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의 온도
어제 노트북을 켜고 ‘사람’을 입력하려다 실수로 ‘삶’을 쳤다. 그러고 보니 ‘사람’에서 슬며시 받침을 바꾸면 ‘사랑’이 되고 ‘사람’에서 은밀하게 모음을 빼면 ‘삶’이 된다. 세 단어가 닮아서일까. 사랑에 얽매이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도, 사랑이 끼어들지 않는 삶도 없는 듯하다.
---「사랑이란 말은 어디에서 왔을까」중에서
안주가 떨어질 무렵, 사랑에 관한 이야기로 주제가 옮겨갔다. 잡지사에서 에디터로 일하는 친구는 사랑에 빠지는 순간 불온한 상상을 하게 된다고 힘주어 말했다. “누군가를 좋아하면 상대의 ‘낮’은 물론이고 상대의 ‘밤’도 갖은 싶은 욕망에 사로잡히는 법이지. 때론 서로의 감정을 믿고 서로의 밤을 훔치는 확신범이 되려 하지. 암, 그게 사랑일 테지.”
철학 서적을 주로 기획하고 출간하는 출판사 사장은 이런 이야기를 보탰다. “흔히 말하는 ‘썸’이란 것은, 좋아하는 감정이 있다는 ‘확신’과 ‘의심’ 사이의 투쟁이야. 확신과 의심이 밀물과 썰물처럼 교차하는 법이지. 그러다 의심의 농도가 점차 옅어져 확신만 남으면 비로소 사랑이 시작되는 게 아닐까?”
---「여전히 당신을 염려하오’ 중에서
글은 여백 위에만 남겨지는 게 아니다. 머리와 가슴에도 새겨진다. 마음 깊숙이 꽂힌 글귀는 지지 않는 꽃이다. 우린 그 꽃을 바라보며 위안을 얻는다. 때론 단출한 문장 한 줄이 상처를 보듬고 삶의 허기를 달래기도 한다.
---「긁다, 글, 그리움」중에서
이누이트(에스키모)들은 분노를 현명하게 다스린다. 아니, 놓아준다. 그들은 화가 치밀어 오르면 하던 일을 멈추고 무작정 걷는다고 한다. 언제까지? 분노의 감정이 스르륵 가라앉을 때까지.
그리고 충분히 멀리 왔다 싶으면 그 자리에 긴 막대기 하나를 꽂아두고 온다. 미움, 원망, 서러움으로 얽히고설킨, 누군가에게 화상을 입힐지도 모르는 지나치게 뜨거운 감정을 그곳에 남겨두고 돌아오는 것이다.
---「분노를 대하는 방법」중에서
한 번은 여행과 방황의 유사성에 대해 생각한 적도 있다. 둘 다 ‘떠나는 일’이란 점에서는 닮았다. 그러나 두 행위의 시작만 비슷할 뿐 마지막은 큰 차이가 있다.
여행을 의미하는 영어 단어 ‘tour’는 ‘순회하다’ ‘돌다’라는 뜻의 라틴어 ‘tornus’에서 유래했다. 흐르는 것은 흘러 흘러 제자리로 돌아오는 속성을 지닌다. 여행길에 오른 사람은 언젠가는 여행의 출발지로 되돌아온다. 돌아갈 곳이 없다면 그건 여행이 아니라 방황인지도 모른다.
---「여행의 목적」중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시선을 나눌 수 있다는 것, 참으로 소중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상대를 자세히 응시하는 행위는 우리 삶에서 꽤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래서 ‘관찰 = 관심’이라는 등식이 성립하기도 한다.
사람은 관심이 부족하면 상대를 쳐다보지 않는다. 궁금할 이유가 없으므로 시선을 돌리게 된다. 외면하는 것이다. “당신이 보고 싶지 않아요”라는 말은, “그쪽에 관심이 없어요” 혹은 “뜨겁던 마음이 어느 순간 시들해졌어요. 아니 차가워졌어요”라는 말과 동일하게 쓰이곤 한다.
그래서일까. 돌이켜보면 관심이 멈추던 순간, 상대를 향한 관찰도 멈췄던 것 같다.
---「관찰은 곧 관심」중에서
네 생각이 나서
누군가를 사랑하게 된다면 무엇 때문이 아니라 그저 그 사람 때문이길, 당신을 통해 세상을 바라볼 수 있길, 당신이 투영된 나이길, 그 어떤 이유로든 당신을 떠올릴 수 있기를 바라고 또 바라 왔다. 그리고 나는 너를 만났다. 너를 만난 이후 내 바람은 봄날의 햇살처럼 네게로 스며들었다.
