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자유’를 이렇듯 봉건적 억압으로부터 개인의 해방 내지 사적 자유의 확보라는 차원에서 강조하는 입장은, 그것이 일제 식민지로부터 ‘국권의 회복’이나 ‘자주독립’이라는 정치적·공동체적 자유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을 동반하지 않을 때, (비록 당대에는 일정한 진보적 의의를 지닌 것이었다 하더라도) 결국 제국주의와 타협하면서 친일·부일의 논리로 나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전환 과정을 여실히 보여주는 인물이 윤치호다. 독립협회 및 대한자강회의 핵심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그는 강제병합 직후인 1911년에는 ‘105인 사건’으로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는 등 민족주의자의 모습을 보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갑신정변을 전후한 시기에 이미 조선의 정치체제는 불공정하고 잔인하며 억압적인 악정이요 전제라고 비판하면서 “현 왕조가 빨리 사라질수록 민족의 복지는 더 나아질 것”이라는 생각을 드러냈다.
--- p.57
한국 역사에서 평등은, 권력층의 ‘고르게 하려는 뜻’ 즉 ‘균 의지’에 의해서가 아니라 백성들 스스로의 의지와 실천으로 구현되었다. 두레, 민회는 백성들의 평등 의식의 소산이며 그것은 민란과 동학혁명으로 이어졌다. 동학을 이은 천도교가 중심이 된 3·1운동은 모든 인민의 평등을 선포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낳았다. ‘대한민국임시헌장’ 제3조는 “대한민국의 인민은 남녀 귀천 급 빈부의 계급이 무하고 일체 평등임”이라 했으며, 정강의 첫 번째가 “민족평등·국가평등 급 인류평등의 대의를 선전함”이다. 또한 3·1운동의 영향으로, 사회 내 가장 천한 집단인 백정들이 ‘형평사’를 세워 본격적인 평등 운동을 전개했다.
--- p.90
오히려 ‘임시헌장’과 유사한 것은 바이마르공화국 ‘헌법’이다. 바이마르 ‘헌법’ 제1조는 “Das Deutsche Reich ist eine Republik. Die Staatsgewalt geht vom Volke aus(독일국은 공화국이다. 국가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렇지만 바이마르공화국 ‘헌법’이 국민회의를 통과(1919. 7.31)하여 공표된 것은 ‘임시헌장’보다 정확히 4달이 늦은 1919년 8월 11일이었다(김백유, 2015: 204). 유럽에서도 ‘민주공화국(democratische Republik)’이 헌법에 사용된 것은 1920년 2월 체코슬로바키아 ‘헌법’과 10월 오스트리아 ‘헌법’이 처음이었다(이영록, 2010: 58; 이영재, 2015: 240).
중국의 경우 신해혁명 이래 속출했던 다수의 헌법안에서 전혀 나타나지 않다가 1925년 「중화민국헌법초안」에 처음 민주공화제가 등장했는데, 여기서 공화국은 미국처럼 연방의 의미가 있었다(여치헌, 2012: 271). 정리하자면, 시기가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민주공화’라는 표현을 헌법적 문서에 포함시킨 것은 아시아에서는 물론이고 세계적으로도 한국이 가장 앞선다는 주장(박찬승, 2013: 139)이 아직까지는 유효한 셈이다.
--- p.137~138
토지소유 이데올로기의 변천사를 지주주의와 지공주의의 갈등과 대립의 역사로 파악하고자 할 때, 몇 가지 주요한 요인 내지 계기가 눈에 들어온다. 첫 번째는 조선시대 왕토사상(王土思想)이 형해화하는 과정에서 제기된 실학파의 토지개혁론, 두 번째는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에 따른 지주주의의 극단화와 그에 대한 대립으로서 삼균주의(三均主義)의 등장, 세 번째는 농지개혁에 따른 지공주의의 일시적 회복과 그 한계, 네 번째는 박정희 정권에 의한 지주주의의 강화와 ‘부동산공화국’의 성립, 다섯 번째는 노태우 정부와 노무현 정부의 토지공개념 제도화 시도이다.
지공주의는 집권 세력이 지주주의를 효과적으로 제압하는 경우에 제도화에 성공했고, 반대로 지주주의는 갖은 경로를 통해 지공주의를 무력화하려는 경향을 보였다. 지주주의의 담지자인 지주층은 어느 사회에서건 지배층 또는 기득권층의 위치에 서기 때문에 권력을 활용한 그들의 지공주의 무력화 시도는 대개 성공했다. 그러나 지주주의는 사회를 책임지고 사회 구성원을 평안하고 풍족하게 만들 수 있는 이데올로기가 아니다. 지주주의가 득세한 사회는 불평등과 양극화가 심각해져서 제때 개혁이 행해지지 않는 한, 결국 몰락의 길로 치달았다.
