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는 생각했다.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식을 낳지 않겠다. 그리하여 내 어머니처럼 자식을 궁금해하지도 좋아하지도 않겠다. 어머니의 깊은 사랑을 부담스러워하는 자신의 그릇됨에 죄책감을 느끼게 하는 일, 애초에 만들지 않겠다. 엄마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엄마한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 세상에 엄마보다 너를 더 걱정하는 사람이 어딨어, 너도 힘들겠지만 엄마는 너보다 더 힘들어, 그러니까 네가 엄마한테 잘해야지, 하는 서글프면서도 미치게 짜증 나는 그 말, 아무리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도록 자식 따위 절대로 낳지 않겠다고 다짐 또 다짐하는 그녀였다.
--- p. 11~13
하루의 대부분을 산송장처럼 누워 지낸다. 늦잠 자고 일어나 낮잠 자고, 낮잠 자고 일어나 늦잠 자다 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시간이 훌쩍 흘러가 버린다. 반복되는 늦잠과 낮잠 사이에 이렇게 글도 쓰고 그림도 그리는데 그마저도 누워서 가능한 일이니 딱히 침대를 벗어날 이유가 없다. 먹고 싸는 일만 어떻게 좀 해결된다면 평생을 누워서 살 수도 있을 것만 같다. 한창때에 왜 그러고 사느냐 물으신다면, 모르겠다. 세상만사 모두 귀찮다. 젊은 놈이 별소리 다 한다며 혀를 끌끌 차신다면, 외람된 말씀입니다만 젊은 놈도 사람이니 귀찮음을 느낄 수도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 p. 27
호화스러운 펜트하우스가 아니라 달동네 꼭대기 집에 살아도 서울이 내려다보이는 것은 매한가지니 뭐 대충 벌레만 없으면 좋아하는 사람이랑 그런 곳에서 지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라 여겼었는데. 가진 능력이 부족해 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많이 벌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알뜰히 살다 보면 가끔 삼겹살도 구워 먹고 철마다 새 옷 한 벌씩 사 입으며 소소한 기쁨을 누릴 수 있을 거라 믿었었는데. 사는 게 지치는 날에는 광어 한 마리에 구천구백 원인 싸구려 횟집에서 맥주에 소주 말아 마시며 “당신 말고 다른 남자랑 결혼했으면 이 고생은 안 하고 살았을 텐데” 한바탕 신세 한탄을 하고 나면 다시 살아갈 힘이 날 거라 생각했었는데. 편히 살게 해주겠다는 낯선 남자의 말 한마디에 이렇게 갈팡질팡해버리다니. 나는 정녕 사랑보다는 돈이 우선인 그렇고 그런 여자란 말인가.
--- p. 38~40
내가 잘 살기를 바라는 아빠의 마음을 모르는 바 아니다. 그러나 아빠는 아빠고 나는 나다. 아빠가 좋다고 여기는 것을 나 역시 좋아할 수는 없다. 아빠는 팍 꼬부라진 신김치가 맛있다고 하지만, 나는 아삭아삭한 겉절이가 맛있다. 아빠는 푸른 숲을 거닐러 산에 가지만, 나는 빌딩 숲을 거닐러 광화문에 간다. 아빠는 남자라면 최불암처럼 중후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나는 남자라면 조인성처럼 훤칠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만약 아빠가 원하는 대로 최불암 닮은 남자와 신김치를 먹으며 산속에서 산다면 나는 너무 슬퍼서 울어버릴지도 모른다. 내가 바라지 않는 삶을 살며 불행을 느낀다면 내가 행복하기를 바라는 아버지의 뜻을 거스르는 꼴이 되어 버리니, 그것은 필경 불효 아니겠는가.
--- p. 75
“아뇨.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그건 좀 어렵겠어요.” 요즘 내가 열심히 연습하는 말이다. 꽁하니 불만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것보다는 확실하게 말로 표현하는 게 더 나을 것 같아서이다. 여태껏 해본 적 없는 말이라서 그런지 영 입에 붙지를 않는다. 연습, 또 연습해야지. 누군가는 이 글을 읽고 ‘자기 성질 더러운 거 합리화하고 있네. 아줌마! 노처녀 히스테리 그만 부리고 빨리 시집이나 가세요!’라고 딴지를 걸지도 모르겠다. 오, 드디어 연습한 걸 써먹을 때가 왔군. “아뇨.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그건 좀 어렵겠어요.”
