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분, 시간을 줬으면 해.” 여자가 불쑥 말했다.
나는 사람 목소리를 상당히 잘 기억한다고 자신하는 편이다. 그건 알지 못하는 목소리였다. “실례지만, 어디 거신 전화인가요?” 하고 나는 정중하게 물어보았다.
“당신에게 걸었지. 10분 만이라도 좋으니까 시간을 줘. 그럼 서로를 잘 알게 될 거야.” 하고 여자는 말했다. 낮고 부드럽고, 특징 없는 목소리다.
“서로를 알 수 있다?”
“서로의 기분을.” ---「1권」중에서
“나이치고는 너, 때로 아주 페시미스틱한 생각을 하는구나.”
“그 페시 어쩌고 하는 게 무슨 말이에요?”
“페시미스틱. 이 세상의 어두운 부분만을 골라서 본다는 말이야.”
페시미스틱 하고 그녀는 몇 번인가 그 말을 입안에서 중얼거렸다.
“태엽 감는 새 아저씨.” 하고 그녀가 내 얼굴을 빤히 쏘아보듯 올려다보면서 말했다. “나는 아직 열여섯 살이고, 이 세상에 대해서도 아는 게 별로 없지만, 그래도 이거 하나는 확신을 갖고 단언할 수 있어요. 만약 내가 페시미스틱이라면, 페시미스틱이 아닌 이 세상 어른은 다 바보예요.” ---「1권」중에서
지금 우리가 벌이고 있는 전쟁은, 어느 모로 보나 정상적인 전쟁이 아닙니다, 소위님. 전선이 있고, 적과 대치해서 결전을 치르는 그런 전쟁이 아니란 말입니다. (중략)중에서 난징에서도 몹쓸 짓을 참 많이 했습니다. 우리 부대도 마찬가지였어요. 수십 명을 우물에 던져 넣고, 위에서 수류탄 몇 발을 던집니다. 그 외에도 말로 다 할 수 없는 짓을 했어요. 소위님, 이 전쟁에 대의 따위는 없습니다. 이건 그저 살육이에요. 그리고 짓밟히고 죽는 것은 결국 가난한 농민들입니다. ---「1권」중에서
저는 제 몸을 느낄 수조차 없었습니다. 자신이 말라비틀어진 잔해나, 허물처럼 여겨졌습니다. 그리고 텅 빈 방이 된 제 머리 속에 또다시 혼다 하사의 예언이 되살아났습니다. 제가 중국 대륙에서 죽는 일은 없다고 했던 그 예언입니다. 그 빛이 찾아왔다가 사라진 지금, 저는 그의 예언을 확고하게 믿을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죽어야 할 장소에서, 죽어야 할 시간에 죽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거기에서 죽지 않은 게 아니라, 죽지 못한 것입니다. 아시겠는지요. 그렇게 해서 저의 은총은 상실되고 말았습니다. ---「1권」중에서
“저, 태엽 감는 새 아저씨.” 하고 그녀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생각해 봐요. 생각해 봐요. 생각해 봐요.” 그러고는 다시 우물 입구를 뚜껑으로 딱 덮었다. ---「2권」중에서
나는 구미코에 대해 과연 뭘 알고 있었을까 하고 생각했다. 나는 빈 맥주 캔을 손에 쥐고 조용히 우그러뜨려 쓰레기통에 던졌다. 내가 이해한다고 생각했던 구미코는, 그리고 몇 년 동안 내가 아내로서 안고 섹스했던 구미코는, 결국 구미코라는 인간의 아주 얄팍한 표층에 지나지 않았던 것일까. 이 세계의 대부분이 해파리의 영역에 속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렇다면 나와 구미코가 둘이 함께 지낸 육 년이라는 세월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거기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2권」중에서
어쩌면 내가 질지도 모른다. 나는 소실되고 말지도 모른다. 아무것도 이루지 못할 수도 있다. 죽을힘을 다했지만, 이미 모든 것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된 다음일지도 모른다. 나는 그저 폐허에서 시커먼 재를 허망하게 움켜쥐고 있을 뿐인데, 그것을 나만 모르고 있는지도 모른다. 내 쪽에 돈을 거는 사람은 이 부근에는 아
무도 없을지도 모른다. “상관없어.” 하고 나는 조그맣게, 그러나 단호한 목소리로 거기에 있는 누군가를 향해 말했다. “이 말만은 할 수 있어. 적어도 내게는 기다려야 할 것이 있고, 찾아야 할 것이 있어.” ---「2권」중에서
여자가 총총 걸어 사람들의 흐름 속으로 사라진 후, 나는 그녀가 밟아 끈 담배꽁초와 필터에 묻은 립스틱을 한참 바라보았다. 그 선명한 빨강에 가노 마르타의 비닐 모자가 떠올랐다.
