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우리는 또 다른 역사의 분기점에 서 있습니다. 100여 년 전 선열들이 불굴의 의지와 뜨거운 열정에도 불구하고 미처 해결하지 못한 많은 과제들은 무엇일까요? 이제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할까요? 또 100년 뒤 우리 후손들은 우리를 어떻게 바라볼까요? 늘 들어 왔던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법고창신法古創新을 다시 떠올리는 가운데 오늘을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는 독자들과 더불어 3·1운동 100주년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이하고 싶습니다. 100년 전 선열들의 우렁찬 목소리가 우리의 귓가에 쟁쟁하기 때문입니다.
--- p.9, 「머리말」 중에서
김옥균을 비롯한 급진 개화파 인사들은 청의 내정간섭과 청에 의존하는 조선 정부의 사대 방침에 반발했습니다. 1882년 박영효가 임오군란을 처리하기 위해 일본에 수신사로 가게 된 뒤부터 이들의 활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됩니다. 김옥균, 서광범 등도 이 사신 행렬에 동행했습니다. 박영효 일행은 일본에서 융숭한 대접과 함께 임오군란의 배상금 탕감이라는 선물을 받습니다. 또한 이들은 일본의 대표적인 문명개화론자인 후쿠자와 유키치를 만난 뒤, 그의 지원 약속을 받고 일본의 문명개화론을 수용하게 됩니다. 이 선택이 그들을 온건 개화파와 갈라지게 하는 결정적인 계기였습니다.
--- p.61~62, 「3장 김옥균, 혁명가인가 반역자인가?」 중에서
청은 시모노세키조약에 따라 조선의 ‘독립’을 공식적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조약에 명시된 ‘자주독립’이라는 표현은 청을 대신해서 일본이 지배하겠다는 뜻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청일전쟁이 시작됨과 동시에 일본은 ‘조일잠정합동조관’을 체결해 경부선과 경인선의 철도부설권 및 군용전신선 관할권 등의 이권을 일본에 양도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그리고 ‘조일공수동맹조약’이라는 것을 체결해서 조선이 일본의 동맹국으로서 일본군의 이동과 식량 준비 등을 위한 편의를 제공하도록 했고, 일본 고문관과 군사교관을 조선 정부 내에 배치한다는 약속을 조선 정부로부터 받아 냈습니다. 이러한 조치는 모두 조선을 보호국으로 만드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법적 근거를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 p.127, 「6장 청일전쟁, 누구를 위한 전쟁이었는가?」 중에서
우선 왕비를 부르는 공식 명칭에 대한 문제부터 풀어 보겠습니다. 조선 시대의 왕비를 지칭하는 명칭은 바로 ‘왕후’입니다. 숙종 때 장희빈과 대립했던 인현왕후나 영조의 어린 아내이자 정조의 할마마마로 유명한 정순왕후에서 그 명칭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왕후의 명칭 뒤에 성을 붙여서 인현왕후 민씨, 정순왕후 김씨 등으로 부르기도 합니다. 그래서 조선왕조의 전통에 따르게 되면 고종의 아내는 ‘명성왕후’ 또는 ‘명성왕후 민씨’가 가장 자연스러울 것입니다.
--- p.164, 「8장 명성왕후는 왜 비극적인 운명을 맞이했는가?」 중에서
한·청·일 동아시아 삼국이 세계 질서에 편입되는 과정에서 식민지·반식민지·제국주의로 그 운명이 갈라진 이유에 대해서는 오랫동안 논쟁이 진행되었습니다. 이러한 차이가 발생한 까닭이 각 국가의 내부 역량 차이라고 주장하는 견해와, 국제 질서에 편입되는 과정에서 세 나라에 가해진 외압의 차이라고 주장하는 견해로 나뉘어 서로 치열한 논쟁을 벌였습니다. 1960년대에 어느 일본 학자는 이를 ‘30년간의 논쟁점’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러나 이 논쟁은 아직까지 명확하게 해결되지 않았고, 21세기가 된 지금도 우리는 이 문제를 여전히 마주하고 있습니다. 이 문제가 일본에서 처음 제기되었던 때를 고려하면 조만간 100년을 바라보게 되고, 광무개혁 논쟁이 시작된 1976년을 기준으로 보더라도 40년을 훌쩍 넘겼습니다. 이 논쟁은 과연 해결이 가능할까요? 만약 해결될 수 없는 문제라면 우리는 이 논쟁을 통해 무엇을 얻어야 할까요?
