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만난 이유는 최호 코치가 방금 말한 그 할아버지 때문이다. 그의 스승이고, 송도고등학교 농구의 ‘전설’, 더 나아가 한국에서 운동 좀 가르친다는 모든 학생 스포츠 코치들의 롤 모델로 불려왔던 전규삼이다. 코치 생활만 30년 넘게 했다. 80살이 되어서도 선수들을 지도했다. 그러다보니 그 무렵의 학생들은 전규삼을 ‘코치님’, ‘선생님’이 아니라 ‘할아버지’라 불렀다. 그의 지도이력과 제자들은 죄다 한국농구의 역사를 관통하는 이들이다. 유희형, 김동광, 이충희, 정덕화, 서동철, 강동희, 신기성, 그리고 김승현에 이르기까지…. 국내대회는 물론이고 크고 작은 아시아대회에서도 명성을 떨친 제자들이 모두 전규삼으로부터 농구를 배웠다.
나는 문득 ‘그날’이 궁금해졌다. 내가 이곳으로까지 취재를 온 이유였다.
“그날도 그랬던 것이겠죠?”
“그날이요?” 최호가 되묻는다.
내가 궁금해 한 ‘그 때’는 1988년 7월 14일이다. 송도고등학교 이사회 결정에 학교 농구부, 아니 대한민국 농구가 흔들린 날. 당시 전규삼은 일흔이 넘었지만, 그때도 그 언덕을 걸어 올라왔다. 그렇게 땀을 뻘뻘 흘리며 올라왔건만, 교장실에서 날아온 소식은 해고 통보였다. 나이가 들어 함께 일하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해고 통보가 있기 10일 전에도 송도고는 쌍용기(당시 24회) 대회에서 준결승한 터였기에 놀라울 수밖에 없었다. 할아버지가 쫓겨났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서울 안암동 고려대 체육관과 서울 흑석동 중앙대 체육관이 난리가 났다. 정봉섭, 박한 등 대학 농구부 감독들은 훈련을 중단시키고 송도 출신 제자들을 불러 모았다. “할아버지를 지켜드려라. 송도출신들은 문제 해결되기 전까지는 돌아올 생각도 하지마!”
이미 유희형과 김동광, 신종철 등 송도 출신들이 교장실에 쳐들어갔다. “학교가 필요이상으로 간섭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후배들은 체육관에 모여 대자보를 만들고, 동문들에게 알렸다. 학부모들은 힘내라며 시위하는 졸업생들을 위해 다과를 준비했다. 저녁이 되자 중앙대 감독이던 정봉섭도 제자들과 시위대에 합류했다. 허재와 김유택, 강동희 등을 길러낸 ‘대부’ 정봉섭은 “옳지 않은 일이다”라며 학교측 결정을 비판했다. 〈동아일보〉같은 언론도 도와준다니 농구인들의 목소리도 더 커져갔다. 사태는 일파만파 커지기 시작하고, 학교는 혼란스러워졌다. 결국 제자들과 농구계의 반발로 학교는 해고 의사를 철회했다. 기사가 난 지 4일만이었다. 제자들이 그를 구해낸 것이다. 할아버지 농구감독 전규삼. 도대체 그는 어떤 인물이었을까. 과연 어떤 영향을 주었길래 이처럼 동문부터 학부모, 그리고 언론사까지 들고 일어섰던 것일까.
--- p.8, 「프롤로그」 중에서
전규삼은 선수들에게 “너희는 지금 배운 지식으로 평생을 살아야 한다”는 말을 강조했다. 선수들에게 아침 7시까지 집합을 지시, 1교시가 시작되는 9시까지 훈련을 시켰다. 수업을 듣고서 7교시가 끝나는 3시에는 다들 체육관으로 돌아왔다. 그때부터 저녁 7시까지 팀 훈련이 이어졌다. 팀 훈련이 끝나면 9시까지 개인 훈련이었다. 내일모레 대회가 열려도 훈련시간은 절대 바뀌지 않았다. 꼭 들어야 할 학교 수업을 다 듣기 전에는 소집하지 않았다. 대회가 오전에 끝나면 오후 수업을 들여보냈다. 수업 시간에 조는 일도 용납하지 않았다. 땡땡이도 못 쳤다.
그에겐 비밀 출석부가 있었다. 제 시간에 등교를 하는지, 수업시간에 졸지는 않는지, 시험은 잘 봤는지 교사들을 통해서 꼼꼼하게 체크했다. 전규삼에게는 상대팀 전력을 분석하는 비밀 노트보다도 중요했다. 실제로 선수 중 한 명이 오전 수업을 며칠 째 등한시 했다는 이유로 농구부 근처에 발도 못 붙이게 했던 사건이었다. “네놈이 여기서 농구 잘 한다고 크게 잘 되고 그런 거 아니다! 학생이면 학생답게 공부를 해야지. 지금 네가 하는 일이 올바르다고 생각하나!” “죄송합니다. 너무 힘들어서 그랬습니다.” 학생이 무릎을 꿇고 빌자, 전규삼은 한 번 더 힘주어 말했다. “술, 담배, 여자! 나중에 커서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것들은 나중으로 미뤄두라고! 너희는 운동하는 기계가 아니야. 운동하면서 공부하는 학생이라는 걸 잊어선 안 돼!”
전규삼은 매달 시험을 볼 때마다 성적표를 걷어 조사했고, 영어와 한자를 외우게 해 불시에 쪽지시험도 봤다. 이처럼 학업에 대한 코치의 열정이 진심이며, 굉장히 진지하다는 것을 깨달은 선수들은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아예 맨 앞자리에 앉아버렸다. 피곤하다는 핑계로 졸거나 지나칠 것을 걱정해서였다. 학교 수업이 없는 일요일만이 유일하게 ‘하루 종일 농구하는 날’이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전규삼은 결코 농구 때문에 기합을 주거나 회초리를 들지 않았다. 경기 중에 실수를 해도 허허. 연습 중 동작을 틀려도 허허. 슛을 못 넣는다 해도 허허.
그렇지만 ‘기본’을 우습게 여길 때만큼은 호랑이가 됐다. 전규삼이 강조한 ‘기본’은 단순히 ‘공부 잘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사람을 대할 때도 기본을 지키길 바랐다. 당시만 해도 운동부는 ‘패는 일’이 일상이었다. 코치는 학생을, 선배는 후배를, 구타와 폭언의 대물림이 이어졌다. 그 시절 선수로 뛰었던 10명 중 7명은 “하도 매질을 당해 허벅지가 터져서 나중에는 바지도 제대로 못 입을 정도였다”는 기억을 갖고 있었을 정도. 맞을 때는 ‘난 커서 저런 선배는 되지 않을 거야’라고 속으로 분통을 터트리면서도 정작 본인이 선배가 되고서는 똑같은 방식으로 후배를 길들이는 군대식 문화가 체육계 전반에 자리 잡고 있었다. 송도라고 다르지 않았다. 전규삼이 오기 전까지만 해도 얼차려는 흔한 일이었다. 그러나 전규삼은 팀을 맡은 뒤부터 그런 선배들을 보고 넘기지 않았다. 지시하지 않은 기합이나 폭언이 발각될 때면 즉시 체육관에서 나가야 했다. 불같이 화를 냈다. “나는 선생님이랑 함께 한 내내 한 번도 맞은 적이 없어요. 그땐 몰랐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정말 고마운 일이었죠.” 유희형의 말이다.
--- p.75, 「농구하려면 성적표를」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