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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혁명의 진실

러시아혁명의 진실

: 전면 개역한 빅토르 세르주의 고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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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1년 02월 22일
쪽수, 무게, 크기 624쪽 | 898g | 153*224*35mm
ISBN13 9788979660821
ISBN10 897966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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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관련자료 보이기/감추기

저자 : 빅토르 세르주 Victor Serge
벨기에 브뤼셀에서 태어나 가난과 굶주림 속에서 자랐다. 본명은 빅토르 르보비치 키발치치이고, 부모는 추방당한 러시아 지식인이었다. 청년기에는 파리에서 아나키스트 운동에 적극 참여했고, 보노 사건으로 5년 동안 수감되기도 했다. 1919년 러시아혁명에 뛰어들어 페트로그라드, 모스크바, 베를린, 빈에서 활동했고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코민테른 기관지)의 편집에도 참여했다.

좌익반대파에 가담해 스탈린 체제에 맞서다 1928년 공산당에서 쫓겨나 수감됐고, 풀려난 다음에는 혁명사와 소설을 쓰는 데 몰두했다. 1933년 다시 체포돼 중앙아시아로 추방당했다. 앙드레 지드, 로맹 롤랑 등 여러 프랑스 문인들의 항의 덕분에 유형에서 풀려난 뒤 1936년 러시아를 떠나 다시는 돌아가지 않았다. 프랑스에서 살다가 독일이 침공하자 멕시코로 옮겼고 1947년 멕시코에서 죽었다.

세르주는 이 책 말고도 『Memories of a Revolutionaru』『From Lenin to Stalin』을 썼고, 소설로는 『The Case of Comrad Tulayev』『Conquered City』『Midnight in the Century』『Birth of Our Power』『Men in Prison』『The Long Dusk』등이 있다. 이 책의 후편인 『Year Two of the Russian Revolutioin』은 스탈린 정권이 원고 전체를 압수했다.
역자 : 황동하
숙명여자대학교에서 소련 역사를 전공했고 박사 학위를 받았다. 지금은 대진대학교 인문학연구소 연구교수로 있다. 저서로 ≪필사적인 포옹: 독소불가침조약과 소련 측의 동기 분석≫(한국학술정보, 2006)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는 ≪코민테른 ─ 레닌에서 스탈린까지, 국제 공산주의 운동의 역사≫(서해문집, 2009)가 있으며, 다수의 논문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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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 10월 25일의 봉기
전선의 참호에서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로 파견된 대표단은 위협적으로 선언했다.
“이런 참을 수 없는 상황이 언제까지 이어질 것인가 병사들은 당신들이 당장 진지한 자세로 평화안을 내놓지 않으면 모두 참호를 떠나 집으로 돌아가겠다는 말을 전해 달라고 우리에게 위임했다. 당신들은 우리를 전혀 신경쓰지 않는다! 만약 당신들이 해결책을 찾아내지 못하면 우리가 알아서 무력으로 적을 쫓아낼 것이며 당신들도 적과 함께 쫓겨날 것이다!”
