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후로 나는 일에 지치거나 내 노력이 무의미하다 싶을 때 종종 라이트바우어의 말을 펼쳐 본다. 미쉐린의 별을 받은 레스토랑은 물론 훌륭하겠지만 그 도시에서 가장 중요한 장소는 아닐 것이다. 그게 무슨 상관이람. 나만의 과제가 가장 중요하다. 나 역시 점점 나아지는 레스토랑 같은 뭔가를 만들고 싶다. 그 마음으로 회사 일을 하고 종종 이런 원고를 만든다. 내게도 다른 삶은 없다. 이게 내 동기이고 내 게임이다. 내가 이 도시의 주인공은 아닐지라도. --- p.13
여전히 해외에서 주말 아침에 시간이 남으면 벼룩시장을 찾는다. 제네바 외곽의 건물 지하에서, 긴자 근처의 박람회장 앞에서, 다른 이런저런 외국의 벼룩시장에서 나는 늘 같다. 옷에 먼지를 묻혀가며 쭈그려 앉아 별것도 아닌 물건들을 구경한다. 들었다 놨다 하다 푼돈을 깎아달라며 조르고 곧 찢어질 듯 얇은 비닐봉지에 물건을 담아 온다. 그럴 때마다 제프리를 생각한다. 언젠간 나도 제프리처럼 될지도 몰라. 그것도 나쁘지 않을 거야. 지금 물건 봐두는 게 도움이 되겠지. --- p.38
바버샵의 옷은 유행을 잘 안 탄다. 실제로 이 가게에는 몇 년 된 재고가 있지만 별로 시대에 뒤떨어져 보이지 않는다. 한국에서 유행을 안 타는 건 치명적이다. 업종을 불문하고 유행이 되거나 유행을 타는 일에 골몰한다. ‘무릎에서 사서 어깨에서 파는’ 일에 모두 목숨을 건다. 무엇을 왜 팔아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내가 본 바버샵은 그런 고민을 하는 곳이다. --- p.64
나는 코코의 한국 정착이 정말 기쁘다. 서양에서 잘되는 걸 가져다가 간판만 바꿔 씌우는 판촉 행위를 혁신이라 우기는 경우가 태반이다. 코코는 그와는 좀 달라 보인다. 철저히 현장 실무자의 입장에서 만들어진 로컬 모빌리티다. 싸구려 동정도 없고 말로만 나불거리는 혁신도 없다. 프로의 고충을 줄여주는 기술적 성취가 있을 뿐이다. 코코 덕분에 야쿠르트 판매 사원님들의 관절에 가해지는 부담도 한층 줄어들었을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코코는 한국의 테크 역사에서 더 높은 평가를 받을 가치가 있다. 현장 실무자의 근로 여건을 개선하는 혁신을 언제나 응원한다. 야쿠르트 먹고 싶다. --- p.70
옷은 옷 이상이지만 동시에 그저 옷일 뿐이기도 하다. 불편한 양복은 백인 남성 문화권의 잔재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구시대적 백인 남성 문화권의 정신 상태를 가진 사람들이 양복만 안 입는 건 그것대로 곤란한 일이다. 나는 차라리 양복 아저씨들이 양복을 계속 입어줬으면 한다. 옷이 주는 불편함 때문에라도 본인의 막중한 책임을 조금이라도 더 느꼈으면 한다. 본인들이 점심 초밥 코스를 머리 한구석에 걸쳐둔 채 숫자와 서류로 내리는 결정에 말 그대로 누군가의 목이 걸려 있다는 걸 상상해줬으면 한다. 그 답답한 옷 속에서. --- p.75
마음속에 자신만의 잉어가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 잉어는 지금 맡은 일일 수도, 평생을 걸쳐 이루고 싶은 목표일 수도, 높은 수준으로 유지하고픈 능력치일 수도, 어떻게든 지키고 싶은 사랑일 수도 있다. 모든 사람이 그 잉어를 소중히 대하는 건 아니다. 잉어가 죽든 말든 신경 쓰지 않는 사람도, 하루에 서너 번 먹이를 주면 전부인 그걸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 게 무슨 상관이람. 중요한 건 자기 연못 속의 자기 잉어고 그 잉어를 소중히 대하는 자기 자신의 정신이다. 그런 걸 조금씩 깨닫게 됐다. --- p.97
20세기 물건이 21세기적으로 팔린다. 나는 시흥사거리 리복 매장에 가는 대신 스마트폰으로 무신사에 가입해 네이버페이로 대금을 지불했다. 번호 몇 개를 입력하니 메시지가 울리고 며칠 뒤에 상자 하나가 왔다. 무신사 상자 속 리복 상자 안에 인터벌이 들어 있었다. 흰색과 빨간색과 파란색. 건담의 색, 미국의 색, 리복의 색, 내게는 20세기의 색. 낡은 월세방에 혼자 앉아 그 신발을 잠시 들여다보았다. --- p.123
도시는 흔히 자연과 반대되는 무엇인가로 표현된다. 하지만 때로는 도시 곳곳의 미세한 생장과 소멸이라는 순환 자체가 자연현상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서울은 그 순환이 무척 빠르다. 도시공학과 도시사회학의 여러 가지 이슈가 빠른 배속으로 재생하는 영상처럼 나타났다 사라진다. 지난 20여 년간 17곳의 동네 골목 곳곳에서 일어난 일 역시 그 순환의 일부다. 인간이 만든 법인이 법적으로 생명을 갖고 있는 것처럼, 인간이 만든 도시 역시 어떤 생물이 되어 사람들을 이리 몰고 저리 모는 건지도 모르겠다. --- p.200
돌아온 인천공항에서 깨닫는다. 내 몸은 이 도시에 맞춰져 있다. 여권만 대면 바로 나가는 자동 출입국 시스템을 거쳐 짐 찾는 곳으로 나간다. 짐을 가지러 가는 길에는 소녀시대가 나온 광고가 붙어 있다. 나는 그들의 팬은 아니지만 그 사진 속 9명 중 누가 탈퇴했는지도 알고 있다. 서울 가는 공항버스를 타려고 따로 표를 살 필요도 없다. 후불제 교통카드를 찍으면 되니까. 나는 그 사실을 몸으로 안다. 여기 사람이니까. --- p.269
나는 요즘 세상에 가장 큰 문화적 자산은 공간이라고 생각한다. 공간이 있다면 그 공간으로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콘텐츠라는 말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공간이야말로 콘텐츠의 시작이자 끝이다. 극장의 무대에서 공연이라는 콘텐츠가 사람들을 끌어들인다. 사람들은 극장으로 가는 체험의 모든 과정을 콘텐츠화할 수 있다. 가는 길까지 콘텐츠다. 그런 면에서 국립극장의 불편한 입지는 오히려 더 매력적일지도 모른다. 좋은 공연을 보러 숲속의 큰 극장에 가는 거니까. 요즘 세상엔 그런 기분을 주는 게 어느 때보다도 중요하다.
그의 글은 술술 읽혔다. 안정제와 에너지 드링크를 동시에 섞어 마시는 기분이랄까. 한없이 소심하고 적당히 비관적이며 경이롭도록 자기보호적인 힙스터 박찬용의 안내로 이 도시의 안팎을 제대로 탐독했다. 도시의 지루한 정면 대신, 단면, 구멍, 틈새까지 두루 아우르는 뷰는 그동안 다져진 탄탄한 필력과 정보력 덕일 것이다. 도시를 다룬 최근 에세이 중 가장 재미있고 읽을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