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재앙’이나 ‘보이지 않는 위협’이나 일반인들은 인지하지 못하는 변화죠. 하지만 바꿔서 말하면 만약, 이 재앙이 일반에 알려질 경우, 정권이 무너질 정도로 충격이 클 겁니다.”
설인영의 대답에 공무원의 안색이 굳어졌다.
“야! 거, 현 정권에서 일하시는 분 앞에서 뭔 그런 말을 해?”
정우석이 주의를 주었지만 소설가들은 태도를 바꾸지 않았다.
“그래도 지금 포인트는 맞아요. 일단 ‘용’이 날고 ‘재앙’이 0 3 0
현실화하면, 정권에 큰 위협이 될 겁니다.”
그 뒤로 각자의 의견을 말하고 질문이 오갔지만 큰 진전은 없었다. 여자 공무원의 얼굴에는 미소가 돌아오지 않았다. 본인도 이를 느꼈는지 잠깐 억지로 웃어 보였지만 겨울바람 속에 굳은 과메기처럼 건조하고 딱딱했다.
“그럼 왜 굳이 한국일까요?”
“레메게톤 멤버들은 어쩌면 상징성이 강한 유물이나 미술품을 한국인들이 제대로 지키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윤보선 셰프가 조리를 하다 말고 소주희와 함께 부리나케 달려갔다.
“부르셨습니까?”
거만한 표정으로 입맛을 다시고 있던 기명진이 숨을 몰아쉬는 윤보선을 보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자네, ‘마리아주(mariage)’가 무슨 뜻인지 아나?”
“네, 알고 있습니다. 마리아주는…….”
“‘마리아주(mariage)’는 프랑스어로 ‘결혼’을 의미하지. 와인과 음식의 조화를 표현할 때 쓰는 말이야. 와인과 요리가 제대로 어울리기만 한다면 행복한 결혼처럼 최고의 즐거움을 선사한다는 뜻이지. 그런데…….”
기명진은 뜸을 들이며, 아무 말도 못 하는 윤보선 셰프 앞에 연어가 담긴 접시를 밀어 보였다.
“우리한테 기가 막힌 화이트와인을 주고는 전채로 이런 연어를 주다니, 이게 맞는 궁합인가?”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습니다.”
윤보선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생선요리에는 화이트와인, 육류요리에는 레드와인이 기본적인 마리아주라고 알고 있는데요.”
“기본은 그렇지. 하지만 여기 연어를 잘 봐. 신선한 맛을 살리려고 훈제 향이 없는 생연어를 그대로 사용했지? 어종은 아마 북해도산 홍연어를 쓴 것 같은데?”
“네, 맞습니다.”
윤보선은 깜짝 놀랐다. 소문으로만 들었던 맛 귀신, 기명진의 실력을 직접 눈으로 보니 감탄만 나왔다. ‘어떻게 보기만 하고서 연어의 산지를 알지?’
“바로 그게 문제야! 이런 회 같은 생선은 오크통에 숙성시킨 강한 향의 와인과 같이 먹으면 비린내가 심해져! 신선한 생선은 가벼운 와인과 같이 먹어야지! 그런 거, 학교에서 안 배웠나?”
먼저 향기를 음미하고 포크로 슈크루트에 들어간 소시지를 찍어 올려 조금 베어 문 기명진이 천천히 씹으며 맛을 음미했다. 윤 셰프와 소주희가 어떤 찬사가 나올지 기대하며 그를 지켜보았다.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육즙을 삼키던 기명진이 입으로 냅킨을 가져갔다. 그러더니 갑자기 밭은기침을 했다.
“켁!”
어디가 잘못됐는지, 그는 갑자기 목을 부여잡고 ‘켁켁!’ 대기 시작했다.
“케엑! 켁!”
안으로 들어간 것을 다시 뱉어내려고 애쓰는 것처럼 보였다.
“어?”
“왜 그래, 오빠?”
피가 쏠려 얼굴이 시뻘겋게 된 기명진이 입안에 들어 있던 음식물을 뱉어냈다. 하지만 그는 계속해서 기침을 해댔다. 이상을 느낀 윤 셰프가 당황한 나은정에게 물었다.
“선생님한테 음식 알레르기 있어요?”