트로츠키의 설명에서 드러나듯이, 전선의 분위기는 이런 상태였다. …
소비에트는 달라지기 시작했다. 한때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의 요새였던 소비에트는 이제 볼셰비키화했다. 볼셰비키는 소비에트에서 새로운 다수파가 됐다. 8월 31일에는 페트로그라드에서, 9월 6일에는 모스크바에서 볼셰비키가 소비에트에 제출한 결의안이 처음으로 다수표를 얻었다. 9월 8일에는 두 도시 소비에트에서 멘셰비키-사회혁명당 집행부가 물러났다. 9월 25일 트로츠키가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의장으로 선출됐다. 노긴은 모스크바 소비에트 의장으로 선출됐다. 9월 20일 타슈켄트에서 소비에트가 권력을 잡았다. 임시정부의 군대가 이 소비에트를 진압했다. 9월 27일 레발 지역의 소비에트는 원칙적으로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 이양할 것”을 결의했다. 10월 혁명 며칠 전에 케렌스키의 ‘민주적’ 포병부대는 칼루가에서 혁명적 소비에트에 폭탄을 퍼부었다. …
소비에트가 안토노프-오프세옌코, 포드보이스키, 추드노프스키를 지도부로 한 군사혁명위원회를 신설한 10월 16일부터 두 권력, 즉 케렌스키의 임시정부와 소비에트는 새롭고 더 날카로운 충돌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군사혁명위원회는 이제 적위대의 총참모부 기능을 하면서, 모든 부대에 정규 지휘부의 명령을 무시하라고 지시했다. 말하자면, 이때부터 봉기는 은밀히 진행되고 있었던 셈이다. 두 권력은 각자 나름대로 조처를 취했고, 두 군사 당국은 각자 상대방의 명령을 고의로 취소하기에 이르렀다. …
군중은 트로츠키의 연설에 열광했다. 존 리드는 이 집회를 보고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열광의 도가니에 빠져 있는 듯했다. 저절로 찬송가라도 튀어나올 판이었다. 트로츠키는 노동자와 농민을 위해 마지막 피한방울까지 투쟁할 준비가 돼 있다는 뜻의 결의문을 낭독했다. … 결의문에 찬성하는 사람은 손을 드시오. 무수한 군중이 마치 한 사람이 그러는 것처럼 손을 들었다. 나는 남자들, 여자들, 청년들, 노동자들, 병사들, 농민들의 이글거리며 타오르는 눈빛을 보았다. 트로츠키의 연설이 이어졌다. 군중은 치켜든 손을 내릴 줄 몰랐다. 트로츠키는 말했다. ‘이 결의를 여러분의 맹세로 만드십시오. 여러분의 모든 힘을 바칠 것이며, 어떤 희생도 주저하지 않고 소비에트를 지지하십시오. 소비에트는 혁명을 이룰 것이고, 여러분에게 토지와 빵, 평화를 가져다 줄 것입니다.’ 군중은 여전히 손을 들고 있었다. 찬성하고, 맹세했다. … 페트로그라드 전역에서 같은 장면이 되풀이됐다. 모든 곳에서 마지막 준비가 끝났다. 어디에서나 사람들은 마지막 맹세를 했다. 몇 천, 몇 만, 몇 십만 명이 그랬다. 그것은 봉기였다.” …
10월 25일 아침 크론시타트에 주둔하고 있던 혁명군은 소비에트를 방어하기 위한 준비에 착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모든 공격은 공식적으로는 방어를 명분으로 실시됐다. 볼셰비키를 지지하는 연대들과 적위대는 케렌스키 정부의 각 부처가 들어서 있던 동궁을 포위하기 시작했다. 6시에 최초로 각료들에게 항복 권고가 전달됐다. 8시에는 두 번째 최후통첩이 전해졌다. 휴전 깃발을 든 볼셰비키 선동가가 궁전 경비대를 향해 연설했고, 돌격대 소속 병사들이 혁명군 쪽으로 넘어왔다. 이들을 환영하는 만세 소리가 이제는 전장이 돼 버린 광장 위로 울려 퍼졌다. 몇 분 뒤 여성대대가 항복했다. 몇 안 되는 사관생도들의 호위를 받으며 넓은 방에 불도 켜지 않은 채 모여 있던 각료들은 공포에 휩싸였으면서도 여전히 항복하지 않았다. 케렌스키는 충성스런 부대를 이끌고 금방 돌아오겠노라고 약속한 뒤 궁전을 나와 도망쳤다.

브레스트리토프스크 강화조약
군대는 무너지고, 병사들은 고향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대중은 더는 싸우려 하지 않았다. 10월 봉기는 평화의 이름으로 일어난 것이었다. 운송 체계가 거의 무너졌고, 생산은 아주 낮았고, 식량 공급은 심각한 상태였다. 기근은 그 어느 때보다 더 위험했다. …
1917년 12월과 1918년 1월 사이 … 이 시기 각 진영이 전쟁을 어떻게 바라보았는지는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다.
연합국: 미국이 전쟁에 참가할 때까지 버티기. 이를 위해선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러시아 전선에서 벌어지는 전투를 질질 끌어야 한다.
