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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사체로 죽더라도 선탠하고 싶어

변사체로 죽더라도 선탠하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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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0년 03월 25일
쪽수, 무게, 크기 352쪽 | 474g | 148*210*22mm
ISBN13 9791190049108
ISBN10 1190049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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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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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코 정부는 미국과 통하는 모든 국경을 폐쇄했다. 미국에서 수만 마리 좀비들이 끊임없이 멕시코로 기어 왔기 때문이었다. 미국으로 가려는 멕시코인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고, 거의 백 년에 걸쳐 미국으로만 향하던 국경의 풍경은 달라졌다. 아메리칸 드림은 멈췄고 멕시코로 넘어오는 좀비를 막기 위해 미국과 접한 모든 국경에 9미터 높이의 콘크리트 벽과 전기 철책이 세워졌다. 그것은 캐나다도 마찬가지였다. 어느 날 갑자기 국제 사회에서 미국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 p.10

티모시는 알코올 적신 수건으로 수포 주위를 닦고 건조해 살비듬이 날리는 곳에 로션을 발랐다. 로션이 새라의 마른 피부를 지날 때마다 새라가 살아온 세월이 보이듯 만져졌다. 아스러질 듯이 미약하고 불려갈 듯이 빈약한 감촉의 세월이었다. 호흡 또한 쇠약해져 입으로 흉내 내던 하모니카 소리도 새라는 더 이상 내지 않았다. 티모시는 그제야 개인의 종말과 세상의 종말을 구별할 수 있었다. 개인이 종말을 맞지 않아도 세상은 종말할 수 있는 것이었다. 티모시가 소리 없이 웃었다.
--- p.60

자자의 머릿속에 새끼와 함께한 지난날이 강물처럼 흘러갔다. 아장아장 지나간 종가의 발자국에 별보다 많은 개망초 꽃이 피어났었다. 책을 읽는 종가의 목소리는 가을밤 강바람보다 청명했었다. 종가가 캐어 온 봄나물이 상큼해 매서운 겨울은 물러났었다. 땡볕에 땀 맺힌 종가의 목덜미가 아까워 꿀 같은 단비는 내렸었다. 종가 기지개에 뜨는 아침 해는 찬란했었고 종가 하품에 물드는 저녁노을은 새붉었었다. 새끼와 함께한 세상은 말할 수 없이 아름다웠었다. 그 세상이 자자의 눈 속에서 강물이 되어 풍요롭게 흘러갔다. 자자는 작대기를 내려놓고 그 세상을 눈물로 흘렸다. 종가 역시 눈물을 흘렸지만 입으로는 생그레 웃으며 아비의 눈물을 닦았다. 한밤 운종가 거리에 거지들 코 고는 소리가 여기저기인데 부녀의 울음소리가 그 틈으로 몰래 숨었다.
--- p.179

“암… 나 간암 걸렸대.”
일금이 무르춤하더니 곁눈을 뜨고 일문을 노려보았다. 한참을 노려보아도 일문이 반응을 보이지 않자 일금은 느닷없이 형 일문의 상의를 벗기고 배 이곳저곳을 눌렀다. 이어 자신의 웃옷을 까 볼록한 자기 배 여기저기를 누르고 꼬집었다.
“내 간이 더 부었어. 형이 암일 리가 없어.”
일금은 형 일문의 몸 냄새를 맡기 시작했다. 배꼽에서 가슴, 겨드랑이로 벌름벌름 콧구멍을 들이대더니 일문의 입을 벌리고 그 안으로 코를 집어넣었다. 곧바로 자신의 몸 냄새를 맡았고 손으로 입김을 모아 자기 입 냄새를 킁킁댔다.
“썩은 내는 나한테서만 나. 형이 암이면 난 이미 죽었어.”
일금은 씩씩대며 형 일문의 병을 부정했다.
--- p.296

“좀비는 어디에 있냐는데요?”
“터널 출구 주변에서는 좀비를 만난 적이 한 번도 없소. 샤또게 강에서 남쪽으로 내려가면 올버니나 뉴욕 같은 큰 도시들이 나오니 그쪽으로 가 보라고 하시오.”
티모시의 답에 로사의 눈이 반짝였다. 로사가 일금의 질문을 통역한 것이 아닌 자신의 질문을 던졌다.
“좀비를 본 적이 없어요?”
“출구 근방에서는 본 적이 없소. 안전하지 않다면 이 일을 매번 어떻게 하겠소?”
로사에게 힌친브룩 수용소는 정글이었고, 숨 쉴 수 없는 바다 깊은 곳, 빛이 닿지 않는 심해 어딘가였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심연에 잠긴 로사를 향해 수직으로 잠수해 내려왔다. 그의 나라가 코앞이었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DVD를 보던 고향 샛별에서, 잡히면 죽는다는 불안을 멀미하던 쿤밍행 버스 안에서, 팔리기를 기다리는 짝태처럼 누워 있던 태국 수용소에서, 쉬지 않고 꿈꾸던 그의 나라를 로사는 보고 싶었다.
--- p.338

그들의 소개를 듣는 순간 이 모든 사태가 어디서 비롯됐고, 그들이 어떻게 좀비가 됐는지가 제 머릿속에 주마등처럼 지나갔습니다. 이름만 듣고도 저는 그들의 모든 사연과 이야기를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저는 저희가 추는 춤의 의미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더 이상 헤어지지 않아도 된다는 기쁨의 춤이었고, 끝없이 사랑할 수 없다는 분노의 춤이었으며, 이제 노동하지 못한다는 슬픔의 춤이었고, 그만 노동해도 된다는 즐거움의 춤이었습니다. 저희는 며칠 동안 울고 웃으며 그 춤을 췄습니다.
--- p.344

출판사 대표님이 이 소설 가운데 가장 좋아하는 문장이 뭐냐고 물은 적이 있었다. 나는 주저 없이 ‘종가가 캐어 온 봄나물이 상큼해 매서운 겨울은 물러났었다.’라는 문장을 제일 좋아한다고 답했다. 더 묻지 않아 첨언하지는 못했지만, 나는 봄이 그렇게 왔으면 좋겠다. 때가 되어 봄이 오고, 때가 되어야 겨우 사람이 살아가는 세상이 아니라, 사람의 힘으로 겨울이 지나가고, 사람의 힘으로 태양이 비추고, 사람의 힘으로 사람이 살아가는 그런 세상이었으면 좋겠다. 내 의도가 저 문장에 담겼을는지 모르지만, 당신의 땀방울이 눈부셔 여름이 지나가고, 당신의 머리칼이 스산해 낙엽이 물들고, 당신 노동에 휴식이 필요해 긴 동면의 눈이 내리는 그런 세상이 찾아오길 바란다.
--- 「작가의 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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