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분 자신의 이름을 위하여, 즉 그분 자신의 존재 및 성품과 일관되게, 여호와는 자기 백성을 모으고 깨끗하게 하시며, 철저히 마음을 수술하시고, 온전한 순종을 할 수 있도록 자신의 영을 주실 것이다. 신약에 나오는 위대한 복음의 표현도 이보다 더 감격을 주기는 어려울 것이며, 실제로 신약의 가장 귀한 이미지 몇 가지는 에스겔의 설득력 있는 표현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서론」중에서
하지만 그 순간의 놀라움을 그 무엇보다 잘 포착하는 한 단어가 있다. 그것은 ‘거기’라는 단순한 표현이다. 그 말은 위치를 강조함으로써, 묘사되는 것과 그 모든 것이 일어나는 장소를 대조시킨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거기’, 포로 생활과 부정함과 절망의 땅에서 나타나시고, 말씀하시고, 자신의 강한 손을 내밀고 계신다. 에스겔은 다른 포로들처럼, 십중팔구 하나님이 멀리 떨어진 곳에 계시다고, 혹은 좀더 정확히 말하면, 그들이 예루살렘 성전에 있는 하나님의 임재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하나님은 ‘거기’ 바빌론에 계신다! 얼마나 위로가 되는가!
---「1장 바퀴 안의 바퀴들: 에스겔의 소명 환상」중에서
에스겔의 말을 읽는 그리스도인 독자들이 구약의 이스라엘을 정죄하고 우리는 좀 낫다는 착각에 빠지려는 유혹에 굴복하기 전에, 신약에서도 하나님의 백성들이 짓는 죄는 하나님의 계시와 구원의 유익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의 죄보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더욱 악하다고 지적한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사실상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아들 자신의 말씀과 사역을 목격한 사람들은 훨씬 더 큰 특권을 누린 셈이기 때문에, 회개와 순종의 반응을 더 적절하게 보여야 한다.
---「2장 비운의 극장: 에스겔의 사역 첫해」중에서
성령이 과거나 현재의 우리 삶의 어떤 부분이 죄라는 것을 드러내 보여 준다면, 그것을 죄로 다루어야 한다. 포로들처럼 다른 사람들을 비난하거나 하나님을 원망하지 말라. 오늘날 너무나 많은 사람이 그러듯 그것을 설명하거나, 변명하거나, 진상을 규명하려고 하지 말라. 죄는 죄이며, 그것이 드러났을 때, 우리는 상호 배타적인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 회개하거나 아니면 마음을 완악하게 하는 것이다. “너희가 오늘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지어다.”
---「3장 영광이 떠나감」중에서
선물을 주신 하나님 자신을 신뢰하는 대신 그 선물을 신뢰의 대상으로 삼으려는 유혹은 역사 내내 하나님의 백성들을 어김없이 꾀어 왔으며 오늘날 많은 사람에게 여전히 치명적인 함정이다. 사실상 재능이 많을수록 이런 유혹은 더 커진다. 훌륭한 조직가들은 자신의 조직 능력을 신뢰하게 된다. 유능한 전도자들은 자신의 잘 갈고 닦은 기술을 의뢰하게 된다. 총명한 교사들은 정신적 민첩함과 집단을 다루는 기술을 신뢰하게 된다. 잘 돌보는 목사는 자신의 상담 기술이 사람들이 복을 받는 이유라고 믿게 된다. 그런 상황에서…하나님의 은혜를 가장 입증하는 바로 그것(그분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 하나님 대용품이 된다.
---「4장 역사에 대한 올바른 태도」중에서
우리는 지금까지 에스겔서에 관해 연구하면서 하나님의 기쁨을 듣고 느낄 기회가 거의 없었다. 전능자의 마음에 기쁨을 주는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얼굴에 미소가 번지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천국의 모든 종을 울리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예수님이 우리에게 그 대답을 주지 않으셨는가?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에스겔 18장이 의도한 바는 하나님의 백성 전체에게, “왜 내가 죽는단 말인가?”라고 질문하면서 돌이켜 집으로 돌아옴으로써 포로 생활과 하나님에 대한 반역이라는 무덤에서 돌아오라고 촉구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동일한 부르심이 수십 세기에 걸쳐 우리에게까지 이어져 내려온다.
---「5장 바울의 독특한 특권」중에서
포로 생활은 마침표는 아니었다. 그것은 쉼표,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의 이야기의 거대한 흐름에서 잠깐의 휴식, 잠깐 멈춤이다. 역사는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맞이하고 있었다. 여호와는 과거의 하나님이신 것만큼이나 미래의 하나님이셨기 때문에 소망이 있었다.
---「6장 전환점」중에서
그것은 마치 모든 사건을 마치 하나님이 끈으로 조종하듯 조종하시는 것처럼 생각하는 순전한 숙명론과는 다르다. 성경은 인간의 자유와 책임을 충분히 발휘할 기회를 부여한다. 사람들과 나라들은 자신들이 계획하는 것을 계획하고 자신들이 행하는 것을 행하며, 언젠가 자유를 그렇게 행사한 것에 대해 하나님께 책임을 질 것이다. 하지만 그 모든 것 배후에서 또 그 위에서, 우주를 창조하신 분의 신비한 자유와 주권이 역사한다고 성경은 분명하게 단언한다. 그분의 목적들은 궁극적으로 폐기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분의 주권적 권세는 사람들이 행하는 악마저도 선한 목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
---「7장 “그런즉 열국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중에서
그러므로 예수님의 부활은 이스라엘의 회복을 개인적으로 구현함으로써 에스겔의 환상을 실제로 성취했다. 하지만 앞에서 말한 요점에 맞게, 예수님을 통해 이스라엘이 회복된 것은 또한 인류의 구속이라는 하나님의 더 광범위한 프로젝트의 첫 단계이기도 했다. 죽은 자에게 생명을 불어넣어 준 그 생기는 ‘사방에서’ 왔다. 즉 하나님의 영은 세계 모든 곳에서 모든 방향에서 역사하신다.
---「8장 에스겔 복음」중에서
신약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성전이라는 이미지를 그저 예수님 자신에게만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사용한다. 이것 역시 에스겔의 환상과 연결되어 있다. 그 환상은 결코 단순히 물리적인 건물을 재건하는 문제가 아니라, 언제나 본질은 하나님 백성의 회복을 포함한 것이다. 바울은 유대인과 이방인에서 나온 하나님의 새 백성이 창조된 것을 경축하면서, 구약에 나오는 ‘집’의 의미를 이중으로 해석하여 하나님의 권속 혹은 가족을 의미하는, 동시에 하나님이 자신의 성령에 의해 거하시는 성전 건물을 의미하는 것으로 본다.
---「9장 세상에 계시되었으며 자기 백성에게 회복된 하나님의 영광」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