동맹국: 미국이 전쟁에 가담하기 전에 영국과 프랑스에 평화를 강요하기. 영국과 프랑스를 쳐부수는 데 모든 자원을 투입하려면 최대한 신속하게 러시아 전선에서 작전을 종결시켜야 한다.
혁명 러시아: 서로 싸우는 제국주의의 어느 쪽에도 가담하지 않기. 그리고 유럽에서 혁명적 위기가 무르익을 때까지 버티기. 당시 유럽의 위기에 관한 소식이 많이 유포되고 있었다. …
강화가 실현되면 독일군이 동부전선에서 철수할 수 있고, 이것은 독일 제국주의의 손에 놀아나는 꼴이라는 말도 있다. 그러나 이런 관점에서 보면, 혁명전쟁도 영국·프랑스 제국주의자들의 손에 놀아나는 꼴이다. [레닌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영국은 우리가 전쟁을 계속한다면 병사 1인당 매달 100루블씩 주겠다고 우리 최고사령관인 크릴렌코에게 아주 거만하게 제안했다. … 이런 상황에서 도출해야 하는 올바른 결론은, 사회주의 정부가 일국에서 승리하는 순간부터 그 정부가 문제를 보는 관점은 어느 제국주의를 지지할 것인가가 아니라 이미 시작된 사회주의 혁명을 강화·발전시킬 최상의 조건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
브레스트리토프스크의 ‘부끄러운 강화’는 유럽 노동계급의 무기력 때문에 제국주의 세력에 둘러싸여 고립된 혁명 러시아 노동계급의 불가피한 첫 후퇴였다. 또한 이는 신생 소비에트 국가와 이를 둘러싼 제국주의 환경 사이의 첫 충돌이기도 했다. 이제 러시아혁명은 외톨이가 됐다. 살아남으려면 혁명은 시간을 벌어야 했다. 시간은 결정적으로 중요했다. 당시 러시아혁명은 3개월 안에 패배할 수도 있었다. 따라서 이 3개월을 확보하는 것은 무한한 미래가 열린다는 것을 뜻했다. 유럽의 처지에서 보면 브레스트리토프스크 강화는 첫 제국주의적 강화(이후 부쿠레슈티 조약이 체결됐고, 뒤이어 베르사유 조약이 나왔다)였다. 이 강화는 패전국에 대포로 강요한 것이고, 공개적으로 영토 정복과 경제적 노예화라는 목적을 지향하고 있었다.

외세의 개입
오스트리아·독일군은 핀란드와 발트해 연안 국가, 우크라이나를 점령하고 있었다. 터키군은 형식상으로는 여전히 ‘독립국’인 캅카스 지역에 주둔하고 있었다. 영국군은 바쿠를 점령했고, 루마니아군은 베사라비아를 접수했다. 4월 6일 일본군은 블라디보스토크에 상륙했다. 혁명은 무력으로 포위됐다. 혁명은 군대가 필요했다. 그러나 군대는 완전히 무에서 창조돼야 했다. …
독일군을 ‘불러들였던’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은 곧바로 자신들이 ‘보호자’에 의해 좌지우지되고 있음을 깨달았다. 독일군은 라다가 너무 급진적이어서 입맛에 맞지 않다며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래서 곧바로 라다를 해산하고(키예프, 4월 26일) 의원들을 감금했고, 모든 출판물에 대해 사전 검열 제도를 도입했다. 그동안 ‘영농인대회’는 사령관의 호감을 사고 있던 러시아군 장성 스코로파츠키에게 최고권력자 칭호인 헤트만을 부여했다. 스코로파츠키는 우크라이나에 “평화, 법, 유익한 노동”을 확립하겠다며 개인 권력을 휘둘렀고, 의회 소집, 사적 소유권(이른바 “문화와 문명의 토대”) 재확립, 농업 개혁, 노동계급을 위한 농업 개혁과 농업 관련 입법을 발표했다. 그동안은 ‘임시 헌법’에 따라 헤트만에게 독재 권력이 부여됐다. 모든 토지는 대지주에게 환원되고 국가가 곡물을 징발할 것이라고 선포됐다. 노동자는 파업권과 결사권을 박탈당했다. 프티부르주아 민족주의자들은 농촌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