--- p.261, 「12장 고종, 현명한 군주인가 어리석은 군주인가?」 중에서
원래 장지연은 이토의 열렬한 지지자였습니다. 1902년 『황성신문』 사장에 취임한 후 한·청·일 삼국이 연대해서 서양의 군사적·문화적 침략에 대응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개신 유학자로서 1898년 이후 청이 서구 열강에 분할되는 과정을 지켜보며 그는 현실적인 대안을 찾고 싶어 했습니다. 그래서 장지연은 가장 부강한 일본을 중심으로 황인종 삼국이 뭉치면 백인종의 침략을 능히 막아 낼 수 있다는 이토의 동양 평화론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게 되었고, 『황성신문』을 통해 동양 평화론을 널리 전파시켰습니다.
--- p.343, 「17장 대한제국의 언론은 국망의 위기와 어떻게 싸웠을까?」 중에서
이후 의병 운동의 성쇠 여부는 이러한 신분 문제를 어떻게 극복하는가가 관건이었습니다. 이에 한말 의병 전쟁의 시기를 나눌 때 의병들이 봉기했던 연도를 기준으로 흔히 을미의병·을사의병·정미의병 등으로 구분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이러한 시기 구분은 의병이 언제 일어났는지 파악할 때는 유용하지만, 의병 전쟁의 성격과 변화 과정을 제대로 보여 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연대기로 분류하는 것보다 이 의병 전쟁을 ‘전기’와 ‘후기’로 나누어 의병 활동의 변화와 연속성을 유기적으로 파악할 필요가 있습니다. 의병 운동을 전기와 후기로 구분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1895년 전후 일어난 의병 활동은 아관파천으로 사실상 종료되기 때문에 이후 의병이 다시 등장할 때까지는 무려 7년이라는 공백이 존재한다는 점입니다. 또한 두 시기는 의병이 봉기했던 정치적 환경이 달랐을 뿐만 아니라 의병 운동의 주도 세력과 참가층의 구성에서도 큰 변화가 나타났습니다.
--- p.380, 「19장 의병 전쟁은 어떤 유산을 남겼을까?」 중에서
고종은 헤이그 특사 사건으로 인해 곤경에 처했고, 통감부와 친일 내각의 ‘가짜 양위식’으로 강제 퇴위되었습니다. 우리가 역사 수업을 통해 알고 있는 고종의 활동은 여기까지입니다. 그러나 강제 퇴위 후에도 고종이 후기 의병을 적극 독려하고 지원한 사실이 통감부 문서에 자세히 전해집니다. “궁중의 잡배들이 (황제의) 밀칙을 받들고 재야의 야심가와 비밀히 공모하여 각 방면에서 종종의 운동을 하고 있다. …… 또 잡배들을 끌어들여 의병을 선동하여 음으로 일본에 반대 행위를 하였다.”에서 볼 수 있듯이, 고종은 밀칙으로 의병을 일으키고 활동 자금을 지급해 그들을 후원하면서 후기 의병의 전국적인 활동을 배후에서 지원했습니다.