만약 내게 어떤 강점이 있다면, 그건 이제 더는 잃을 것이 없다는 점이리라, 아마도. ---「3권」중에서
동물들은 저마다 각자의 방식으로 원숭이들에게 화답했다. 늑대는 하늘을 향해 길게 짖고, 새들은 날개를 퍼덕거리고, 어디서는 어떤 큰 동물이 위협하듯 우리에 몸을 쾅쾅 부딪쳤다. 주먹 모양 구름 덩이가 생각났다는 듯이 다가와 잠시 태양을 등 뒤에 가렸다. 그 8월의 오후에는 사람도 동물도, 모두 죽음을 생각하고 있었다. 오늘은 그들이 동물들을 죽이고, 내일은 소련 병사들이 그들을 죽인다. 필경. ---「3권」중에서
“우선 첫째, 구미코는 내 힘으로 내가 되찾을 겁니다.” 하고 나는 말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와타야 노보루의 힘을 빌릴 생각은 없어요. 도와주지 않아도 아무 상관없습니다. 내가 와타야 노보루라는 인간을 좋아하지 않는 건 맞습니다. 하지만 이건, 당신도 말했지만, 좋고 싫고의 문제가 아니죠. 그러기 이전의 문제입니다. 그러기 이전에 나는 그라는 존재 자체를 받아들일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그와는 거래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전하세요.” ---「3권」중에서
“이 사람들만 그런 게 아니라, 세상 여자들 모두가 이런 무언가를 껴안고 있을까?” 넛메그는 자신에게 몇 번이나 그런 질문을 했다. “그리고 여기 오는 여자들은 왜 모두 중년일까? 나 역시 그녀들처럼 몸 안에 그런 무언가를 안고 있을까?”
하지만 넛메그는 그 대답을 딱히 알고 싶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3권」중에서
당신은 지금 프로그램 「태엽 감는 새 연대기」에 접속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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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가 컴퓨터 전원을 키고, 「태엽 감는 새 연대기」라는 문서를 연 것이다. 지금 이 집안에는 나 외에 아무도 없다. 누군가가 외부에서 이 기계를 작동시킨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그럴 수 있는 인간은 시나몬밖에 없다.
“태엽 감는 새 연대기?” ---「3권」중에서
저는 오카다 씨에게 어떻게든 이 이야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느꼈습니다. 편지를 읽으면 아시겠지만, 저는 완벽하게 패배한 자이며, 상실된 자입니다. 그 어떤 자격도 없는 사람입니다. 예언과 저주의 힘으로 아무도 사랑하지 못하고, 또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저는 걸어 다니는 허물로서 언젠가 그저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갈 뿐입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를 오카다 씨에게 인계하게 되어 조금은 편안한 마음으로 사라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3권」중에서
“정확하게 말하면, 나는 당신을 만나러 여기 온 건 아니야. 당신을 여기에서 데려가려고 왔어.” 하고 나는 말했다.
그녀가 어둠 속에서 조그맣게 한숨을 쉬었다. “왜 그렇게 나를 되찾고 싶은데?”
“사랑하니까.” 하고 나는 말했다. “그리고 당신도 똑같이 나를 사랑하고 원하고 있어. 나는 그걸 알아.”
---「3권」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