러시아에 파견된 프랑스 군사사절단의 일원이었고 나중에 헌신적이고 진지한 혁명가로 활동하게 된 전직 프랑스군 장교 피에르 파스칼은 연합국의 작전 계획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야로슬라블의 반란과 체코군의 봉기는 프랑스 사절단의 대리인과 눌렁의 대리인이 직접 공모한 것이었다. 사절단은 체코군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고, 체코군에 장교와 자금을 지원했다. … 반혁명 세력들은 모스크바를 고립시켜 기아로 몰아넣으려고 야로슬라블, 니즈니노브고로드, 탐보프, 무롬, 보로네즈를 점령할 작정이었다. 야로슬라블, 무롬, 탐보프 등지에서 봉기가 일어나는 것과 동시에 이 계획이 실행되기 시작했다. 아직도 나는 라베르뉴 장군이 모스크바 근방의 지도 위에 손가락으로 큰 원을 그리면서 ‘이것이 바로 눌렁이 바라는 바야. 그러나 우리의 계획이 성공한다면, 러시아에 무시무시한 기근이 닥칠 것이고, 그 때문에 나는 죄책감을 느끼게 될 거야’ 하고 말하던 것이 기억난다.”

기근
트로츠키는 모스크바의 대중 집회에서 연설하다가 한 묶음의 전보를 내보였다. “비크시, 니즈니노브고로드 지방: 공장은 텅 비어 있고 작업 상황도 아주 나쁨. 기근으로 노동자의 30퍼센트가 감소했음. 굶주림으로 쇠약해진 사람들은 자기 집에 누워 있음.” 세르기예프-포사다에서 온 전보: “빵을 달라. 그렇지 않으면 우린 끝?이다!” 브랸스크에서 온 5월 30일자 전보: “끔찍한 사망률, 특히 말초프 공장과 브랸스크 공장 주변의 어린이들이 엄청나게 죽어가고 있음. 전염병이 창궐함.” 모스크바 근방의 클린에서 온 전보: “주민들이 2주 동안 빵 구경도 못했음.” 파슬로프-포사다에서 온 전보: “주민들은 굶주리고 있으며, 곡식 한 톨 구할 수 없음.” 도로고부즈에서 온 전보: “기근, 전염병 … ” 그러나 트로츠키가 주장했듯이 러시아에 곡식은 있었다. 대도시에 필요한 식량 공급량은 기껏해야 한 달에 1500만 푸드뿐이었지만, 카자흐 북부 지역만 해도 1억 4천만 푸드의 곡식이 저장돼 있었다. 기근은 계급 전쟁의 결과였다. 부농은 도시에 곡물을 내주지 않았다. 곡물을 줘 봐야 손에 쥐는 것은 휴지 조각이나 다름없는 지폐였기 때문이다. 벨라루시에서 부농은 곡물을 땅에 묻고 흙더미 위에 십자가를 세워서 수색대를 속였다.

내전
전선의 상황은 나날이 악화됐다. 체코군은 7월 5일 우파에, 7일에는 베르흐네-우랄스크에, 8일에는 즐라투스트에, 10일에는 시즈란에, 22일에는 심비르스크에, 25일에는 예카테린부르크에 진입했다. 그들은 8월 6일 마침내 카잔을 점령해서, 승리의 절정에 도달했다. 그동안 야로슬라블 전선의 무롬과 리빈스크, 아르자마스에서 7월 11일 반혁명이 시도됐고, 14일에는 니즈니노브고로드에서 똑같은 시도가 있었다. 영국군은 31일 오녜가를 점령했고, 8월 2일에는 백군의 지원을 받아 아르한겔스크를 점령했다.
