니다.
“사람들이 더위를 피하려고 미친 듯이 뛰어 다니지만, 홀로 항恒 선사는 방에서 나오지도 않네. 선방엔들 무더위가 없으랴만, 단지 마음이 차분하면 몸도 시원한 것이다.”
후학들은 납승의 이 누추한 살림살이를 보고서 춥지도 덥지도 않은 거처를 얻길 바랍니다. 그런가 하면 일반 독자들은 납승의 졸고拙稿에서 사계四季의 변화를 읽길 바랍니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