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점시대의 여성, 정말 가시밭길을 걸어야 했다. 수원 출신 나혜석은 오빠 나경석의 도움으로 일본 유학을 실행할 수 있었다. 신여성의 표상은 이렇게 하여 얻게 되었다. 도쿄 유학생 사회에서 나혜석은 빛나는 꽃이었다. 재학 시절, 그는 소월(素月) 최승구와 열애를 했다. 그들은 약혼부터 공포하고 연애하기 시작했다. 조혼 제도가 성행했던 당시의 사회 풍습에 따라 남자 유학생들은 대개 기혼자였다. 최승구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사랑의 불꽃을 뜨겁게 태웠다. 하지만 최승구는 결핵으로 요절했다. 나혜석에게 발광의 시간을 안긴 사건이었다. 나혜석은 자신의 삶을 ‘사건’의 연장선상에서 살았다고 회고했을 정도였다.
--- 「파격을 그린 화가와 저항시인_ 나혜석과 최승구의 비련」 중에서
백석, 그는 현역시인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으로 뽑을 만큼 인기 시인이다. 북방 정서 혹은 농촌 정서를 시세계의 바탕에 깔고 『사슴』과 같은 개성적인 시집을 펴낸 시인이다. 백석은 1939년 말 조선일보사 출판부의 『여성』 잡지사를 퇴직하고 만주로 떠났다. 일종의 탈출이었다. 그런 백석이 만주에서 절친했던 친구인 화가 정현웅을 생각하며 시 한 편을 썼다. 바로 문제의 시, 〈북방(北方)에서-정현웅에게〉이다. 백석 시 가운데 특정인을 거명하면서 쓴 헌시로는 유일한 예에 속한다.
백석의 시 세계, 그것도 심각한 시 세계를, 공유할 수 있는 친구 사이, 여기서 정현웅과 백석과의 관계를 새로운 각도에서 살피게 한다. 그만큼 이들은 시인과 화가의 입장에서 예술세계를 호흡할 수 있는 돈독한 사이였다.
--- 「북방에서 친구에게_ 시인 백석과 화가 정현웅의 동행」 중에서
정해년 불탄절에 김용준은 김환기의 집에 놀러 갔다. 거기서 김용준은 〈수화 소노인 가부좌상〉(1947)이라는 제목의 김환기 전신 초상화를 그렸다. 즉석 휘호, 키다리 김환기의 앉아있는 모습, 경쾌하게 묘사되어 있다. 나는 이 그림을 1980년대 뉴욕의 김향안 아파트에서 본 적이 있다. 그날따라 향안 여사는 두루마리 족자 그림을 펼치면서 ‘근원 그림’이라고 했다. 당시만 해도 월북화가에 대해서는 내놓고 언급할 수 없는 때여서 이 같은 새 자료를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이야 이 그림은 환기미술관 등에서 대중 공개되어 별다른 긴장감을 주지 않는다. 기념비적 작품이라 한다면, 근원의 또 다른 작품 〈수향산방전경〉(1944)을 주목하게 한다. 이 작품은 선묘 중심의 집 마당에 서 있는 수화와 앉아있는 향안 그리고 나무와 괴석 등이 있는 뜰을 그린 것이다. 수화와 향안의 집이라는 뜻의 수향산방, 근원은 작정하고 수화 향안 부부와 산방의 앞뜰을 그렸다. 추억어린 장면이지 않을 수 없다.
--- 「유화 붓의 문인화_ 김용준과 김환기 그리고 노시산방」 중에서
박완서의 등단소설에 나오는 ‘간판쟁이’ 화가 옥희도는 바로 박수근을 일컫는다. 다만 박완서의 주장처럼 소설 속의 옥희도 이야기는 단순 허구이지 현실 속의 실화는 아니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소설 『나목』을 통하여 전쟁기의 미군 상대 초상화 제작 환경과 화가 박수근에 대한 이해도를 넓힐 수 있다.
박완서와 박수근, 미8군 PX에서 인간적으로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이들은 퇴근길에 다방을 자주 들르기도 했고, 명동 노점상에서 장난감 구경을 즐겼다. 길에서 군밤이나 호콩을 사 먹으면서 전차 정류장까지 걷기도 했다. 당시 1952년의 서울은 전운이 감도는 최전방 도시였다. 박완서의 기억 속에 박수근과 함께한 계절은 겨울 풍경만 남아 있었다. 바로 나목의 계절이었다. 살벌하게 보이던 겨울나무가 늠름하고 정겹게 비치는 풍경, 바로 박완서가 박수근을 그린 나목의 세계였다.
--- 「궁핍한 시대의 진정성_ ‘나목’을 닮은 박수근과 박완서」 중에서
김지하는 고등학생 시절의 오윤을 처음 만났다. 오윤의 친누나 오숙희가 서울대 미술대 재학생이었고, 마침 미학과 학생이던 김지하와 가깝게 지낸 덕분이었다. 김지하의 기억에 남은 오윤의 첫인상. 장소는 쌍 문동 오윤의 집이었고, 거기에 오윤의 그림이 있었다. 그 그림은 “붉은 노을 속에 꿈틀거리는 몇 개의 민둥산 구릉이 마치 거대한 여인의 젖가슴이었다. 우주적 육욕, 장소의 관능, 공간의 리비도였다. 그것은 목신의 ‘몸’이었다. … 쉽게 말해 ‘프랙탈’이었고 갈증으로 허덕이는 무한 육욕과 기이하게도 거기에 동반한 슬픔, 한과 함께 뜬금없는 아우라가, 신바람이, 그래서 옛 굿에서나 나타났을 법한 큰 흥이 솟아나 섞여서 가득히 퍼지고 있었다.” 김지하의 오윤 그림에 대한 의미부여 치고 너무 과도한 정도가 아닐까. 아니, 이와 같은 찬사는 ‘눈부신 초신성의 폭발’이니, ‘캄캄한 시원의 블랙홀’로 발전됐다.
--- 「신명 속의 낮도깨비_ 민중화가 오윤과 김지하」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