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철이 정 귀비마마께 인사드립니다.”
정왕에게서 겨우 한 걸음 뒤에 서 있었기 때문에 정 귀비는 그가 들어올 때부터 얼핏 쳐다보긴 했지만, 마음이 복잡해 차마 자세히 살필 수가 없었다. 마침내 이렇게 마주 서서 허약한 몸과 낯선 목소리를 대하자, 별안간 가슴이 아리고 목구멍이 턱 막혀 아무 소리도 낼 수 없었다.
“어마마마, 몸이 안 좋으십니까?”
이상하게 느낀 정왕이 정 귀비의 팔을 살며시 부축하며 물었다.
정 귀비는 억지로 웃으며 정신을 가다듬었다. (중략)
“기가 허하고 안색도 창백한 것을 보니 병이 오래된 모양이군요. 평소에 어떤 약을 복용하나요?”
“보약을 먹습니다. 저는 잘 몰라 의원이 시키는 대로 하지요.”
“나도 의술을 좀 알아요. 괜찮다면 맥을 좀 짚어봐도 될까요?”
정왕 앞에서 이렇게 말하는데 매장소로서는 당연히 거절할 수가 없었다. 도리어 옆에 있던 소경염이 나섰다.
“어마마마, 소 선생에게는 훌륭한 의원이 있습니다. 굳이…….”
“그냥 보려는 거란다. 침을 놓거나 약을 처방할 것도 아닌데 뭐 어떠니?”
정 귀비가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매장소는 소매 안에서 주먹을 꽉 쥐었다. 자신의 몸 상태는 그도 잘 알았지만 정 귀비의 의술이 어느 정도인지 몰랐기 때문에 괜히 손을 내밀었다가 비밀이 드러나지 않을까 불안했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는 그에게 선택권이 없었다. 정 귀비의 그윽하고도 애처로운 눈빛은 결코 거절을 용납하지 않았다. 결국 그는 조그만 베개에 천천히 왼손을 올려놓았다.
정 귀비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차분하게 두 손가락을 내밀어 매장소의 손목을 눌렀다. 눈을 깔고, 남들이 이상하게 여길 정도로 오랫동안 맥을 짚어보던 그녀가 이윽고 스르르 손가락을 뗐다. 정왕이 어떤지 물어보려고 허리를 숙였다. 하지만 어머니의 얼굴을 보는 순간 놀라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손을 거둔 정 귀비는 그 손으로 빨간 입술을 가렸다. 말려 올라간 긴 속눈썹 아래로 구슬 같은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_--- p.199, 203~204
“예왕이 모반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 말이 나오자마자 몽지는 말할 것도 없고 소경염까지 벌떡 일어났다.
“그럴 리가…… 예왕에게 무슨 병력이 있어서 모반을 한단 말이냐?”
“저, 저도 잘은 모릅니다.”
동로는 생각을 더듬으며 대답했다.
“준낭은 어가가 금릉성을 떠나자마자 예왕이 슬그머니 천뢰에 가서 하강을 만났다고 했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계획을 세웠는진 모르지만, 확실한 것은 예왕이 벌써 경성을 수비하는 금군을 손에 넣었다는 겁니다.”
“뭐라고?”
몽지의 안색이 대번에 싹 변했다. (중략)
“동로의 말을 믿는 거요?”
매장소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동로의 말을 믿는다기보다는 위험한 일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예왕의 처지를 믿는 거지요. 그는 폐하의 눈 밖에 났고 재기하기에는 어려운 일이 너무 많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앞으로 10년 동안, 태자를 쓰러뜨렸듯 정왕 전하를 쓰러뜨릴 수 없다는 사실이지요. 하강은 쓰러졌고, 조정의 당파도 사라졌으며, 폐하의 총애 또한 잃었습니다. 궁지에 몰린 예왕이 이 쓰라린 사실을 받아들일 용기가 없다면, 폐인이 되거나 미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지요.”_--- p.217, 219
소경염의 손에 있던 찻잔이 굴러 떨어져 대리석 바닥에 쨍강 하고 부딪히며 산산조각 났다. 전각 안에 있던 세 사람이 깜짝 놀라 황급히 일어나며 잇달아 물었다.
“전하, 왜 그러십니까?”
소경염이 탁자를 짚고 천천히 일어섰다. 몸이 휘청거렸지만 몽지가 붙잡아줬다. 한순간 소경염은 귓속에서 굉음이 울리는 것 같아 아무 소리도 들을 수 없었다. 별생각 없이 넘겼던 수많은 장면이 하나둘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차례차례 심장을 내리찍었다.
“당신은 제가 선택한 주군입니다.”
“정생, 내가 구해주마.”
그 사람은 이불 끝자락을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잠겼고, 거리낌 없이 그의 칼을 뽑았다.
