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면, 한번 과감히, 상식과 과학과 절대다수의 사상들의 이름으로 자명하다고 생각되어 왔던 것이 그어 놓은 경계선을 넘어 보자. 그렇게 되면 과연 어떤 새로운 세계가 펼쳐질 것인가? 그 새로운 세계가 실은 ‘세계의 참모습’일 수 있다는 것을 말해 줄 수 있는 어떤 방법이란 정녕 찾을 수 없을 것인가? --- p.21
마조히즘이라는 아주 작고 사사로운 현상, 그것도 지극히 비정상적인 개인이 겪는 한낱 사소한 주관적인 병리적 사태에 불과할 것 같은 이 현상 속에, 실은 저 거대한 우주 전체의 참된 본성이 무엇인지를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해 보게 만드는 물음이 숨겨져 있을 수 있다는 것, 바로 이것이 우리가 이 책을 통해 마조히즘에 관해 이야기하려 하게 된 이유이다. --- p.75
그런데 정말로 흥미로운 것이면서도 매우 중요한 것일 수도 있는 것은 이제는 실제로 있었던 역사적 사실과는 전혀 무관하다는 것이 밝혀진 바흐오펜의 이론이 자허마조흐의 ‘세 가지 여인의 이미지’라는 환상과 서로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 p.101
마조히스트가 환상을 추구하는 것은 그가 현실이 어떤지를 모르거나 환상을 현실로 착각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마조히스트는 현실을, 즉 인간은 누구나 아버지와 엄마 양편의 결합에 의해서만 태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가 잘 알고 있는 이 사실을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을 뿐이다. 그는 “이 현실의 세계가 완벽하다는 것을 믿기 거부하며, 차라리 날개를 달고서 이 세계로부터 벗어나 꿈의 세계 속으로 달아나려 한다”. --- p.121
저 초월적인 것은 우리의 경험 속에 주어지는 것들을 근거 짓는 ‘근거’이면서도 또한 자신이 근거 짓는 것들에 의해 은폐되고 있는 ‘근거 이상의 것’이며, 나아가 그것이 이러한 은폐를 뚫고 자신의 초월성을 드러낼 때, 자신이 근거 짓고 있는 이 경험적인 것들의 타당성과 이것들이 우리에게 평소에 행사하고 있는 그 효력과 지배력을 일거에 붕괴시킬 수 있는 ‘근거 와해’를 가져올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 p.160
마조히스트가 엄마에 대한 근친상간적 욕망을 품는다는 것, 그리고 이러한 근친상간의 실현을 통해 엄마에게만 의존하는 단성생식의 방법으로 새로운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려 한다는 것, 이 새로운 인간은 여자와 구분되는 남자가 아니라 그러한 자연적 구분을 넘어서는 제3의 새로운 인간이라는 것, 이러한 것들이 PSM이 마조히즘의 발생원인으로서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말해 주는 것들이다. 그리고 이것들을 바탕으로 해서 우리는 이 모든 것의 기저에 실은 자기 자신을 초감각적인 상태의 새로운 모습으로 변형시키려 하는 ‘성적 욕망의 근원적인 자기변형 운동’이 펼쳐지고 있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게 된다. --- p.190
선험적이며 초개인적인 원형, 무의식의 내용은 개체를 과거의 망령에 붙들어 매어 놓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로 하여금 현재의 상황에 능동적으로 대응하도록 하는 것이며, 그럼으로써 새로운 미래를 열어 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 p.218
생명의 자기 전개 과정이 지나쳐 온 과거의 모든 과정은 우리 인간의 현재 존재 속에 모두 그대로 보존되어 들어와 있게 된다. 즉 생명의 자기 분화를 통해 갈라져 나온 여러 갈래의 길들 중의 어느 하나의 길이 길게 전개되어 나간 위에서만 존재하고 있는 우리 인간의 존재 속에, 생명이 이러한 분화 이전부터 겪어 온 모든 과정이, 즉 우리 인간이 존재하기 이전부터 이루어져 온 생명의 모든 자기 전개 과정이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고스란히 보존되어 들어와 있게 되는 것이다. --- p.262
우리 인간에게는 그냥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넘어서는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우리가 상실해 가고 있는 우리 자신의 본연의 모습을 되찾는 길이기 때문이다. --- p.292
성을 회피하려 하는 것, 본능을 회피하려 하는 것, 그것은 생 자체를 회피하려 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생 자체인 한, 우리 자신이 생의 한 표현인 한, 이러한 회피는 불가능하다. 그것은 생을 부정하려 하는 것이며, 생 너머에 있는 초월적인 것을 위해 생이 가진 가능성 일체를 부정하려 하는 것이다. --- p.323~324
나의 존재는 그때에 비로소, ‘시바’나 ‘삭티’ 중의 어느 하나로 나를 일차적으로 규정하고 있던 성적 양극성을 넘어 이러한 성적 양극성을 하나로 통일시키는 ‘시바-삭티’의 완전성에 이른 존재로 거듭나게 된다. 나는 그때, 남자와 여자 사이의 자연적인 구분을 넘어선, 남자이면서 동시에 여자인 제3의 존재로 거듭나게 되고, 그러므로 더 이상 이성을 감각적으로 탐할 필요가 없게 되는 양성구유적인 존재로 거듭나게 되는 것이다.
--- p.3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