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조기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았다. 자신의 마지막 소망을 말할 기회가 있었던 그녀는 병이 더 심각해지기 전에 세상에서 ‘사라지기로’ 결심했다. (···) 론 애드킨스는 아내의 결정을 공개적으로 지지했다. 하지만 나는 혹시 그가 아내에게 그렇게 하지 말라고 간청해보지는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봤다. 아내를 돌보는 부담이 그의 명예가 될 수도 있었을 테니 말이다. 아니면 남편에게 해서는 안 될 부탁을 했던 아내가 원망스럽지는 않았을까. 아마도 론은 둘의 미래를 위해 기꺼이 위험을 무릅쓸 마음이 있었을 것이다. 그는 혹시라도 아내가 마음을 바꿔 오리건으로 함께 돌아오고 싶어 할 경우를 대비해서, 아내 몫을 포함해 편도가 아닌 왕복항공권을 구입했다. (···) 나는 재닛 애드킨스가 자살을 원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미래의 자기 자신, 그녀가 상상한 악화된 상태의 자신, 가족을 ‘이 끔찍한 질병의 고통으로’ 몰아넣을 자신을 없애고자 했을 뿐이다.
---「2장. 치매에 걸릴 바에야 차라리 죽음을?」중에서
치매인은 그저 자기 자신의 문제만으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 치매는 개인의 뇌 기능 부전의 문제만이 아니다. 치매는 우리 모두의 기능 부전, 즉 대중의 병든 사고와 관련이 있다. (···) “할머니가 얼마나 심하게 구시는지, 세상에. 지나가는 사람들 전부한테 욕을 쏟아부으셨어요. 배가 고프니까 밥을 먹겠다고 떼를 쓰면서요. 그런데 점심은 방금 전에 드셨거든요. 그래서 대신 제가 간식으로 푸딩을 가져다 드렸어요. 그랬더니 그걸 저한테 던져서 푸딩이 온 바닥에 튀었지 뭐예요. 정말, 이젠 끝이에요. 더는 못 받아주겠어요.” 직원은 루스에게 등을 휙 돌리고 가버렸다.
킷우드가 설명했던 악성 사회심리의 개념이 그날 해프닝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됐다. (···) 킷우드가 내놓은 분석에서, 치매에 대한 악성 반응은 개인의 가치를 보통 그 사람의 재정적, 물리적, 지적 능력에 비추어 규정하는 관습을 드러낸다.
---「2장. 치매에 걸릴 바에야 차라리 죽음을?」중에서
우리 할아버지는, 57년간 살아온 자기 집에서 쫓겨났고, 익숙한 지역에서 쫓겨났으며, 심지어 딸의 가족이 새롭게 기틀을 잡은 지역인 컬럼비아에도 더 이상 발을 붙일 수가 없었다. 그리고 결국에는 육지로 둘러싸인 섬과 다름없는 곳에 정착해서, 가족에게서 물리적으로, 마음에서도 멀어졌다. 할아버지는 자신이 태어나 자란 고국의 한복판에서, 외국인과 다름없는 처지에 놓였다. (···) 나는 보살핌을 거부당할 처지에 있는 노인들에게 돌봄 공동체를 제공한다는 사실 자체가, 사회적 실패를 드러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인근 지역과 사회에서 곤경에 처한 노인들을 환영하지도, 차별 없이 수용하지도 못하며 제대로 지원하지도 못하는 사회적 실패 말이다.
---「3장. 현대판 고려장」중에서
알츠하이머 박사의 환자 아우구스테 데테르는 당시 치매를 정의하는 증상 중 하나였던 ‘심리사회적 부전’을 보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내가 알츠하이머 박사와 그녀가 이야기를 나눈 인터뷰 기록을 직접 읽었을 때, 아우구스테의 ‘무능함’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나는 오히려 심리사회적 갈망과 욕구가 가득한 한 사람을 느꼈다. 그녀가 자신의 인격에 대한 감수성을 갖고 있다는 사실과, 그런 그녀의 인간성이 위협받고 있음을 느꼈다.