--- p. 94~96
전 부치러 고향에 내려간다. 지하철을 타고서 경기도 평택시로 내려간다. 가양역에서 9호선을 타고 노량진까지 가서, 노량진에서 1호선으로 갈아타고 평택역에 내린다. 노량진역 에스컬레이터, 내 앞에 선 남자와 여자가 손을 꼭 잡고 있다. 남자는 회색 코트를, 여자는 분홍색 코트를 입었다. 남자는 못생겼고, 여자는 그저 그렇다. 명절 연휴 첫날에 에스컬레이터에서 손을 잡고 있다니. 지난달에 결혼한 모양이지. 아니나다를까 여자의 손가락에서 다이아 반지가 빛나고 있다. 여자여, 너는 시댁에 가는가. 시댁에 도착하면 너희는 붙잡은 그 손을 놓게 되겠지.
--- p. 109
사람들 참 귀엽다. 안 그래도 먹고 살기 바빠 죽겠는데, 발걸음을 멈추어 이 작은 가게에 굳이 들어와, 온갖 수모를 겪어가며 피땀 흘려 번 돈으로, 사랑하는 누군가를 기쁘게 해주려 초콜릿을 사 가지고서, 총총거리며 그이를 향해 걸어가는 모습이라니. 다들 자기밖에 모르는 것처럼 이기적으로 굴 때가 태반이기는 하지만, 가슴 한편에는 남을 위할 줄 아는 깜찍한 마음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알까? 자기들이 얼마나 귀여운 인간인지를 말이다.
--- p. 191
“친구 별로 없어요. 대부분 혼자 지내요. 용건 없으면 연락 안 해요. 부모님한테 살갑게 못 굴어요. 가족이라고 모두 화목하란 법은 없죠. 누구보다도 가깝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누구에게도 주지 않는 상처를 줄 수 있는 게 가족이에요. 밥 안 해요. 청소 안 해요. 집안일에 흥미 없어요. 남자랑 싸울 일 있으면 그냥 헤어지고 말아요. 선 많이 봤어요. 좋아하지 않는 사람하고 만나는 건 시간 낭비라고 생각해요. 스물두 살 이후로 진짜 좋아서 만난 남자는 없어요. 축구 싫어요. 야구 싫어요. 요가 싫어요. 그냥 운동 자체가 싫어요. 모임 싫어요. 회식 싫어요. 드라마 싫어요. 제가 싫어하는 게 너무 많아서 대답마다 다 싫다고 하네요. 죄송해요.”
--- p. 279
이렇게 시간을 낭비해도 될까, 하는 생각이 들기는 든다. 하지만 이내 그래도 된다, 는 결론을 내리고야 만다. 밥 차려줘야 할 남편 있는 거 아니니까. 기저귀 갈아줘야 할 자식 있는 거 아니니까. 하루에 한 번씩 안부 전화 드려야 할 시부모 있는 거 아니니까. 만나 달라고 사정사정하는 남자 있는 거 아니니까. 남들이 시간을 쪼개어가며 이 모든 일을 해내는 동안 나는 아무것도 할 일이 없으니까. 남아도는 시간에 그깟 인터넷 쇼핑 좀 하면 어때. 아무리 해도 반나절도 채 지나지 않는 걸 무어.
이렇게 시간을 펑펑 쓴 다음 남는 시간에 일을 한다. 일이 많지도 않다. 일이 밀려들어 오는 것도 아니고 가끔 그렇게 들어와도 할 수 있는 만큼만 받기 때문에 나는 늘 한가하다. 일을 바쁘게 하지 않으니 돈을 많이 벌지도 못한다. 그럼 또 어때. 내 까짓 게 빤스나 기저귀를 사줘야 할 남편이나 자식이 있는 것도 아니고, 때맞춰 선물 사다 바쳐야 할 시부모가 있는 것도 아니고, 이쁜 옷 사 입고 잘 보여야 할 남자가 있는 것도 아닌데 무어.
--- p. 293~294
“진이 엄마, 우리 복숭아 사자.” 성가심이 뚝뚝 떨어지는 여자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복숭아는 무슨 복숭아야. 됐어. 비싸.” 여자는 빠른 걸음으로 나를 앞질러 걸어갔다. 여자의 오른손에는 대파가 삐져나온 장바구니가, 왼손에는 대여섯 살 정도 먹은 남자아이의 조막손이 쥐어져 있었다. “내가 복숭아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잖아!” 난데없는 고함에 뒤를 돌아보았다. 얼굴이 벌게진 남자가 과일 가게 앞에 선 채, 멀어져 가는 부인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자고, 복숭아!” 받아 주는 이 없는 남자의 외침이 여름 하늘 위로 흩어졌다. 집에 돌아와 복숭아 껍질을 벗기며 생각했다. 결혼이 다 무어야. 복숭아 하나 내 마음대로 못 먹고. 애기 엉덩이 같은 복숭아를 한입 크게 베어 물었다. 끈끈한 복숭아즙이 턱을 타고 목으로 흘러내렸다. 달다, 달아.
--- p. 297~2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