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당신은 지금 병에 걸려 있습니다.”
의사가 환자에게 이렇게 말한다면 사람들은 대부분 크게 놀라지 않을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병에 걸릴 수 있고, 의사의 적절할 처방과 환자의 치유 노력에 의해 건강을 회복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의왕(大醫王)이신 부처님의 말씀은 귀 기울여 듣지 않는다. 부처님께서는 모든 중생들에게 공통된 생사윤회의 괴로움이 있다는 것을 천명하셨고, 평생 동안 그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해탈의 방법을 일러주셨다. 하지만 어리석은 우리 범부들은 즐거운 것에 안주하고, 마뜩찮은 것은 무시하고 잊어버리려 한다. 고통스러운 현실에서 벗어나는 길을 덧없는 쾌락 속에서 찾아왔고, 지금도 이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이렇듯 감각적 쾌락을 쫓는 것은 무상한 것이어서 허탈과 근심으로 뒤섞일 수밖에 없는 큰 해악으로 변해 자기 자신에게 되돌아온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
필자 역시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질병, 사건, 사고, 가까운 친지들과의 사별 등 다양한 체험을 했다. 그동안 인간이면 누구나 겪기 마련인 근본적인 고통들, 불행한 삶의 조건과 원인들에서 벗어나 불안과 두려움에 떨지 않았던 때가 과연 얼마나 될까? 돌이켜 보면 극히 미미했다. 마음의 평화를 위협하는 일들이 얼마나 많이 눈앞에 펼쳐졌던가. 아무리 태연한 척 가장해도 이것은 어설픈 눈가림에 불과할 뿐이고 얼마 후에 또 다시 괴로움이 내습해 오지 않았던가.
필자가 변호사로 막 활동하기 시작하던 1992년경 우리나라 최초의 지역개발법인 제주도개발특별법 제정의 산파역을 맡은 적이 있다. 그 때 그리려 했던 제주의 유토피아 청사진조차도 구성원들 모두의 안전과 행복을 충족시킬 수 있는 공통분모를 담아내지 못했다. 사람들 각자의 다양한 입맛, 성향, 욕구가 서로 상충하고 있어서 어떤 형태로든 균질화가 이루어질 수 없는 숙명적·태생적 한계가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성주괴공(成住壞空)의 세상에서 인간 사회의 안전과 행복은 보장될 수 없다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뒤늦게 접하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황혼을 앞둔 필자에게 부처님의 교설은 깊은 울림으로 다가왔다. 특히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일러주신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 즉 사성제의 가르침에 마음을 송두리째 빼앗겼다. 사성제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부처님의 원음이 빠알리 어로 고스란히 보존, 전승된 초기경전(한글 번역본)을 홀로 공부하기 시작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읽으면서 점차 이해가 되고 공부가 무르익어가자, 그 가르침의 함축된 의미를 새기고 소화하며 일상생활에 적용시켜 수행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첫 번째로 시도한 것이 호흡관법, 즉 아나빠나[들숨날숨] 사띠[念] 수행이었다. 호흡관법을 하면서 여태까지 느낄 수 없었던 마음의 평화를 얻게 되었다. 아울러 가장 행복한 공부를 하고 있다는 보람과 긍지가 느껴졌다.
넘어진 자를 일으켜 세우시듯, 덮여 있는 것을 걷어내 보이시듯, 방향을 잃어버린 자에게 길을 가리켜 주시듯, 눈 있는 자 형상을 보라고 어둠 속에서 등불을 비춰 주시듯, 부처님께서 여러 가지 방편으로 설하신 법에 의지하여 머물 수 있는 힘이 생겨났다. 이제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필자 스스로 법을 보는 눈이 뜨인 것 같았다. 또한 하루에도 수십 번씩 마음을 흔들던 감각적 욕망, 악의, 혼침과 게으름, 들뜸과 회한, 회의적 의심으로부터 나 자신을 보호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야말로 형언할 수 없는 법열을 느낄 수 있었다.
우리는 바른 길을 두고도 정말 많이 헤맨다. 이리저리 에둘러서 이제라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만난 것을 일생일대 가장 큰 행운이라 생각한다. 설령 금생에 성자의 반열에 들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해탈열반의 확고한 디딤돌을 놓는 방법을 알 수 있게 되지 않았던가. 필자는 부처님께서 가르친 수많은 명상법에 눈뜨면서 뛸 듯이 기뻤다. 부처님의 말씀대로 행하면 최소한 탐욕·성냄·어리석음의 삼독심이 소멸된 해탈, 열반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생겼다.
필자는 목숨이 다할 때까지 최소한 불연(佛緣)이 세세생생 끊어지지 않도록 ‘예류도’라 부르는 첫 번째 성스러운 경지에 도달하겠다는 서원을 세웠다. 그리고 나름대로 열심히 수행하였다. 그러면서 매미가 성충이 되기 위해서 허물을 벗듯이, 범부의 허물을 벗고 성자의 경지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명상수행이 필요충분조건임을 알았다. 또한 그때그때 점검해 줄 만한 스승이 없기에 초기경전에 의지해서 수행을 할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싶어 부처님께 감사드렸다.
솔직히 필자는 초기경전에 대해 아직 혜안이 열렸다고 할 수 없는데다 흔들림 없는 수행의 뒷받침 없이 명상수행에 관한 책을 출간하는 것에 대해 두려움이 앞섰다. 하지만 불광출판사 편집진의 부추김에 힘입어 이 책을 출간할 수 있었다. 초기불교 명상에 관심을 갖는 독자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의미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와 같이 뒤늦게라도 명상수행의 길에 접어들고자 하는 사람들, 단 한 사람이라도 이 책을 통해 명상수행에 감흥을 일으켜 도 닦음의 길을 여는 나침반이 되길 기대하면서 용기를 내었다.
이 책을 만들면서 여러분의 도움을 받았다. 특히 빠알리 어로 보존된 4부 『니까야』의 한글번역 덕분에 부처님의 법음을 만날 수 있었고, 수행에 큰 힘이 되었다. 『디가니까야』, 『앙굿따라니까야』, 『청정도론』, 『아비담마 길라잡이』 등의 한글번역본을 출간하신 대림 스님, 각묵 스님께 마음 깊이 감사드리고, 또한 『맛지마니까야』, 『쌍윳따니까야』 등의 역경사업을 주도하고 있는 전재성 교수님에게도 고마운 마음을 바친다. 끝으로 이 책의 완성도를 높여주는 데 각별히 배려해 주신 인경 스님, 교정과 출판에 정성을 다해주신 불광출판사의 모든 분들께 감사드리고 부처님의 가피가 항상 함께 하시길 기원한다.
불기 2553(2009)년 9월 11일
출리산방에서
小痴 김승석 합장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