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에는 시작과 끝이 없고, 중간도 없다. 어느 책이든 존재 이유가 있다는 말이 맞다면, 이 책은 책이 아니다. 이 책은 일기가 아니고, 신문에 연재되는 글도 아니다. 일상의 사건에서 벗어나 있다. 그냥, 읽는 책이다. 이 책은 소설과 거리가 멀다. 그런데 말을 받아쓴 글이라는 점에서 신기하기는 하지만, 신문 사설의 글쓰기보다는 소설의 글쓰기에 가깝다.
--- 「들어가는 말」 중에서
글을 쓸 때 작용하는 본능 같은 것이 있다. 쓰게 될 것은 어둠 속에 이미 있다. 쓰기는 우리 바깥에, 시제들이 뒤섞인 상태로 있다. 쓰다와 썼다 사이, 썼다와 또 써야 한다 사이. 어떤 상태인지 알다와 모르다 사이. 완전한 의미에서 출발하기, 의미에 잠기기와 무의미까지 다가가기 사이. 세계 한가운데 놓인 검은 덩어리라는 이미지가 무모하지 않다.
--- 「검은 덩어리」 중에서
나는 사랑이 내가 생각한 그것이 아님을 알게 되는 순간에 바로 그 새로운 사랑과 함께 있고, 새로운 사랑과 함께 떠난다. 나는 버려진 사랑이 가짜였다고 말하지 않고, 그 사랑이 죽었다고 말한다.
--- 「스카프의 푸른색」 중에서
남자들은 동성애자다. 모든 남자들은 잠재적으로 동성애자다. 모르고 있을 뿐이고, 드러내 줄 사건이나 증거를 만나지 못했을 뿐이다. (……) 이성애는 위험하다. 두 욕망이 완전한 쌍방성에 이르기를 바라게 된다. 이성애 안에는 해답이 없다. 남자와 여자는 화해할 수 없다. 그래도 새로운 사랑이 올 때마다 되풀이하는 그러한 불가능한 시도가 바로 이성애의 위대함이다.
--- 「남자」 중에서
여자들은 서로 물질적인 삶에 대해서만 말한다. 정신의 영역으로는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극소수의 여자만이 아는 일이다. 아직 모르는 여자들도 많다. 오래전부터 여자들은 스스로에 대해서조차, 여자는 남자보다 열등하다고 가르치는 남자들한테 배웠다. 그렇게 뒤로 박탈당하고 억압된 상태에서, 말은 더 자유롭고 더 일반적이다.
--- 「남자」 중에서
남자를 많이 사랑해야 한다. 많이, 많이. 남자를 사랑하려면 많이 사랑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남자를 감내할 수 없다.
--- 「남자」 중에서
우리는 모든 타협을, 사람들이 다른 종류들 사이에서 흔히 시도하는 ‘조정’을 모두 거부했다. 우리는 그 사랑의 불가능성을 직시했다. 뒤로 물러서지 않았고, 도망치지 않았다. 상상할 수 없는, 멀리 있는 사랑이었다. 너무 이상해서, 웃었다. 우리는 인정하지 않았고, 주어지는 대로, 불가능하게, 정말로 그대로 살았다. 고통을 줄이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피하지 않았고, 무찌르려 하지 않았고, 떠나려 하지 않았다. 그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 「책」 중에서
나는 버렸다. 그리고 후회했다. 살다 보면 늘 버리고 나서 후회한다. 하지만 버리지 않으면, 없애지 않으면, 시간을 전부 간직하려면, 인생을 오로지 물건을 정리하고 삶의 자취를 분류해서 보관하는 일로 보내는 수밖에 없다. 여자들이 전기나 가스 요금 고지서를 이십 년 동안 보관하기도 하는 이유는 그저 시간을 기록해 두고 싶어서, 자신들이 해낸 일을, 자신들이 살아 낸, 이제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그 시간을 기록해 두고 싶어서다.
--- 「집」 중에서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당신은 이해하지 못할 거예요.” “나도 내가 왜 계속 이러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하지만 어쩔 수 없어요.” 그들은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아니지만, 그들 사이에 있는 것은 이미 사랑이다. 실용적인 혹은 편의상의 이유들로 누군가를 사랑하는 게 이미 사랑이다. 대부분의 경우 사랑한다고 고백하지는 않을 테고, 아마도 깨닫지조차 못하리라. 하지만 이미 사랑이다.
--- 「「인디아 송」의 굴뚝들」 중에서
사랑 없이 사는 일은 불가능하다. 남은 것이 말뿐이라 해도, 사랑은 늘 살아간다. 최악은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나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 「편지」 중에서
그녀 내면에 자리 잡고 있는 근원적인 모순들, 이질적인 요소들을 감싸 안는 한 가지는, 아마도 그녀가 느끼던, 아주 작은 떨림에도 존재를 흔들리게 하던 고통, 그녀가 끌어안고자 한 세상의 고통이리라. 현실의 파괴적 폭력에 맞서 뒤라스는 침묵과 광기의 글쓰기라는 자신만의 폭력을 행사한다. 장식 없이 벌거벗은 공간에서 울려 퍼지는 “목소리 없는 외침”은 그 출구 없는 비극성으로 독자를 매혹하고, 어쩌면 각자가 마음속에 품고 있을 고통을 향해, 멀리서, 아주 멀리서, 위안을 건넨다.
--- 「옮긴이의 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