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하는 것과 여행자가 되는 것은 조금 다르다. 둘 중 하나를 고르라면 나는 '여행자 되기'에 중독된 것이다. 30대 직장인 친구들은 "아직도 배낭 메고 호스텔을 전전하며 헝그리하게 여행을 하냐" 라고 말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여행자가 될 수 없고 배낭을 멨을 때에만 만날 수 있는 사람들도 만날 수 없다. 나에게는 그들을 만나는 것이 여행이다. 60살이 되어도 나는 그런 여행을 꿈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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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에서 사람을 믿지 못하는 것만큼 큰 재앙은 없다. 소매치기 같은 것도 그것에 비하면 별 거 아니다. 소매치기가 짜증나는 이유는 잃어버린 게 아까워서라기보다도 당한 후 지나가는 사람들이 다 소매치기로 보이는 탓이다. 사람을 믿지 못하게 되니 그 여행이 즐거울 리 있겠는가. 내가 아바나에서부터 재앙을 맞았던 것을 알고 하늘에서 그 친구를 내려준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다시 사람을 믿어보라고. 그래도 '사람' 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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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여기가 축복받은 땅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간단다. 노아의 방주처럼, 신이 또 세상을 뒤엎는다면 살아남는 땅은 고도가 높은 남미가 될 것이라는 것. 하긴 2040년이면 지구 온난화로 북극의 얼음이 남아나지 않을 거라는 예측을 들은 적이 있는데, 그렇다면 남미처럼 고도가 높은 곳만 남게 될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어쩌면 어려운 생활고 탓에 차라리 세상이 뒤집어지길, 신이 그렇게 해 주길 바라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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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짐작해 보니 이들의 '1시간'이라는 대답도 그냥 '얼마 안 멀어, 마음 편히 가져'라는 뜻인지도 모르겠다. 시급을 다투는 대단한 이유도 아닌데 그 동안 나는 서두르는 것이 습관처럼 배어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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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미 여기저기에는 체 게바라가 살던 집이라는 곳이 많다. 여행을 하다보니 어느 순간부터 체 게바라의 마음이 어렴풋이나마 느껴졌다. 그도 지금 나처럼 여행을 하며 이제껏 알지 못하던 세상을 보았겠지. 놀라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하고. 떠나지 않으면 절대 몰랐을 세상을 아는 것만으로도 여행은 대단한데, 여행을 통해 그는 인생을 바꾸고(정확하게 표현하자면 보장된 인생을 버리고) '영웅'이 된 것이다. 여전히 불공평한, 아니 오히려 점점 심해져만 가는 것 같은 세상의 구조를 바꾸는 데 이제는 어떤 영웅이 필요할까? 이젠 이 대륙 안에서가 아니라 이곳들을 쥐고 흔드는 이곳 밖의 강하고 힘 있는 나라들에서 나와 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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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눈을 꼭 감고 있다가 떠 보니 '짠'하고 나타난 것만 같은 이곳! 정말 비현실적이다. 문득 쿠바 산타클라라에서 예쁜 곳으로 데려가 주겠다고, 그리고 거의 다 왔으니 우선 눈을 감아 보라고 했던 아주머니가 떠오른다. 생각해 보면 남미 전체, 이번 여행 자체가 나에게 그 아주머니, 이 오아시스 같다. 아무것도 모르고 왔는데 계속 놀라운 것을 보여주고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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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발 5,672미터에 물건을 이고 지고 올라와 장사를 하는 원주민들을 보면 자연보다도 '사람'이 더 대단하다고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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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에 6주만 일해서 돈을 벌고, 나머진 그걸 가지고 다른 나라들을 여행한다? 그게 정말 가능한 일일까? 그 애랑 헤어진 후에도 한참 그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사실 내가 중남미 전에 여행했던 나라들의 물가는 우리나라와 비슷하거나 더 비싼, 잘사는 나라들이 대부분이었다. ‘여행은 돈이 많이 든다’라고 생각하는 것도 우리가 잘사는 나라들 위주로 여행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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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기 전에 보았던 사진들이 너무 강렬해서 직접 가 보았을 때 내 두 눈으로 본 우유니 소금사막은 놀라지 않은 풍경이 되어 버렸다. 게다가 나는 그곳에 도착하기 전부터 그곳에 서 있을 내 모습까지 상상하고 있었다. 하늘 위 호수 같은 그곳에 '홀로' 서 있는 모습, 처음 보았던 사진에서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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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자꾸 나가는 이유는 수십 가지도 더 댈 수 있지만 가장 단순하게 그저 내가 사는 세상이 궁금해서, 우주라는 공간에 지구라는 별, 그중에 대한민국, 그곳의 수도 서울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평생 한 곳에서만 살다 죽으면 죽을 때 '아이고~ 지구의 요만큼만 보고 죽네~' 할 것 같아서이다. 그런데 막상 떠나 보면 나는 '곳'이 아니라 '사람'을 만나러 온 것이 아닐까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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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붙박이로 살지 않고 떠나고 싶을 때 떠날 수 있다는 데 중독되어가는 것이 바로 여행. 나는 이걸 여행자 호르몬이 나온다고 표현하는데, 어느 순간부터 내가 길을 따라가는 게 아니라 길이 나를 어디론가 인도한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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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여인의 향기'에서 알파치노는 엉키는 것 자체가 탱고라고 했다. 그것은 인생과 다르?고, 그래서 탱고가 위대한 거라고. 하지만 나는 우리네 삶도 탱고와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엉키는 것 그 자체가 삶이라고, 그러니 엉키게 되더라도 그걸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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