따라서 볼가강에서 우랄산맥으로 이어지는 중심부가 체코군에게 점령당한 꼴이 됐다. 그들은 국가의 가장 중요한 강과 유라시아의 대평원, 우랄의 광산·공업 지대, 시베리아의 도로를 차지했다. 멀리 떨어진 남부 지방에서는 두토프 장군 휘하 카자흐군이 우랄스크와 부줄루크를 점령했고, 그 결과 투르케스탄과 통신이 사실상 끊겼다. 체코군의 전략적 목표는 백해 해안에 상륙한 연합군과 결합하고,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이용해 우랄 지역에도 쉽게 손을 뻗칠 것으로 예상되는 일본군의 간섭을 지원하는 것이었다. …
백군은 48시간에 걸친 격렬한 전투 끝에 완전히 지쳤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이 지원 병력이라고는 트로츠키와 슬라빈(제5군을 지휘한 고참 장교)뿐인, 한줌도 안 되는 급조된 부대와 싸웠다는 사실을 알 턱이 없었으므로 상대방의 힘을 과대평가할 수밖에 없었다. 백군은 후퇴했다. 트로츠키는 자기 부대가 스비야시스크에 주둔 중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려고 일부러 열차에서 기관차를 분리했다. 약 1만 명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던 제5군은 카잔을 공격하려고 스비야시스크 앞과 볼가강의 건너편 강둑에 집결해 있었다. 스비야시스크를 잃었다면 제5군은 무너졌을 것이다. …
혁명전쟁위원회가 세운 계획은 이제 실행에 옮겨지고 있었다. 백해에서 흑해까지 12개 군이 성공적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각 군의 배치는 다음과 같다. 제6군은 북부 지역에서 영국군이 드비나 지역의 셴쿠르스크를 통과하는 것을 막고 있었다. 제4군은 페름과 예카테린부르크 사이에, 제2군은 페름과 카잔 사이에 주둔하고 있었다. 제5군은 카잔에 주둔했고, 투하체프스키의 제1군은 최남단에 자리 잡고 사마라를 위협하고 있었다. 제4군은 사라토프에, 보로실로프 휘하의 제10군은 차리친에 자리 잡고 있었다. 제11군과 12군은 캅카스 북부에 주둔했다. 제10군과 캅카스 북부의 두 군을 제외한 각 군은 8000명에서 1만 5000명 사이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제10군은 4만 명이나 되는 병사들과 240문의 대포, 13량의 무장열차를 보유하고 있었고, 비슷한 전력을 보유한 아타만 크라스노프의 돈 카자흐 군과 대치하고 있었다. 캅카스 북부의 두 군은 10만 명이 넘는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비슷한 병력을 보유한 백군과 여기저기서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다. 그 싸움에서는 몰살, 도시 약탈, 극악한 보복, 용감한 행동이 난무했다. …
당시 상황을 보여 주는 사례를 몇 가지만 살펴보자. 승객들로 꽉 찬 정부의 특별열차가 마지막까지 철로에 위태롭게 정차해 있었다. 체코군은 자신들이 먼저 철수하려고 열차를 모두 독차지했다. 기관차 한 량을 요청하려고 체코군 참모장을 방문한 제헌의회 위원회 대표단은 모욕만 당한 채 물러났다. 멘셰비키 소속으로 사마라 내각에 참여했던 마이스키에 따르면, 대표단이 사회혁명당 소속으로 사마라 정부 수반인 볼스키를 만나러 갔지만 그는 절망한 채 잔뜩 술에 취해 술잔을 깨면서 소리쳤다. “죽은 사마라를 위해 건배! 어디서 시체 썩는 냄새가 나지 않소” 도시는 두려움과 암울한 분위기에 휩싸여 있었다. 대표단이 볼스키를 남겨 두고 체코군 사령부에 도착하자 한 장교가 그들을 맞이하며 폭소를 터뜨렸다. “당신네 군대는 어디 있지 하하하. 말해 보시지. 어디 있냐고” 그는 “정부”라는 말을 듣고 자지러지게 웃다가 더듬더듬 말했다. “당신네 정부” 그는 종잇조각을 둘둘 말아 오만쿇게 던져 버렸다.