(···) 아우구스테에게는 정신적 결함이 있었지만, 그녀의 말과 행동 그리고 그 바탕이 되는 감정은 정서적·심리사회적으로 이치에 맞는다. 알츠하이머 박사는 그녀의 표현과 감정에 대해 결함이 있다는 증거로 보고, 병의 또 다른 징후로만 생각했을 뿐이었다. 아우구스테 데테르의 치료는 임상적이고 비인격적이며 핵심에서 벗어난 접근법을 보여주는 사례다. 이런 치료에서는 지능검사가 중심이 되는데, 지능검사는 상징적인 언어, 몸의 움직임, 욕구 암시에 대한 해석은 거의 내놓지 못하며, 검사자가 검사 대상의 반응에 끼치는 영향은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아우구스테는 빈 껍데기와 마찬가지이고, 그저 환자일 뿐이며, 심리사회적 능력이 결여된 뇌질환자로만 간주되었던 것이다.
---「4장. 치매라는 경험 속으로 들어가다」중에서
얼핏 생각하면 치매가 사이를 틀어 놓으면서, 한때 가깝게 지내던 사랑하던 사람과의 관계가 소원해지게 되었을 것 같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내가 할아버지를 마지막으로 찾아가서 함께 시간을 보냈던 때는, 과거에 할아버지와 함께했던 그 어떤 시간보다도 기억할 가치가 있고, 의미 있고, 마음이 그에게 한 발 더 가까이 다가간 시간이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우리 사이의 거리가 건널 수 있는 거리처럼 느껴졌다. 할아버지의 빛이 더 이상 그의 은은한 그늘을 밀쳐 내지도, 나를 멀리 쫓아내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드디어 강렬한 빛 때문에 아무것도 볼 수 없는 상태에서 벗어나, 할아버지라는 사람 자체를 희미하게나마 볼 수 있게 됐다. 그도 옆에 있는 나를 볼 수 있었을 것이다. 객석에 앉은 관객으로서가 아니라, 어둑해진 빛을 받으며 함께하는 벗으로서 말이다.
---「5장. 어둠은 깊어졌지만 삶도 진해졌다」중에서
에머슨과 같은 시각은 환상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도록 한다. 따라서 실제 세계와 꿈의 세계 사이의 냉혹한 구분이 다소 누그러진다. 환상은 보편적인 인간의 영역을 모두 아우르며, 이런 전체성은 치매를 재해석하는 데 도움을 준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수많은 꿈을 꾼다고 가정하고, 각자가 지각하는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인다면, 치매를 이질적인 행동이나 일탈행동이라고 치부하지 않고 인간 경험의 연속선상에 두고 바라볼 수 있다. 인생은 지극히 현실적인 것만 있다고 주장할 수 없듯, 그들(꿈을 꾸는 사람들, 정신이상자들)이 비현실 세계에만 있다고 치부할 수도 없다. 치매인과 비치매인 모두가 층층이 쌓인 환상의 영역을 왕래한다.
---「6장. 실제와 실제가 아닌 것 구분하기」중에서
모든 것은 사라지고, 모든 것은 전체의 일부가 되고, 모든 것은 소멸하고, 모든 것은 지나간다. 우리는 죽음과 삶을 순환하는 움직임의 영향을 받게 되어 있다.
상실을 겪고도 슬퍼해서는 안 된다거나, 고통은 머릿속 생각에 불과하다거나, 삶의 변화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하려는 건 아니다. 그렇지만 치매에는 복합적인 특성이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치매라는 떠남과 사라짐 사이, 출발과 도착 사이에 살면서 어떻게든 양쪽 상태 모두를 수용해야 하는 어려움 말이다.
---「9장. 떠날 때를 알게 되는 기분」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