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필사본의 제작과 거래
구텐베르크, 콜럼버스, 루터, 코페르니쿠스는 중세의 경계에 있는 위인들이다. 그들은 인류 문명의 발달에 있어 이정표 역할을 한다. 그들 중 누가 인간 정신의 비약적 성장과 새로운 시대로 들어가는 문을 열어주는데 가장 큰 영향을 미쳤느냐는 질문에 대답하기는 어렵다.
우선 마인츠 시민 구텐베르크는 정신에 묶여 있던 사슬을 풀고 날개를 달아 준다. 그는 납을 세계의 정복자 대열에서 죽음을 불러오는 탄환이 아니라, 글로 담화하며 삶을 일깨우는 활자로 만든다. 선원이며 탐험가인 콜럼버스는 공간의 세계를 확장하고, 유럽을 지중해라는 좁은 바다와 해안의 경계를 넘어 무한의 대양으로 나아가게 한다. 거기에 이어 비텐베르크의 종교개혁자 루터는 정신을 옭아매고 있던 사슬을 끊어버리고 도덕적 자율의 권리를 돌려줄 것을 요구한다. 프라우엔부르크 주교좌성당의 참사회 의원인 코페르니쿠스는 우주의 운동법칙을 발견함으로써 인류가 그때까지 꿈꾸어 왔던 유치하기 짝이 없는 하늘에 대한 상상을 마침내 깨뜨려 버린다.
사고하는 인간이 기호와 문자를 수단으로 불충분하게라도 서로를 이해하고 사고의 열매를 후세에 옮겨놓을 수 있을 때까지 수천 년이 흘러갔다. 기존 작품의 전제와 토대인 구텐베르크의 발명이 비로소 전대미문의 범위로 민중의 정신적 교류를 확장했고, 그 교류를 세계를 지배하는 권력으로 만들었다. 위대한 발견과 발명은 결코 우연의 소산이 아니다. 그것은 항상 수년간의 노동과 관찰의 결과이며, 처음엔 실패하지만 후에 성공하는 시도이며, 뜬 눈으로 보낸 수없이 많은 밤과 새로운 근심과 절망, 그리고 오랜 기다림 끝에 오는 승리의 결과이다. 냉정한 현실 세계에서는 아이디어의 최초 사고와 그것에 바탕으로 둔 대발명의 궁극적인 현실화 사이에는 항상 길고 불안한 시기가 놓여 있다. 발명자와 발견자는 시작의 어려움을 의식하면서 관습적 관계로 편승하는 노력에서 항상 오래전에 인정된 삶의 방식에 기대려고 하는 욕구를 느낀다. 그래서 구텐베르크 또한 외관적으로는 보면 동일한 분야에서 옛것의 성과를 충분히 이용하고 발전시키는 방식으로 쓰기 기술과 중세의 필사본 거래를 접목하고 있다.
서적이나 필사본 거래에 대한 언급은 매우 드물며, 산발적인 단편 자료만이 후세에 전달되었다. 고대연구가와 역사서술가는 동일한 단편적 자료로부터 희박하게 전승된 것에 있는 내용들을 반복해서 발표한다. 여태까지 연구되지 않았던 자료들이, 이것은 아주 불가능해 보이는데, 해명되지 않는 한, 새로운 사실들이 더 이상 조달되기가 어려울 수 있다. 그래서 그 시대의 서술과 인식에 대한 것은 이미 획득된 연구 성과의 요약에 불과하다.
아테네, 알렉산드리아, 로마는 고대 세계의 정신적 삶을 규정하고 지배하는 문화의 3대 중심지였다. 그리스인들은 기원전 7세기 전까지는 파피루스를 이집트에서 조달받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의 문학도 이 시기 이후에나 비로소 시작될 수 있다. 아테네의 서적거래에 대한 것은 아주 드물게 후대에 전해지고 있다. 페르시아 전쟁(기원전 499-450)의 종말과 더불어 시작되고 펠로폰네소스 전쟁(기원전 431-404)으로 끝난 그 시기에 자유롭게 발전된 그리스 정신이 만개한다. 그러나 아테네는 나중에 위대한 시인이나 작가를 통해 비로소 그리스 문학의 중심지로 발전된다. 그곳에서 세계의 모든 일이 낭독되고 기술된다. 이미 기원전 5세기에 대중적인 문학이 만개한다. 일화 모음집, 요리책 등이 존재한다. 서적은 집에서나 학교에서 사용된다. 기원전 432년에서 425년 사이에 최초로 서적판매원이 언급된다. 필경사가 필사본 거래의 상업적 영업 활동을 중개한다.