--- p.404, 「20장 고종은 왜 헤이그 특사라는 승부수를 던졌을까?」 중에서
순종의 병합 조칙이 공포되었던 8월 29일에 서울을 비롯한 전국에서 별다른 반응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을사늑약이나 정미7조약 때와 대조적으로 전국이 조용했던 까닭은 선동자 한 사람도, 선동 문자 한 구절도 나오지 못하도록 데라우치가 지휘하는 통감부가 철저하게 막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일제는 강제 병합에 대한 국제적인 비난이 나타날 것이 두려워서 군대와 경찰을 총동원해 항일 의병을 철저하게 진압했고, 애국계몽운동을 이끌며 국권 수호를 외쳤던 애국 인사들을 미리 투옥하거나 협박했습니다. 게다가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서 언론·결사·집회·출판 등의 모든 자유를 박탈해 강제 병합이 어떻게 진행되는지조차 철저하게 비밀에 부쳤습니다. 국치 당일의 고요는 철저한 은폐의 결과였습니다.
--- p.442, 「22장 경술국치 당일은 왜 조용했을까?」 중에서
1910년대 국내 독립운동의 또 다른 특징은 참여하는 계층의 저변이 점차 확대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비밀결사나 의병에 참여했던 유생·군인·지식인 외에도 학생·농민·노동자층의 항일 의식이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교사와 학생으로 구성된 비밀결사의 경우, 일제의 민족 교육 탄압책에 저항하면서 항일 민족의식을 더욱 고양시켜 갔습니다. 협성학교의 ‘학우회’, 숭의학교와 기전학교의 ‘송죽형제회’, 경성고등보통학교의 ‘조선물산장려계’, 숭실학교의 ‘조선국민회’ 등 학생들이 결성한 비밀결사들은 교육을 통해 민족의식을 키우는 일에 앞장섰으며, 자금을 모아 독립운동을 후원하는 활동에도 적극적이었습니다. 또한 농민들은 토지조사사업으로 경작권을 빼앗기고 지주제 강화로 생존마저 위태로워지자 저항에 나섰습니다. 처음 농민들의 저항은 자연스럽게 경제적인 어려움을 해결해 달라는 수준이었지만, 1910년대 후반부터는 주재소·세무소·면사무소 등 일제의 통치기관을 습격할 정도로 정치적 색채가 강해졌습니다.
--- p.521, 「26장 식민지 조선에서 우리는 어떻게 싸웠을까?」 중에서
3·1운동의 출발은 파리강화회의나 고종의 국장 등 특정한 계기에서 비롯되었지만, 이 운동이 한반도 전역에서 장기간 지속되고 전 계층이 동참할 수 있었던 까닭은 일제와 맞서 싸웠던 1910년대 국내외의 모든 조직이 간직한 내적 역량 때문이었습니다. 초기에 만세 운동을 주도했던 종교인과 학생 들의 영향력이 점차 약해지면서 농민과 노동자 들이 시위를 주도해 갔고, 마지막 단계에서는 어부·장꾼·지게꾼·인력거꾼·기생·거지 등 전 계층이 모두 참여하는 단계로 나아갑니다.
--- p.558, 「28장 무엇이 3·1운동을 ‘세계적인 경이’로 만들었는가?」 중에서
3·1운동이 혁명으로 평가되었던 것은 중국인의 평가나 5·4운동과의 연계성 때문만이 아닙니다. 3·1운동의 과정과 결과는 모두 혁명적 특징을 분명하게 보여 주었습니다. 3·1운동은 이념과 계급의 차이를 초월해 전 민족이 함께 전개한 항일운동이었고, 황제와 지배층이 지켜 내지 못한 나라를 민중의 힘으로 되찾겠다는 자각을 통해 민중이 역사의 주체로 떠오르게 한 사건이었습니다. 그리고 고종의 서거와 함께 시작된 이 운동을 통해 한국인들은 왕국이나 제국이 아닌 ‘민국’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공감대를 형성했고, 이것이 공화주의에 입각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하는 토대를 형성했습니다. 3·1운동을 통해 한국사에서 최초로 인민의 평등과 자유를 보장하는 주권재민의 근대 국민국가를 출범시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 p.570, 「29장 대한민국은 언제, 어떻게 탄생했는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