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침묵 속 그 심중 바닥을 헤아릴 때면 희열 속에 우릴 만들어냈을 그 초라한 상들이 떠올라 부끄러워진다.
내가 수태되었던 밤, 나는 거기 없었다.
당신보다 앞서 있는 날을 목도할 수는 없는 일이다.
--- p.11 「머리말」중에서
천체에 낮과 밤의 대립이 있기 전, 현저히, 그리고 완전히 감각적인 밤이 있었다. 분만의 출구에서 태양이 우리 눈에 나타나기도 전에 밤이 있었다. 우리는 이 음영 주머니에서 생겨난 것이다. 인류는 인류와 함께 이 음영 주머니도 전달했다. 바로 이 주머니에서 인류가 생산되었고, 꿈을 꾸었으며, 그림을 그렸다. 인류는 어두운 동굴 속으로 들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얼굴을 하얀 방해석 벽면 쪽으로 돌렸다. 이 벽면 위에 의도하지 않았던 상들이 솟구쳤고, 횃불 너울이 벽면에 투사되었다.
--- p.13 「머리말」중에서
만일 기원 장면이 그 열매에게는 전혀 보이지 않는 파종을 그리는 거라면, 관찰할 수 없다는 것 때문에 계속해서 새로운 상을 도발해 마음에 심어놓는다. 끝없이 장면화, 그러니까 무대화하기를 그치지 않는 것이다. 이 기원의 점(點)은 곧 심연의 점이다. 그래서 그 광경을 기어코 용출시키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더 나아가, 이 광경은 인간 누구에게나 고유하게 있는, 어린애 같은, 자동적이고 즉흥적인, 분명 기만적인 환상의 결과이기도 하다. 부모의 나체를 제기하는 것이어서, 마음에 이런 장면을 교차시킨 자신이 혐오스러워지기도 한다.
--- p.57 「5장 놀리 메 탄게레」중에서
우리 각자의 내부에 있는 자궁의 밤은 항성 간의 어둠이 하늘 저 안쪽까지 연장해놓은 것에 상응한다.
선사 때부터 임신한 여성은 세계를 망라하고 재생하는 어두운 궁륭처럼 표현되었다. 최초의 여신은 어머니이다.
낮들의 불연속에 밤의 연속이 대응한다. 눈을 감고, 밤에 자신을 맡기며, 꿈을 꾸는 자는, 유효기간 없는 세계와 합류한다. 밤으로 인해, 몽상이 진행되며, 죽은 자, 가망 없는 자, 귀환이 불가능한 자들은 우리를 향해, 우리 안으로 되돌아온다.
--- p.71 「7장 닉스와 녹스」중에서
자크 라캉은 지옥을 모든 사람이 꿈꾸는 것을 전시하는 곳이라고 생각했다. 모든 환각이 지옥을 오게 한다. 지옥을 구현할 방도를 찾는다. 욕망의 저 맨 밑바닥에는 피학 취미(마조히즘)가 있다. 관능 저 맨 밑바닥에서는 능동적이지 않으려는, 자지러지고, 흐물흐물 녹고, 완전히 소멸되고 싶은 충동이 걷잡을 수 없이 인다. 피학 취미는 욕망을 더 강화한다. 욕망으로 고통받는 자처럼 살아가는 주체를 “마조히스트”, 그러니까 피학대 음란증 환자라 부른다. 이들에게는 천국보다 욕망이다. 차분한 가라앉음보다 살아 있다는 감정이다. 무성 혹은 중성 상태의 복된 행복 속에 잠이 들고, 잠이 들자마자 어떤 자극에도 반응하지 않는 행복보다 실존의 고통을 느껴야 한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명언집』에 이렇게 썼다. 천국에 발을 들인 행복한 자들은 영벌받는 자들의 고통을 보게 될 것이다, 그래서 ‘점점 더 강렬해지는 기쁨’을 맛볼 것이다.
--- p.118 「13장 야수들」중에서
기묘한 프랑스적 장면이 존재한다. 우선 멜랑의 작품에서 발견된다. 이어 프라고나르에서 증식되고, 쿠르베에서 더욱 첨예해진다. 그런데 클로드 멜랑이 이를 고안했다고는 하지만, 계속 추구하지는 않았고 완성하지도 않았다.
멜랑의 그림을 일명 〈쥐덫〉이라 부른다. 어머니의 음문에서 막 나온 갓난아기가 네발로 기며 몸을 돌리고 자기가 나온 그 음문을 바라보고 있다. (...)
우리에게 탄생이란, “영원히 닫힌 문”이다.
--- p.185 「19장 프랑스적 장면」중에서
프리드리히는 1809년 2월, 드레스덴에서 〈해변가의 수도사〉를 완성했다. 이 그림은 1810년 10월 베를린에서 전시되었다. (...) 클라이스트는 프리드리히의 그림에 대해 이렇게 썼다. 세계 속에 이런 위상보다 더 슬픈 건 없다. 고독 한가운데에서 고독하므로. 이보다 더 힘든 건 없다. 거대한 죽음의 왕국 속에서 유일무이한 생명의 불티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요한계시록처럼 신비로 가득찬 두 개 또는 세 개의 오브제만 보인다. 에드워드 영의 『밤의 상념』이 그림으로 되살아난 듯도 하다. 그 통일성 속에 그림 테두리 외에 어떤 다른 전경도 없다. 마치 누군가 당신의 눈꺼풀을 잘라낸 것 같지 않은가.
--- p.218 「21장 세계의 기원」중에서
별들 상류에 있는 밤, 펼쳐진 공간 상류에 있는 밤, 이 절대적 밤, 아오리스트(aoriste) 같은 상상할 수도 없는 밤이 어둠과 결합한다. 이 어둠은 언어와 시간의 기원을 앞지른다.
우리는 어떤 것을 조금은 알고 있지만, 그 어떤 것은 이렇다 할 준거 사항이 일절 없다.
우리 삶 이전에, 내부의 밤 이전에, 별들의 밤 이전에, 우주 이전에, 공간을 발현시킨 일시적 폭발 이전에 있었던 것에 대해서는 그 어떤 것도 절대 알지 못할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수사학』 1402 a에 이렇게 썼다. 우리는 알려지지 않은 것에 대해 뭔가를 알고 있다. 왜냐하면 알려지지 않은 것에서 그것이 알려지지 않은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 pp.258~259 「26장 제4의 밤」중에서
사람들은 이것을 ‘검은 그림’(Las pinturas negras)이라 불렀다. 고야가 벽면을 어두운 그 림으로 덮은 것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마드리드 조금 위, 만사나레스 연안에 있던 그의 시골집 벽에 고야가 1819년 73세에 그렸던 그림이 있다. 고야는 거기에 간단히 이렇게 썼다. 에스토 에스 로 케 아이(esto es lo que hay).
프랑스어로는 Ceci est ce qu’il y a (이것이란 거기 있었던 것이다).
스페인어로 고야가 쓴 문장은 문인에게는, 프랑스어 “jadis”(옛날)를 떠올리게 한다. 고대 프랑스어로 “jadis”는 이렇게 분해된다. “ja y a dies.” 이미 하루가 거기 있었다.
--- p.263 「27장 에스토 에스 로 케 하이」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