--- p.167
그러나 분화된 부문 간의 실제적 관계는 개념적 구분보다 훨씬 복잡했다. 한편에서 시민운동의 일부는 계급적 이슈를 배제했다. 이들은 ‘평화적, 개혁적, 공공선 지향적인 시민운동’과 ‘급진적·혁명적·계급당파적인 민중운동’을 대조하곤 했는데, 이러한 구분 방식을 체계화하고 확산시킨 중요 인물 중 하나인 서경석 목사(서경석, 1993)가 이후에 뉴라이트의 대표적 인물이 되었다는 사실은 ‘보편성’과 ‘공공선’의 담론 자체가 구체적 맥락 안에서는 당파성과 계급성이 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와 달리 많은 진보적 시민단체들은 1980년대 민주화운동과 급진적 학생운동의 계승자였다(Kim, 2006: 103~104). 그들은 1990년대 내내 노동자 단체들과 활발히 연대했으며, 그중 다수는 경제정책, 노동 및 사회정책, 사회복지 등 계급적 의제에서 국가·정치 개혁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 p.240
박정희·전두환 체제의 유산 위에서 13대 국회가 주조해 낸 정당정치의 경로는, 민주정치 30년의 역사 속에서 변형을 거듭했고, 지금과 같은 독특한 정당조직문화를 만들어냈다. 이 체제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현행 체제를 지탱하는 제도적 조합과 정치적 힘은 여전히 강력하다. 그러나 이 체제에 만족할 수 없는 시민들의 불만 역시 강력하며, 민주정치의 경험을 체득하고 제도정치권 안으로 진입하려는 시민사회의 힘 또한 커지고 있다. 제도 안에서 지탱하려는 힘과 제도 밖에서 균열을 내려는 힘들이 빚어내는 역동적 과정은 앞으로도 지속될 것이다. 그러나 지난 역사로 확인되듯이 시민들의 민주적 역량이 성장하는 것과, 그것을 민주정체의 힘으로 바꿔내는 대안은 다른 차원이라는 것이다. 결국 문제는 누가, 무엇을 대안으로 정의할 힘을 갖느냐이다. “민주주의는 정당 '내부가' 아니라 정당 '사이에' 있다”(Schattschneider, 1942: 60)라는 명제는 여전히 유효하다.
--- p.301~302
식민지 근대사회의 이중적·관음적 인식 속에 김명순은 지속적으로 모욕과 조롱을 당했다. 1915년 7월 30일 [매일신보]에는 “동경에 유학하는 여학생의 은적(隱迹), 어찌한 까닭인가”라는 제목의 한 기사가 실렸다. 김명순이 마포연대부 보병 이응준과 ‘서로 오매불망’하다가 이응준이 그리워서 기숙사를 빠져나가 행방불명되었다는 내용이다. 8월에 연이어 나온 기사는 이응준이 결혼을 거부했고, 김명순이 그 후 자살을 시도했다고 보도했다. 이는 김명순이 연인이었던 이응준에게 강간당하고 결혼을 거절당한 사건이었지만, 사건이 벌어진 후 오랜 시간 동안 김명순은 ‘타락한’ 여성으로 규정되었고 성적 조롱과 희롱의 대상이 되었다. 반면에 이응준은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해방 후 초대 육군참모총장으로 승승장구했다.
--- p.310
해방 이후 학생운동은 한국 사회 민주화의 주역이었다. 1987년 6월 항쟁으로 공고한 민주화의 길로 들어선 이후, 흔히 ‘586’이라 불리는 학생운동 지도부 출신들이 정치 주류를 형성하고 있다. 1987년 당시 학생 ‘대중’으로 거리에서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친 세대는 나이가 들면 보수화된다는 통념을 깨고 여전히 진보적 정치 성향을 갖고 있다. 민주화운동의 추동력으로서의 학생운동의 역사는 과거의 것이 되었지만, 그 영향은 21세기인 오늘에까지 미치고 있다. 그런데 오늘날 학생운동 지도부 출신들이 생산하는 정치 문화에서는 정치적 진보성과 문화적 진보성 사이의 괴리를 느끼게 된다. 동시에 그것을 학생운동 조직문화의 연장선상에서 성찰해 보게 된다.
--- p.3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