“아, 아뇨. 그런 말은 못 들어봤는데.”
“선생님! 선생님!”
목을 부여잡고 괴로워하던 기명진이 이내 의자 채로 벌렁 뒤로 넘어지며 바닥에 엎어졌다. 나은정이 너무 놀란 나머지 비명을 지르며 벌떡 일어났다. 혹시 음식이 기도로 넘어갔나 하고 입을 벌려 살펴봤지만 막힌 것 같지는 않았다. 그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기명진의 몸을 뒤에서 끌어안고 힘껏 조였다 풀기를 반복했다. 하임리히법이었다. 하지만 그의 노력도 헛되게 기명진은 몸을 부르르 떨더니 이내 움직임을 멈추고 축 늘어져버렸다.
“물론 그럴 수도 있습니다. 지금은 그저 추론일 뿐입니다. 이 펜의 그림을 비익조라고 보는 이유는 하나가 더 있습니다. 바로 이 펜이 파란색이라는 사실입니다.”
“그게 뭐 이상해요? 파란색 펜은 많은데?”
“그렇죠. 맞습니다. 그런데 여기 반쪽 새가 그려진 끝부분을 보면…….”
김건이 사진을 더 크게 확대해서 보여주었다.
“파란색에 빨간색 깃털이 섞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말대로 만년필에 그려진 새는 반쪽짜리 몸통의 접합 부분이 빨간색으로 되어 있었다.
“우리나라의 전통사상에서 빨강은 양, 파랑은 음을 상징하죠. 전통혼례에서도 신랑신부의 예복은 주로 이 두 가지 색을 씁니다. 예복에서는 신랑이 파란색, 신부가 홍색을 입습니다. 음양의 화합을 상징하는 거죠. 그래서 이런 추론도 가능합니다. 나은정 씨는 비익조의 의미를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만년필은 나은정 씨가 선물한 것이 아닙니다. 그렇죠?”
“그래요.”
“나은정 씨, 혹시 질투가 심한 편인가요?”
난데없는 질문에 나은정이 얼굴을 찌푸렸다.
(…)
“알겠습니다. 계속하죠. 친구가 비익조가 그려진 펜을 기명진 씨에게 줬다고 했죠? 그 ‘친구’는 비익조의 한 새만 그려진 만년필을 기명진 씨에게 줬습니다. 그 친구가 여자라면 다른 의미가 됩니다. 그건 반대쪽 비익조가 다른 여자라는 뜻이니까요. 아니면 그 친구 자신이거나. 그렇다면 여기서 문제가 생깁니다. 나은정 씨는 질투가 심한 편이고 비익조가 뭔지를 아는데 이 펜을 보고 그냥 넘어갔을 리가 없죠. 그런데 가만히 있었다? 이건 한 가지 사실만을 의미합니다. 바로 나은정 씨가 만년필의 다른 쪽을 가지고 있는 겁니다!”
“드디어 찾았어요! 내가!”
“회장님! 그게 뭡니까? 그리고 거기 어디예요?”
“이건, 바로 ‘The Gate of Solitude, 고독의 문’이에요!”
“고독의 문요? 그게 뭔데요?”
“그건…… 바로……도…….”
바람 소리가 강해지며 통화품질이 더 안 좋아졌다.
그때였다. 갑자기 화면 안에 불빛이 반짝이고 개 짖는 소리와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안 돼! 그……들이…… 왔어!”
이철호 회장이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 시간이 없…… 여기는…….”
다음 순간 몇 발의 총성이 울리고 ‘억!’ 하는 소리와 함께 화면이 어두워졌다. 휴대폰을 떨어뜨렸는지 화면에는 눈 바닥만 보였다.
“회장님! 어떻게 된 겁니까? 회장님?”
김건이 다급하게 불러봤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저……저기!”
소주희가 화면을 가리켰다. 바닥을 비추던 카메라에 검은색 군화가 잡혔다. 그러고는 뒤이어서 한 발의 총성이 울리더니 신호가 꺼져버렸다.
“뭐야? 이게 어떻게?”
“회장님! 회장님!”
김건이 다급하게 불렀지만 그의 휴대폰 화면엔 ‘뚜뚜’ 소리와 함께 ‘통화종료’라는 글자만 떠 있었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