화초에 꽃이 피어 네 생각이 나, 해가 참 따스해서 네 생각이 나, 빗물 고인 웅덩이에 신발이 젖어서, 낙엽이 붉게 물들어서, 그 밖의 온갖 이유로 네 생각이 나. 특별히 대단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내 주변 모든 것들이 너로 인해 의미를 부여받고 있다는 게 새삼 놀라운 오늘. 네 생각이 나서 그것으로 충분한 지금 이 순간. 너도 지금 내 생각을 했으면 좋겠다.
그토록 듣고 싶었던, 정말로 하고 싶었던 그 말 “네 생각이 나서.” 오늘 너를 만나면 내가 먼저 말을 꺼내야지. 사랑한다는 말보다 더 애틋한 그 말을 너에게 선물해야지.
---「네 생각이 나서」중에서
항상 그랬다.
오해는 빠르고, 이해는 느리고, 감정은 서툴고, 정리는 익숙한.
빠르게 온 오해는 이해보다 정리에 익숙했다.
그리고 꽤 오랜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알게 된다.
감정에 서툴다는 핑계로 이해를 미루어 두었음을.
서툴 수도 있는데 서툴다는 걸 인정하고 싶지가 않아 이따금 엇나가고 만다.
가끔은 스스로에게 조금 관대해질 필요가 있다.
나는 지금 한창때를 지나고 있으니까
---「우리는 지금 한창때를 지나고 있다」중에서
1952년생.
무뚝뚝한 가장.
애정 표현이라고는 만취한 날에나 볼 수 있다.
밥은 무겄나.
춮다 옷 따뜨타게 이버라.
초졸 학력의 아버지는 감정을 표현하는 데 무척이나 인색하다.
그런 아버지가 아주 가끔 문자 메시지를 보낸다.
삐뚤빼뚤한 글씨며,
‘이렇게 쓰는 게 맞나?’ 망설이게 되는 맞춤법까지.
서툴러서 마음에 더 와닿는 문장들.
그 어느 유려한 문장보다 더 소중한 문장들.
---「맞춤법」중에서
힘들어서. 슬퍼서. 아파서. 속상해서. 위로가 필요한 날이 있다. 누구라도 붙잡고 잠시나마 기대고 싶은 날. 그렇게 누군가 내게 손을 내미는 날이면 나는 기꺼이 나를 내어준다. 위로를 하는 건 나인데 어쩐지 내가 위로를 받는 것만 같아서. 내가 누군가를 달래어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 그런 경험을 할 수 있다는 것 모두 참 기쁘고 감사한 일이다. 위로가 가진 긍정의 힘.
---「위로의 힘」중에서
한 여자가 있다. 그녀는 아버지를 잃고도 슬픔과 눈물을 삼켰다. 그녀에게 슬픔은 숨겨야 하는 것이었고, 눈물은 참아야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눈물이 쌓이고 슬픔이 고여 가슴 안에서 고름이 되었단다. 그 후 그녀는 온몸이 아팠다. 그녀 한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다. 사람들은 잘 울지 않는다. 아니, 어른들은 잘 울지 않는다. 나약해 보이기 싫어서. 나약해지기 싫어서. 그런데 가끔 이런 생각이 든다. 몸에 열이 올라 땀이 나는 것처럼 마음에 열이 나면 눈물이 흐르는 게 아닐까? 그 눈물을 참으면 가슴에 열이 들끓어 결국 더 아픈 건지도 모르겠다고. 지금 눈물을 참고 있는 그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다. 기꺼이 울자고. 눈물을 참아야 할 만큼 가치 있는 것이 무어냐고.
---「눈물을 참은 대가」중에서
“쟤는 저 필요할 때만 연락하더라.” 어딜 가나 꼭 그런 사람이 있다. 필요할 때만 연락하는 사람, 그리고 그런 사람에게 대놓고 말은 못 하고 뒤에서 투덜거리는 사람도. 그저 안부 인사라도 먼저 연락하는 법이 없던 사람이 어느 날엔가 뜬금없이 연락을 해서는 뭔가를 부탁하거나 아니면 자기 하고 싶은 말만 쏟아 부을 때가 있다. 반갑기도 하지만 괘씸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나는 어느 쪽일까? 괘씸하기보다는 반가울 때가 더 많다. 아니, 고맙다고 해야 할까? 내 생각이 났다는 것, 나에게 도움을 청한다는 것, 내가 힘이 될 수 있다는 것, 그 모두가 고마운 일이다. 누군가에게 필요가 있는 존재라는 건 얼마나 뿌듯한 일인가! 그래, 나 꽤 괜찮은 인간인 거야.
---「필요가 있는 사람」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