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도사 극락암 누각에는 ‘정법안장(正法眼藏)’이라고 쓰인 현판이 있다. 필자가 극락선원에서 정진할 때 ‘정법안장(正法眼藏)’이라는 법문은 참선 수행과 선학연구의 중심과제가 되었다.
어느 날 조계종 종정이신 서옹(西翁)스님의 『임제록(臨濟錄)』을 읽고, ‘정법안장(正法眼藏)’이라는 말에 궁금증을 가지고 있었던 나는 도반인 임조스님의 인연으로 서옹스님을 친견하게 되었다.
서옹스님을 뵐 때마다 정법안장과 선(禪)에 대하여 여러 가지 질문을 드리니, 스님께서 일본에 가서 선어록 공부를 하는 것이 좋겠다고 권하셔서 바로 일본 유학을 결심했다. 서옹스님께서 일본에 오시면 격려와 칭찬도 아끼지 않으시고 물심양면으로 후원도 넉넉히 해 주셨다.
필자가 일본 코마자와(駒澤)대학에서 선불교의 역사와 어록을 체계 있게 공부할 수 있었던 것은 나에게는 더없이 좋은 계기였고, 그 바탕을 초석으로 지금까지 선학과 선어록 연구에 매진할 수 있게 되었다.
『선종의 전등설 연구』(민족사, 2010)에 수록한 "선종사 연구 방법론 序說"이라는 글에서 밝힌 것처럼, ‘전등록’이나 ‘어록’, ‘비문’ 등의 기존자료를 정리하는 것만으로는 객관적이고 비판적인 학위논문의 연구과제가 될 수 없다고 판단하여 새로운 연구 방법론을 개발하려고 많은 연구 서적을 읽고 분석했다.
예를 들어 선종사의 자료에 달마대사가 150살까지 살았다는 전설 같은 생애나, 양무제와 만나 뜻이 계합되지 않아 양자강을 건너 숭산에서 9년간 면벽하고, 혜가(慧可)에게 정법을 전했다는 이야기 등 비역사적인 자료만으로는 객관적이고 역사적인 선종사를 연구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선종사의 모든 자료를 성립 연대순으로 정리하고, 작자(作者)가 시대적인 요청으로 선종 관계의 자료를 만들어야 할 필요성과 문제점을 분석, 비판하면서 작자(作者)들이 만든 선종사 연구 방법론을 개발하였다.
이러한 연구 방법론으로 박사학위 논문인 『中國禪宗의 成立史 硏究』(민족사, 1991)를 제출했고, 코마자와(駒澤)대학 대학원 박사과정을 수료함과 동시에 과정박사 제5호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필자가 선어록과 『종용록』을 공부하게 된 인연은 일본 코마자와대학 가가미시마(鏡島元隆)선생의 『천동굉지광록(天童宏智廣錄)』 세미나에 참석하면서였다. 『굉지송고(宏智頌古)』 100칙과 게송의 법문을 참구하면서 여러 주석서와 선승들의 평창을 읽고 사유하며, 그 후 40여 년 동안 정리하여 오늘에 『종용록 강설』(8권)을 출간하게 되었다.
만송선사의 『종용록』 과 원오극근선사의 『벽암록』 은 많은 제불 보살들과 선승들의 법문, 선시(禪詩), 게송, 선사상의 진수(眞髓)를 제시하고, 정법의 안목으로 비평하고 강설하며 불법의 대의를 깨닫도록 설법한 선의 고전이다.
정법의 안목을 구족한 선승들이 선문답으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선기(禪機)의 지혜로 대결한 무대이며, 불법의 대의(大義)와 정법의 안목을 참구하는 구법, 구도의 현장을 생생하게 전하는 설법도량이다.
『종용록』과 선어록을 공부하는 일 역시 시공(時空)을 초월하여 제불 조사와 수많은 선승들을 친견(親見)하고 선기(禪機)의 지혜로 대화하며, 부처나 조사도 초월[超佛越祖]하여 걸림 없이 선의 종지(宗旨)를 탐구하는 구도행(求道行)이다.
필자는 다음과 같은 글들을 기록해 놓고 수시로 읽으면서 시간을 아끼고 학문에 전념할 수 있도록 자신을 경책했다. 아마도 이 생활습관 덕분에 지금까지도 연구에 매진할 수 있는 것 같다.
