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우리 교회의 첫 예배는 겨우 몇 명으로 시작했다. 하지만 하나님이 강하게 역사하신 덕분에 교회는 급성장을 거듭했다. 내가 스페인어를 할 줄 안다는 장점을 살려, 창립 3년째부터는 스페인어 예배를 드렸다. 6년째가 끝나갈 무렵, 영어 예배에는 400명 가까이 사람들이 모이고 스페인어 예배에는 약 250명이 모였다. 게다가 새로운 교회를 두 곳이나 개척했으니 실로 눈부신 성과가 아닐 수 없었다.
하나님은 기도, 금식, 병 고침, 영적 전쟁, 성령의 은사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법에 관한 많은 것을 가르쳐 주셨다. 매주 새로운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영접했고, 또 수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와의 개인적인 관계를 만들어 갔다. 가난한 사람들을 창의적으로 섬기는 사역들이 속속 탄생했다. 우리는 리더들을 양성하고 소그룹들을 끊임없이 늘리고 노숙자들을 먹이고 새로운 교회들을 개척했다. 하지만 그렇게 겉만 화려할 뿐 표면 아래, 내적 상태는 그리 좋지 않았다.
미성숙하고 유치한 행동들이 계속해서 반복되어 나타났다. 갈등이 끊이질 않았다. 인종적, 경제적, 문화적 담을 허물겠다는 명목 하에 부담스러운 대화를 하지 않다보니 우리 공동체는 하루가 다르게 탈선의 길로 향했다. 무엇보다도 가장 답답한 것은 일부 핵심 교인들의 바람직하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들 스스로는 하나님을 향한 열정으로 불타오르고 있었지만, 남들은 그들을 비판적이고 믿을 만하지 않으며 다가가기 부담스러운 존재로 여겼다.
당시에는 전혀 깨닫지 못했지만 우리 교회의 많은 문제는 다름 아닌 나 자신의 문제와 미성숙에서 비롯한 것이었다. 나의 피상적인 제자로의 삶이 내가 이끄는 사람들 속에서 그대로 재생산되고 있었다.
우리 교회는 역동적으로 움직였지만 리더들, 특히 우리 부부에게는 전혀 즐거운 곳이 아니었다. 그래서인지 사역자들의 사임이 잦았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영적 전쟁과 뉴욕 시의 혹독한 목회 환경 탓으로 돌렸다. 주변에서는 그것이 큰 조직과 사업체에서 흔히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성장통이라며 나를 격려했다. 하지만 우리는 사업체가 아니었다. 우리는 교회였다!
아내와 나는 무엇인가 잘못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우리 부부의 사기는 나날이 떨어져만 갔다. 교회 리더들은 사역을 무거운 짐처럼 느끼고 있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위한 열심으로 천하를 얻고도 자기 영혼을 잃은 자들이었다(막 8:36).
무엇인가 단단히 꼬여 있었다. 나는 남몰래 은퇴를 꿈꾸고 있었다. 그때 겨우 30대 중반이었다. 영적으로 나를 점검해 보았지만 기쁨이 없는 원인을 찾아낼 수 없었다. 부도덕한 짓을 저지른 것도 아니고 원한을 품고 살아온 것도 아니고 남의 것을 탐하지도 않았는데 도대체 왜 이런 것일까?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분노와 상처로 가득한 내 모습을 감추다
이후 2년간 내 삶은 끊임없이 나락으로 떨어져만 갔다. 내 삶이 마치 블랙홀에 빠져 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도와달라고, 나를 변화시켜 달라고, 하나님께 눈물로 부르짖었다. 하지만 하나님은 내 부르짖음에 귀를 닫기로 작정하신 것처럼 느껴졌다.
아내의 폭발은 고통스러웠지만 우리에게 해방의 물꼬를 열어 주었다. 아내는 마침내 ‘선한’ 영적 허울을 벗어던졌다. 그 허울은 우리의 결혼생활과 삶에 관한 진실을 직시하지 못하도록 방해한 큰 걸림돌이었다. 나는 귀를 기울였다. 아내도 귀를 기울였다. 우리는 부모들의 삶과 결혼생활을 되짚어 보았다. 우리 교회의 상태를 솔직히 돌아보았다. 우리 교회의 상태는 내 어릴 적 가정의 역기능적인 면들을 그대로 보여 주고 있었다. 그 전까지만 해도 우리는 둘 다 이런 감정을 느껴서는 안 되는 것으로 알고 살아왔다.
진정한 제자훈련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겨우 몇 센티미터 깊이밖에 되지 않는 피상적인 제자훈련이라는 충격적인 사실을 발견했다. 우리는 17년 넘게 예수님을 믿어 왔지만 그간 우리가 알고 실천해 온 제자훈련은 수박 겉핥기에 불과했다. 그토록 오랫동안 성경을 공부하고 열심히 기도했지만, 내 삶 속에서 아직 하나님께 열지 않은 부분이 많이 남아 있다는 사실은 커다란 충격이었다.
어떻게 이럴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예수님을 따르는 일과 관련해서 수많은 목사와 리더들이 가르쳐 준 모든 것을 빠짐없이 실천했다. 나는 충성을 다하고 철저히 헌신했다. 나는 하나님의 능력, 성경, 기도, 성령의 은사를 믿었다. 그런데 어떻게 내 삶과 결혼생활, 나아가 내 리더십이 이토록 철저히 좌초할 수 있단 말인가. 하나님의 폭발적인 능력은 다 어디로 갔단 말인가.
