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면 분더카머는 개별 소유주의 독특한 취향과 정신 세계를 반영하고 극화한다. 분더카머의 가치를 찾을 수 있다면, 당대인의 계급적 권력과 재력이 뒷받침되어야 하긴 했지만, 외부 세계에 편재한 각종 감각적 대상들을 향한 인간의 애호심과 백과사전적 앎의 의지를 입체적으로 표상하고 가시화하기 때문이다. 신의 피조물을 공중으로 드높이고 인간의 작품을 땅 가까이 낮추었다 할지라도, 일견 단순한 것에서 더 복잡하고 희귀한 생명 현상의 증거와 형태를 나타내는 것으로 분류했다 할지라도, 너무나 인간적인 이 소우주 안에서는 이러한 단선적 체계를 부수어 날리는 회오리 흐름들이 항시 발생한다.
--- p.14~15
분더카머를 재해석하는 현대의 몇몇 예술가들에게, 그리고 나에게, 분더카머는 개별자가 세계와 상호작용하며 겪어온 고유한 역사와 기억의 진열실이자 마음의 시공간의 상징체다. 기억이란 대부분의 경우 그보다 훨씬 거대한 망각의 잔여물에 불과하다. 따라서 우리가 각자의 마음속에 지은 분더카머 안에는 결코 미적으로 높이 평가되는 예술 작품의 원형이나 고도로 완성된 지적인 사유의 언어가 저장되어 있지 않다. 오히려, 언뜻 보면 무가치한, 부서진, 깨진, 닳은, 기원과 이름을 모를, 무수한 말과 이미지의 파편들이 혼란스럽게 뒤섞여 공존한다.
--- p.19
라멜리는 자신의 책 바퀴가 유용하고 편리하다면 그것은 “한곳에서 움직이지 않고도 여러 권의 책을 보고 읽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미지와 텍스트를 넘나드는 이 모든 헛소동의 희열과 비애는 바로 이 문장에 기원한다. 이미 알아차린 사람도 있겠지만, 엄밀히 말해, 우리 각자의 신체의 다양한 차이를 고려할지라도 독서의 공간과 자세는 대부분 유사하다. 책 읽기는 신체 대부분을 한 장소에 고정시킨 채 안구와 손 양자를, 또는 둘 중 하나를, 조용히 규칙적으로 움직이며 하는 행위다. 독서 활동에서 다리는 문제시되지 않는다. 따라서 이 기계는 몸이 성한 사람은 물론이고 “거동이 불편하거나 통풍에 걸린 사람들”에게조차 딱히 특별한 도움이 되리라 기대할 수 없다. 독서 기계는 존재할 수 없다기보다는 존재할 이유가 없는 사물이다. 잉여다. 단 하나의 바퀴임에도 이미 다섯번째 바퀴다.
--- p.32~33
독서 기계의 이미지는 단지 드 만의 것만은 아닌, 언어에 관한, 그리고 언어에 생을 의탁한 인간 주체에 관한, 현대적 사유의 한 양상을 탁월하게 시각화한다. 돌고 도는 거치대와 그 위에 펼쳐진 무궁한 언어의 편린들은 그러므로 이미 비유다. 한 언어 안에 수줍고 조심스럽게 응축된 다른 언어의 가능성들이 섬세하고 사려 깊은 읽기 덕에 한꺼번에 화려하게 펼쳐지는 메타포이기도 하고, 고독한 한 언어 곁에 다른 언어들이 친구처럼 이웃처럼 인접하여 우애로운 공동체를 이루는 메토니미이기도 하고, 나의 말 곁과 속에 너의 말이 다가오고 들어서는 대화이기도 하고, 죽은 자의 말이 남은 자리에 꽃처럼 술잔처럼 눈물처럼 산 자의 말을 얹는 엘레지이기도 하다. 읽고 쓰고 만나고 영영 만나지 않아도 이야기하고 살아가고 죽는 우리가 공유하는 기억들이 각각의 칸마다 몽타주처럼 명멸하는 사진첩이자 영사기이기도 한 것이다.
--- p.37~38
가장 사랑하는 대상을 가장 진부한 말로 형용할 때의 무심함, 또는 난감함, 그러나 어쩔 수 없음. 이에 대해 바르트는 다음과 같이 변명한다. “아도라블: 사랑하는 존재를 향한 자신의 욕망의 특수성에 명칭을 부여하는 데 도달하지 못한 채, 사랑에 빠진 주체는 약간 바보 같은 이 단어에 귀착한다. 아도라블해!” […] 사랑이 “사랑해”의 동어반복을 피할 수 없듯, 나는 “adorable”을 그저 아도라블이라 번역하는 수밖에는. 동어반복을 피하기는커녕 이것이야말로 내 능력으로 가능한 최선의 번역이기에. 모든 번역은 결국 동어반복이기에. 검은 숲은 슈바르츠발트이기에. 번역이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이 경이로운 동어반복으로 우리는 타자의 언어를, 타자를, 사랑하게 되기에. 그리하여 마침내 생의 한 시점 그것을 향해 가고 그것과 있게 되기에.
--- p.106~107
첼란에게 시는 선물이다. […] 첼란에게 시가 생성되는 방식은 계시적 영감에 의해서도 아니지만 발명 같은 적극적인 기술의 사용에 의해서도 아니다. 그저 그에게 시가 오므로 그는 그것을 받는다. “나는 내가 쓴 것을 잘 받았습니다. (마찬가지로 받은 것을 잘 썼을 따름이지요)”라는 겸양은 그의 시작 방식을 함축한다. 이에 따르면, 선물 받은 시의 정식 사용법은 받아쓰기가 될 것이다. 내게 왔기에 들은 말을 종이 위에 옮기기. 말을 그것과 닮은 다른 말로 옮기는 번역은 받아쓰기의 한 형식이다. 시 선물의 수신자는 시의 겸허한 서기이자 번역인이 된다.
--- p.152~153
우리. 톤의 공동체. 그것은 공명이자 화음. 하모니. “아르모니아”는 오늘날 주로 음악 용어로 쓰이지만, 고대 그리스에서는 선박을 건조할 때 목재의 각 부분을 꼭 맞게 연결하는 조임새나 이음매 또는 그 도구와 방법을 뜻하기도 했다. 아르모니아는 톤에서 톤으로, 우리, 기호에서 기호로, 미완의 파편에서 상실 이후의 잔존으로, 말에서 다른 말로, 이행하며 너르게 연결한다.
「므네모시네」에서 아르모니아 역할을 하는 단어는 “그리고und”와 “그러나 aber”이다. […] 범상한 두 접속사는 그러나 횔덜린의 시에서라면 진술의 논리적 전개를 보장하는 순접과 역접 기능을 전혀 수행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자기 앞과 뒤에 놓인 말 조각들이 어떤 의미인지, 어떤 문법 요소인지, 어떤 시간성과 인과의 관계인지 거의 무심하다. 단지 언어 안의 균열을 조이고 심연을 메꾸는, 요원한, 과제에 충실할 뿐.
--- p.2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