* 출가인이 불법 공부하는 본분사의 일을 하지 않는 것은 정법의 안목과 지혜와 자비심이 없어 죽은 사람이다. 어차피 죽을 바에야 불법(佛法) 공부와 선학연구를 하다가 죽는 것이 낫다. 내가 선학을 연구하려면 잡다한 일을 모두 포기하고, 세간의 인연을 끊고 오로지 연구실에서 학문 연구에만 몰입해야 한다.
* 내가 지금 여기서 걱정해야 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오로지 선학연구에 도전하고, 최선을 다하여 노력하는 천재(天才)가 되자.
* 수행자는 경전과 어록을 읽고 시공을 초월하여 제불 조사들과 대화하며, 법희선열(法喜禪悅)의 법락(法樂)을 이루는 참선공부를 해야 한다.
* 현명한 사람은 홀로 고독한 경지에서 무심(無心)하고 무사(無事)하게 ‘지금 여기, 시절 인연에 따른 자기 본분사의 일로 학문을 탐구하는 일’ 뿐이다.
* 나는 억지로라도 연구실에서 경전과 어록을 읽고, 학문 연구에 몰두해야 한다.
* 나무가 그 열매로 인하여 세상에 알려지는 것처럼, 나는 학문 연구과 논문의 성과로 회향하는 보살이 되겠다.
* 인간은 타고난 재능의 천재성(天才性)보다 지혜를 탐구하는 구도적인 발심수행으로 구태(舊態)의 사고를 탈피하는 자기 변화와 혁신의 노력이 필요하다.
필자는 경전과 어록의 중요한 항목을 카드로 자료 정리하여 내용별로 분류하고, 선학연구의 기본 자료로 활용하고 있다. 자료를 작성하는 일은 많은 시간과 독서의 흐름에 장애가 되기도 하지만, 카드를 작성하는 일은 사경(寫經)과 정념으로 불법을 사유하는 참선 수행이 된다.
또 카드 분량이 많아지면 분류하고 정리하는 어려움도 있지만, 그 과정을 통하여 경전이나 어록에 설한 방편법문의 내용과 의미를 깊고 넓게 이해하고, 내용별로 분류하는 일 역시 중요한 공부가 된다. 같은 내용의 카드 자료를 활용하여 방편법문의 다양성과 불법의 대의를 넓고, 깊게 정념(正念)으로 사유하는 것을 ‘T字形’의 연구방법이라고 한다. 불법(佛法) 수행은 다름 아닌 경전과 어록에서 설한 제불 여래의 방편법문을 수행하는 일이다.
『금강경』에도 경전의 법문을 수지, 독송하고, 여법하게 사유하면 곧 여래가 된다고 설한 것처럼, 경전과 어록의 법문을 사유하는 일이 참선 수행이며, 제불 보살과 조사들과 지음(知音) 동지로서 진여일심의 지혜로 참구하며, 선기(禪機)의 지혜로 대화하는 본분사의 일이다.
『종용록』 100칙과 수시(垂示), 게송, 평창(評唱) 법문에는 대승경전의 중요한 법문들을 뛰어난 안목을 구족한 선승들이 독자적인 선기(禪機)의 지혜로 다양하게 설법하고 있다.
현대의 참선수행자들도 제불 조사들이 설한 선기의 지혜법문을 참구하면서 법희선열(法喜禪悅)의 법락(法樂)을 함께 할 수 있는 인연이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끝으로 대구 보현회 강의실과 연구실을 제공해 주신 法演(박근홍)거사와 『종용록』 강의 동영상을 담당한 박성현 실장, 『종용록 강설』 교정을 해주신 慧園行(박주원) 보살님께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그리고 『종용록』 공부에 동참한 慈行스님, 智鎬스님, 慧明스님, 眞應스님, 濟明(이병제), 妙覺(허만욱), 道明(강호룡), 月照(심근식), 普行(정우형), 海潮音(황갑석), 法行(이원무), 發心(박중근), 道閑(박인규), 최종성, 大圓覺(조규희), 慈德華(정병님), 舍利子(김미자), 吉祥定(염숙희), 慈善華(강향분), 慧園行(박주원), 眞如心(김명희), 蓮華行(박태자), 多寶華(이현숙), 能仁行(이경희), 김은주 등 여러 不請之友 도반들께도 佛恩이 함께하기를 기원한다.
** 『종용록』 100칙 동영상 강의는 한국선문화연구원 앱과 유튜브로 시청할 수 있다.
불기 2565(2021)년 4월 5일
自安禪堂에서 鄭 性本 씀
---「서문」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