필경사라는 직종에서 서적판매원이 유래하였고, 서적판매원이 필경사라는 직업을 성장시켰다. 종종 한 사람이 두 가지를 함께 한 경우도 있었다. 알렉산더대왕(기원전 356-323)은 아테네에 있는 친구 하르푸루스를 통해 새로운 문학작품과 역사서를 현지로 보내게 했다.
작가와 출판업자 사이의 정당한 관계, 즉 출판업자가 작가에게 사례를 지불하는 관계는 불법복제를 금지하는, 혹은 표절을 금지하는 법이 없었던 것처럼 당시에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작가적 작업으로 돈을 번다는 것은 학식 있는 그리스인에겐 수치스러운 일인 것처럼 보였다. 작가는 아마 서적중개상이 아닌 부유한 개인에게 자신의 원고를 판매했을 것이다.플라톤(기원전 428-348)과 아리스토텔레스(기원전 384-322)와 같은 철학자들은 자신의 작품을 제자나 친구에게 주었고, 그들은 그것을 스스로 복제하거나 거래를 통해 수익을 창출하는 서적상에게 넘겼다. 플라톤의 제자인 헤르모도루스는 스승의 작품을 시실리언에서 판매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부유한 시민들은 노예를 시켜 사본을 만들게 하거나 자신들에게 가치 있는 원고는 자신의 손으로 직접 필사했다. 예컨대 데모스테네스는 스스로 여덟 번이나 투키디데스(기원전 454-396)의 역사서를 복제했다고 한다. 기원전 400년에 이미 아테네에서는 도서관이 존재했다. 피지스트라투스와 폴리크라테스에 의해 확인된 도서관의 존재가 여전히 불확실하지만, 아테네 사람들이 보고하는 오이리피데스, 유클리데스, 니코크라투스의 존재는 남아 있다.
알렉산더대왕 이래 비로소 아테네에서는 필사본 거래의 정기적인 상거래가 발전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 알렉산더가 알렉산드리아를 자신의 그리스-아시아-아프리카를 포괄하는 세계제국의 정치적 수도로 정한 것처럼, 그는 아테네를 그 당시 세계의 정신적 자본으로 경의를 표했으며 문학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알렉산더대왕의 정치적 몰락에도 불구하고 그의 과거 명성이 - 아테네가 수백 년간 알렉산드리아에 비해 중요한 서적 시장으로 남을 정도로 - 여전히 강력한 마력을, 특히 로마에 행사하였다. 상인들은 시장에서 자신들의 입지를 확고히 했으며 여기서부터 필사본을 머나먼 야만족에게 이르기까지 가져갔는데, 순수문학과 철학 작품만이 아니라 행정 문서도 거기에 포함되었다(Schoemann 1853, 529). 루클루스와 술라와 같은 부유한 로마의 위인들은 거기서 도서관 전체를 메울 서적을 구매하였다. 아테네에서 수사학과 철학을 공부하는 젊은 귀족 청년들은 서적 구매를 기품 있는 태도와 취향의 문제로 보았으며 거기서 수집한 상당한 양의 필사본을 집으로 가져갔다. 필사본의 가격은 서적이 아주 적은 수의 가용 노예로는 대량으로 제작될 수 없었고 그밖에도 쓰기 자료의 유동적인 가격으로 인해 비용이 많이 들었기 때문에 값이 쌀 수 없었다. 아테네에서는 유명한 필사본 거래상의 이름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단지 칼리누스와 아티쿠스의 일화로 후대에 전해질 따름이다. 칼리누스는 아름다운 필사본으로, 아티쿠스는 필사본 거래로 두각을 나타내었다. 이런 직업은 심지어는 평판이 나쁘기도 한데, 왜냐하면 정직하지 못한 일들이 자주 발생했고, 정확한 필사본 대신에 질이 나쁘고 양심이 없이 제작된 필사본이 형편없는 도구로 채색되어 구매자에게 판매되었기 때문이었다. 예컨대 테오폼프는 서적상을 정어리, 과일, 무화과, 가죽, 밀, 숟갈 등을 판매하는 상인과 동일한 등급에 놓았다(Meineke, 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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