그 사람은 비밀 통로를 만들어 매일 그를 위해 심혈을 기울였고, 병을 앓으면서 어렴풋하게 속삭였다.
“경염, 걱정 마.”
구중궁궐에 있는 어머니가 ‘절대 소 선생을 박대하지 말라’고 몇 번이고 신신당부했는데도 자각하지 못했다. 형님과 친구가 하늘에서 지켜보고 있다고 생각했을 때, 사실 그 친구는 그의 곁에서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발판을 마련하고 있었다…….
소경염은 창백한 얼굴로 우뚝 서서 심장으로 모여든 피가 다시금 돌 때까지 기다렸다. 경직되어 부들부들 떨리던 팔다리가 감각을 되찾는 순간, 그는 일언반구도 없이 다짜고짜 전각에서 달려 나갔다. 마구간으로 달려간 그는 가장 가까이에 있는 말을 붙잡아 안장도 얹지 않고 올라탔다. 그리고 힘껏 배를 걷어차 궁궐 쪽으로 미친 듯이 내달렸다. _--- p.347~348
매장소는 그의 손아귀에서 살짝 팔을 빼내고 의자 팔걸이를 짚으며 천천히 일어났다.
“집에 할 일이 있으니 그만 물러가게 해주십시오.”
“소…….”
소경염은 입을 달싹였지만 끝내 하고 싶은 말을 입 밖으로 내지 못하고, 돌아서서 느릿느릿 힘없이 밖으로 나가는 매장소의 모습을 지켜보기만 했다.
매장소는 가능한 한 서둘렀지만, 병이 나은 지 얼마 되지 않은데다 감정까지 북받쳐 얼마 못 가 팔다리와 뺨이 뻣뻣해짐을 느꼈다. 간신히 복도 바깥 계단까지 나온 그는 후들거리는 무릎을 붙잡고 난간에 기대 쉴 수밖에 없었다. 돌아보지 않아도 소경염의 시선이 뒤를 쫓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그 때문에 이를 악물고 버텼다. 이 순간만큼은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 옛날 그들은 늘 함께 있으며, 함께 말을 타고, 함께 시합하고, 함께 가을사냥의 으뜸을 놓고 싸우고, 함께 전쟁터의 전화(戰火)를 견뎠다. 선봉이 적을 유인하여 머릿수가 수십 배인 적군에 포위 되었을 때, 서로 등을 마주하고 함께 혈로를 뚫기도 했다. 오만하고 제멋대로인 임수로서 그는, 소경염이 달려와 진흙처럼 약해빠진 그의 몸을 부축하며 연민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이렇게 물을 날이 오리라곤 상상조차 못했다.
“소수, 괜찮나?”
상상할 수도 없었고, 받아들일 수도 없었다. 그래서 그는 달아났다. 서둘러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다. 집으로 돌아가 마음을 가라앉힌 후 천천히 고민하고 천천히 결정을 내리고 싶었다. --- p.413~414
“천하는 모든 사람의 천하입니다.”
매장소가 엄하게 말했다.
“백성이 없으면 천자가 무슨 소용이며, 사직이 없으면 황제가 무슨 소용입니까? 병사들이 전장에서 피로 목욕을 하며 싸울 때 폐하께서는 멀리 황궁에 앉아 조서만 내리시면서, 조금이라도 어기는 기미가 보이면 꺼리고 의심하며 무정하게 칼을 휘두르셨습니다! 폐하께서는 높디높은 권력만 마음에 두실 뿐, 단 한 번이라도 천하를 마음에 두신 적이 있으십니까? 기왕은 오로지 나라를 위해 국정을 보살폈고, 그렇게 쌓아올린 실적으로 부지런하고 현명하다는 평을 얻었습니다. 폐하와 의견이 달라도 대놓고 이야기했지, 남몰래 수작을 부린 적은 없습니다. 그런데 그 올곧고 충직한 마음을 대드는 것으로 생각하셨군요. 독주를 마시는 기왕이 얼마나 낙담하고 얼마나 고통스러웠을지 폐하께서는 결코 알지 못하실 겁니다. 허나 지난날 부자의 정과 죽어도 폐하를 거스르지 않으려던 기왕의 마음을 생각해서라도 부디 진심으로 그의 결백을 밝혀 13년간 고통에 빠져 있던 영혼을 위로해주십시오. 그것이 그렇게 어렵고 힘든 일입니까?”
처음에는 화가 나서 하얗게 질렸던 황제도 마지막 한마디에는 심장이 난도질당하는 것처럼 아팠다. 그는 온몸에 힘이 쭉 빠진 듯 베개에 비스듬히 등을 기대고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이마에는 땀이 물처럼 흐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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