특히, 신앙과 리더로서의 역할과 관련해서 나는 죽은 것만 같았다. 하지만 처음에는 죽음처럼 느껴지던 이 경험이 사실은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를 여는 긴 여정의 시작이었다. 그것은 우리의 삶, 결혼생활, 가정, 교회, 나아가 세상의 수많은 교회들이 변하게 되는 출발점이었다. 나는 기독교 신앙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제자로 훈련을 받고 제자를 키워 온 방식이 문제임을 발견했다.
겉모습만 멀쩡한 구멍 가득한 부실한 제자훈련
나는 사위 브레트(Brett)에게서 석조 건축에 관한 많은 것을 배웠다. 5년 전 사위는 한 석공 장인의 수습공으로 역사상 가장 오래된 직업 중 하나인 석공 분야에 입문했고, 최근에서야 두 번째 단계인 숙련공이 되었다. 장인이 되기까지는 아직 7년 이상을 더 수련해야 한다. 총 훈련 기간은 10년을 훌쩍 넘어 15년까지 걸릴 수도 있다.
석공 분야에서 수습공에서 숙련공을 거쳐 장인의 단계까지 이르는 과정이 너무 느리고 고되다 보니 손에 꼽을 석공 장인이 많지 않는 것도 이상하지 않다. 이러한 석공 장인이 지은 건물은 혹독한 날씨에서도 몇 천 년을 버틸 수 있다. 이집트의 피라미드, 중세의 성들, 오늘날의 잘 만들어진 농가 돌집들을 보면 알 수 있다.
돌을 캐서 자르고 옮기고 나서 장인을 고용하는 데 드는 비용과 시간이 막대하다 보니 건축업계는 계속해서 값싼 대안을 찾아왔다. 요즘에는 진짜 돌처럼 보이는 외관을 만들기 위해 ‘클래딩’(cladding)이라고 하는 석판을 주로 사용한다.
클래딩은 크게 두 종류로 나뉜다. 천연 클래딩과 인조 클래딩이 있다. 천연 클래딩은 커다란 암석을 3-13센티미터 두께의 얇은 석판으로 잘라서 집이나 빌딩의 외벽에 붙이는 것이다.
인조 클래딩은 시멘트 같은 인공 재료로 만든 자재이다. 얼핏 값비싼 천연 암석처럼 보이고 촉감도 비슷하지만 석공 장인이 사용하는 육중한 돌은 물론이고 천연 클래딩보다도 저렴하다. 심지어 설치도 빠르고 쉽다. 아예 ‘DIY’ 제품으로 선전하는 브랜드도 있다. 유튜브 설명만 보면 누구나 쉽게 설치할 수 있다.
지금쯤이면 내가 왜 석조 건축과 클래딩 이야기를 꺼냈는지 짐작했으리라 생각한다. 답은 간단하다. 현대 교회의 제자훈련이 대부분 클래딩과 비슷하다.
표면적으로는 모든 것이 진짜처럼 보인다. 교인들은 활기차고 낙관적이며 예수님이 인생의 위기와 골짜기를 너끈히 지나게 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으로 충만하다. 뜨거운 예배와 가슴 울리는 설교로 하나같이 영적으로 고양되어 있다. 교회마다 감동적인 간증을 들으며 뜨거운 눈물을 흘린다. 소그룹 모임과 주일 모임은 활발하고 훈훈하다.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행하기를 원하는 새로운 일들이 일사천리로 진행되고 있는 느낌이다.
문제는 무거운 돌처럼 큰 하중을 견딜 수 있는 예수님의 제자훈련 방식은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이다. 겉으로는 세찬 비바람과 세월의 무게를 견딜 만큼 진짜처럼 보인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하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 이후 처음 17년 동안의 내 삶이 바로 클래딩의 삶이었다. 겉으로는 충분히 좋아 보였지만 내 제자훈련과 리더십에는 커다란 구멍이 가득했다. 잠시 동안은 큰 문제가 없었다. 내 은사와 열정이 표면 아래 공백의 상당 부분을 덮어 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얇은 판 아래에 숨겨진 나와 우리 교회의 부실한 제자훈련 상태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본문 중에서
정서적으로 건강한 제자훈련이라는 두꺼운 돌
정서적으로 건강한 제자훈련(Emotionally Healthy Discipleship)은 육중한 돌과도 같은 진짜 제자훈련으로 방향을 급선회하라는 강력한 촉구이다. 물론 그 과정은 힘들고 복잡하고 부담스럽다. 하지만 진정한 석조 건축물처럼 오랜 시간을 버티는 결과물이 탄생한다.
정서적으로 건강한 제자훈련(EHD)의 본질은 올바로 실행될 때 교회나 사역 단체나 여타 조직의 모든 영역을 변화시킬 수 있는 성경적인 신학이다. 정서적으로 건강한 제자훈련(EHD)은 무거운 하중을 견딜 수 있는 돌 위에 세워진 제자훈련의 구조이다. 이런 종류의 훈련을 거칠 때 교인들은 주변에서 아무리 거센 위기와 격동이 일어나도 조금도 요동치지 않는다.
---「프롤로그」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