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남달랐고, 그 남다름이 가장 큰 성공 요인이었던 것이다. 남과 다른 자기 자신만의 그 무엇을 가진 사람만이 크게 성공할 수 있다. 그래서 패스트 팔로우나 벤치마킹은 더 이상 유효한 성공 전략이 아니다. 이제는 퍼스트 무버가 되어야 하고, 자기 자신만의 것을 브랜드화 할 수 있어야 하는 브랜드 유의 시대이다.
그녀에 대해 프랑스의 소설가 앙드레 말로는 다음과 같이 평가한 적도 있다.
“샤넬은 패션계, 아니 세계사에서 가장 눈에 띄는 여성 중 한 명이다. 단지 디자이너로서가 아니라 시대를 이끈 여성으로서도 큰 의미를 지니는 샤넬, 그리고 그녀가 세운 거대한 패션 제국. 그녀는 드골, 피카소와 더불어 우리 시대에 가장 위대한 인물이다.”13)
그녀의 남다른 열정과 독특함에 대한 정신은 71세라는 늦은 나이에 패션쇼를 열게 했고, 이전에는 그녀의 패션에서 느낄 수 없었던 기발하고 창의적인 디자인이 쏟아져 나왔다. 이때 샤넬을 의미하는 ‘C’ 모양의 장식이 붙은 샤넬 특유의 가방이 탄생했고, 샤넬 스타일의 대명사가 되었다. ---「패션으로 여성을 해방시킨 20세기 가장 위대한 디자이너 _코코 샤넬」
“내가 일반인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원하는 것을 달성하기 위해 그들보다 더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는 것뿐이다.”52)
철의 여인이라 불려야 마땅한 여성
‘철의 여인’이라 불리는 강한 여성들이 있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별명처럼 그렇게 강한 여성임이 틀림없고,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철의 여인’보다도 더 강한 철의 여인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 앨리슨 래퍼라는 여성일 것이다.
그 이유는 ‘헬렌 켈러’를 제외한 다른 ‘철의 여인’들은 모두 남들과 똑같은 조건과 상황에서 경쟁을 하고, 자신을 당당하게 내 보였다면 앨리슨 래퍼는 남들과 비교했을 때 너무나 불리한 조건과 상황에서 위대한 예술가의 삶을 개척하며 자신을 당당하게 세상에 내 보여준 여성이기 때문이다.
서문에서 한 번 언급했던 프리드리히 니체의 말을 이쯤에서 다시 한 번 되새겨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위대한 예술가가 된 팔다리가 없는 여성 장애인 _앨리슨 래퍼」
작은 벌새처럼 작은 실천을 반복한 여성
『왕가리 마타이, 나무를 심는 여인』이란 다큐멘터리 영화에서 그녀는 새 중에서 가장 작은 새인 벌새 이야기를 한다. 숲에 큰 불이 났을 때 다른 큰 새나 동물들은 걱정과 두려움에 사로 잡혀서 어찌 할 바 모르고 있을 때, 가장 작은 새인 벌새는 한 치의 주저함도 없이 가장 가까운 냇가로 날아가서 물 한 방울을 가져와서 불이 난 곳에 물을 뿌렸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행동을 반복하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 하는 벌새가 바로 자기 자신이며, 또한 그런 벌새와 같은 사람이 되고자 했다고 말이다.
“지난 30년 동안 케냐 전역에 그린벨트운동의 자원봉사자인 농촌 여성들이 심은 3,000만 그루의 나무는 개인의 힘으로 역사의 진로를 바꿀 수 있다는 증거입니다. 많은 전쟁이 자원을 위한 싸움이었고 이 지구에서 그 자원은 고갈돼 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자원에 대한 지속 가능한 관리를 좀 더 잘 했더라면 자원을 놓고 벌이는 전쟁은 줄어들 것입니다. 따라서 지구환경을 보호하는 일은 평화유지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겁니다.”
노벨평화상을 수상할 때 그녀가 밝힌 수상 소감 중에 한 이 말처럼 작은 개인의 힘은 충분히 그것들이 모이고 축적이 될 때 역사의 진로를 바꿀 수 있다. 그러므로 작은 개인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나약한 한 여성이라도 세상을 빛 낼 수 있고 바꿀 수 있다.
그녀의 작은 실천과 행동이 결국 아프리카의 사회, 경제, 문화 발전을 촉진시켰을 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인 환경보호 운동이 일어나게 해 주었다.
그녀는 과거의 자신처럼, 그리고 자신의 어머니와 여동생들처럼 가난한 여성들에게 일자리를 만들어 주고 싶었고, 훼손되어 가는 자신의 조국 케냐의 환경을 다시 살리고 보호하고 싶었던 것뿐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작은 생각과 ‘나무 한 그루’로부터 시작된 작은 실천이 결국 그녀로 하여금 세계적인 환경 보호 운동가가 되게 해 주었고, 아프리카 여성 최초의 노벨평화상을 수상하는 역사적인 인물로 만들어 주었던 것이다. ---「아프리카 여성 최초의 노벨평화상 수상자 _왕가리 마타이」
박완서 작가의 경우에도 1970년 겨울에 불혹의 나이에 처음으로 등단을 하여, 『여성동아』 여류 장편 소설 공모전에서 대상을 탄 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면 지금쯤 아무도 박완서 작가를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그녀를 위대하게 만든 것은 타고난 필력이 아니었다. 나이 마흔에 시작할 수 있었던 용기, 그리고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글쓰기를 해 나갈 수 있었던 집중력과 꾸준함이었다.
『느리게 성공하기』란 책에 보면 박완서 작가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한 부분이 나온다.
“박완서, 그녀의 소설가로서의 삶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여성의 사회적 진출도 적을 뿐만 아니라 마흔이면 여자로서의 삶은 다 끝났다고 생각하는 1970년대에 당연히 그녀의 등단은 신기한 일 정도로만 여겨졌다. 그저 한 번의 요행이라고 생각한 사람들도 많았고, 그래 어디 한 번 얼마나 오래 가는지 두고 보자는 심보로 바라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꾸준한 글쓰기를 통해 자신에게 향했던 의심의 눈초리를 털어버리고 『미망』, 『그 해 겨울은 따뜻했네』 등 대중성과 작품성을 겸비한 작품들을 세상에 선보였고 돌아가시기 전까지 100여 편의 작품을 내놓으면서 왕성한 작품 활동을 했다.”22)
나이 마흔에 시작한 글쓰기로 100여 편의 작품을 내놓을 수 있었던 것은 큰 변동 없이 꾸준히 글쓰기에 집중력을 발휘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일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다섯이나 되는 자식들을 뒷바라지해야 했고, 끝도 없는 집안일을 하면서도 그녀는 꾸준히 매일 글쓰기를 멈추거나 쉬지 않았다. 꾸준함을 이길 것은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는 것 같다.
---「나이 마흔에 등단한 전업주부, 다섯 아이의 엄마, 한국을 대표하는 여류작가 _박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