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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자의 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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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4년 04월 15일
쪽수, 무게, 크기 264쪽 | 332g | 138*203*15mm
ISBN13 9788954450362

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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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영악한 쥐들과 매정한 종선이, 얄궂게 비아냥거리는 광섭이 아저씨를 마음속으로 저주했다. 하늘에서 불침 같은 번개가 쏟아져 그들의 꽁무니에 연방 꽂히거나 수천 개의 차돌 같은 우박이 후둑후둑 머리 위로 떨어져 나를 희롱하고 배신한 대가를 치르게 하고 싶었다.
“어머나, 눈이 오네.”
바로 그때, 내 저주에 하늘이 화답했다. 비록 불침 같은 번개나 차돌 같은 우박은 아니었지만 분명 눈을 비비고 다시 봐도 의심할 여지없는 눈이 사람들의 머리 위로 꽃잎처럼 난분분 흩날렸다. 가장 먼저 눈 소식을 알린 옥선 이모가 손바닥을 펼쳐 눈을 받으며 어린애처럼 활짝 웃었다.
“별일도 다 있구먼. 아직 음력으로 추시월인데.”
--- p.23

“가자, 하인.”
엘자도 그 뒤를 따랐다. 잠깐, 하인이라고? 그건 내 이름이었다. 하지만 엘자는 내 쪽은 돌아보는 척도 않고 컴온의 목줄을 끌어당겼다. 나를 부른 게 아니란 뜻이었다.
“너, 그 개 어디서 났어?”
할 땐 몰랐는데 생각할수록 우스꽝스러운 말이었다. 개가 어디서 나다니. 염라대왕이라도 찾아가 죽은 컴온에게 목줄을 채워 돌아왔을 리도 없을 텐데. 멍청한 말을 꺼낸 내 입을 원망하던 그때, 엘자가 나를 돌아보았다. 파란 눈동자와 눈이 마주치자 나는 해부용 개구리처럼 옴짝달싹하지 못하고 얼어붙었다.
“지하에서.”
나는 귀를 의심했다. 차라리 귓밥이 가득 차서 ‘기차에서’ 혹은 ‘지방에서’ 따위의 말을 잘못 알아들었기를 바랐다. 하지만 아빠의 무릎에 머리를 괴고 귓밥을 판 게 어제였고, 주전자 속에 든 생쥐들이 먹이를 조르느라 찍찍거리는 소리까지 선명했던 터라, 귀를 의심할 수 없었다. 컴온, 아니 이제는 하인이가 된 엘자의 개가 경주마처럼 위풍당당한 걸음으로 주인을 따라나섰다.
엘자의 말이 맞다면 컴온의 무덤은 지금쯤 텅 비어 있을 거였다. 목덜미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늦가을 쏟아지는 괴이한 눈바람을 뚫고 아름답고 이상한 모녀를 실은 돼지부동산 티코가 마당을 빠져나갔다.
--- p.29

엘자를 에워싸고 있던 아이들 중 낯이 익은 둘이 작지 않은 목소리로 떠들며 시시덕거렸다. 둘 중 키가 작고 눈가에 수두 자국이 눈물처럼 얽힌 아이는 엄마 오촌 당숙의 손자 순택이었다. 종선이의 질주를 따라잡던 엘자의 검은 안경알이 두 소년을 향해 움직였다. 그러곤 그린 듯 얌전하게 꼭 다물었던 입술을 바람에 나부끼는 꽃잎처럼 자그맣게 달싹였다. 엘자의 목소리가 소년들처럼 크지 않은 탓에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당최 알아들을 수 없었다. 하지만 표정이나 입술의 움직임으로 보아 욕이 아닌 것만은 확실했다. 정신이 올똘하던 시절, 할머니가 종종 외던 불경처럼 엘자의 입술은 쉬지 않고 나직한 말들을 조곤조곤 뱉어내더니 이내 굳게 닫혀버렸다.
--- p.46

“너 손이 차구나. 이리 와서 몸 좀 녹여.”
컵에 담긴 물을 남김없이 마신 할머니가 내 손을 끌어다 이불 밑에 넣었다. 메주도 없는 방인데 이불 새에서 뜬내가 났다.
“할머니, 노망 안 나면 안 될까? 나 창피해 죽겠어.”
노망난 외할머니에 부모님의 불화, 한 올 없는 알머리까지 온갖 부끄럼을 이웃에 공개한 지금, 나는 하동 썰매장으로 달려가 얼음물에 몸을 처박고 싶은 심정이었다. 외할머니가 머리를 함함하게 매만지며 들릴락 말락 한숨을 쉬었다.
“자고 일어나면 한 살씩 젊어지는 약은 없냐? 그런 약이 있으면 다음 달엔 내가 니 애비 대신 살림도 하고, 또 다음 달엔 우리 하인이 동무도 해줄 수 있고, 봄이 오면 아장아장 걷다, 여름쯤엔 싹도 없이 사라져버릴 텐데.”
--- p.75

택시가 출발하자 스텔라 아줌마가 악어가죽 핸드백 안에서 AFKN 광고에서 보았던 초코바를 꺼내 건넸다. 나는 공손하게 두 손을 내밀어 초코바를 받아 가방에 챙겼다. 누군가 택시 안에 든 우리를 본다면 사이좋은 한식구라 짐작하지 않을까 싶었다. 초코바를 싸들고 소풍을 떠나는 까까머리 소년과 흡혈귀 소녀, 그리고 하이힐을 신은 아름다운 엄마와 세탁소에서 빌린 양복 차림의 아빠. 그건 발랄한 광고 속 한 장면이라기보다 괴기스러운 동화의 한 페이지 같았다. 만약 택시가 학교로 가지 않고 바다와 산과 강을 건너 트란실바니아에 우리를 내려놓는다면, 얼뜨기 같은 광섭이 아저씨와 나는 마지막 만찬으로 초코바를 씹으며 자동으로 칼이 나오는 관에 걸어 들어가 아름다운 모녀의 일용할 양식이 될 터였다.
--- p.170

“양초 줄래?”
엘자가 별을 그리고 주변에 양초 여섯 자루를 세웠다. 라이터로 심지에 불을 붙이자 방 안이 환해지며 시야가 틔었다.
“이 안으로 들어와.”
엘자가 삼각형이 겹쳐 만든 정육면체 안에서 무릎을 꿇고 나를 불렀다. 그 애가 시키는 대로 금을 밟지 않으려 애쓰며 정육면체 안에 들어가 마주 앉았다.
“이제 눈을 감고 너희 할머니 얼굴을 떠올려 봐. 가장 건강하고 행복했을 때의 얼굴 말야.”
--- p.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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