10월 혁명 1년 뒤
1년간에 걸친 투쟁의 교훈이 이제 결실을 맺게 됐다. 도시의 중간계급은 노동계급에 대해 오랫동안 뿌리 깊은 혐오감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 이들 사이에서 새로운 변화 과정이 감지되고 있었다. 많은 지식인들이 드디어 중립을 선언했다. 가장 용기 있고 의식이 앞서 있던 지식인들이 정권에 합류했다. 멘셰비키 사회민주당 중앙위원회는 10월에 발표한 결의안에서, “1917년 10월 혁명은 역사적 필연성을 내포하고 있으며” “국제 노동자 혁명의 한 부분”이 됐다는 사실을 명백히 인정했다. 12월에 열린 멘셰비키 당 협의회는 멘셰비키의 옛 정책을 공식적으로 번복하고, 제헌의회를 요구하는 것은 반혁명적이라고 비난했다. 이것은 ‘민주주의’ 세력의 주장에서 완전히 후퇴한 것이었다. 멘셰비키 중앙위원회는 러시아 공화국을 수호하려고 당원들을 동원할 것이라고 선언하고, 공산당에 협정 체결을 제의했다. 볼셰비키는 이에 대해 멘셰비키당이 반혁명 측으로 넘어간 자기 조직과 당원들을 공식적으로 비난하라는 한 가지 요구만을 내놓았다. 이 요구는 실현되지 않았다. 멘셰비키는 전 러시아 소비에트 집행위원회로 되돌아와 한동안 충실한 야당으로 활동하려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멘셰비키는 모스크바에서 잡지를 발행할 수 있게 됐다. 레닌은 멘셰비키에게 말했다. “우리는 당신들에게 합법적 권리를 부여할 것이오. 그러나 국가권력은 우리 힘만으로 유지할 것이오.”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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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혁명의 교훈을 생생히 전해 주는 빅토르 세르주의 고전!
혁명에 대한 편견은 대개 두 가지다. 혁명은 비민주적이라는 생각과, 혁명은 “폭력적”이라 도덕적으로 의심받아야 한다는 생각이다. 불굴의 혁명가 빅토르 세르주의 이 책은 이런 편견이 얼마나 실제와 다른지를 잘 보여 준다. 물론 혁명은 투표와 다수결로만 진행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과연 우리가 통념적으로 아는 의회민주주의만이 유일한 민주주의인가?
이 책이 보여 주듯이, 1917~18년 러시아에서 민중의 전위라고 할 조직 노동자들은 압도적으로 사회주의를 지지했고, 혁명과 반反혁명 사이에서 동요했던 다수의 농민은 사회주의를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하더라도 반동 세력의 반反민중성에 반발해서라도 결국 혁명 편에 섰다.
물론 이런 전위 주도의 혁명이 권위주의로 전락할 가능성을 내포한다는 의미에서는 위험한 부분도 있다는 점을 세르주는 충분히 지적한다. 그런데 전란 중의 나라에서 과연 전위 계급이 그 역할을 오로지 설득을 통해서, 절차적 민주주의를 지키면서 다할 수 있었겠는가? 결국 1917~18년에 러시아는 극히 폭력적인 내외 상황이 허용하는 한에서는 혁명적 민주성을 경험했다는 것이 이 책의 귀중한 결론이다.
세르주의 중요한 지적 또 하나는 내전의 폭력적 상황이 점차 혁명적 민주성을 갉아먹어 전위 정당 안에서 권위주의가 증대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이 설득력 있게 보여 주듯이 내전에 불을 지핀 것은 혁명 세력이 아닌 반동 세력이었고, 혁명 러시아에서 “포위당한 요새”의 분위기를 만든 것은 궁극적으로 유럽 혁명의 실패였다.
러시아혁명이 역사의 심판을 받는다면 이 책이야말로 가장 훌륭한 변론이 될 것이다. 자본주의의 위기가 심화하는 오늘날, 러시아혁명의 교훈들을 생생히 전해 주는 이 책은 사회변혁을 도모하려는 모든 이들에게 필수적 참고서라 할 것이다.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 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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