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듯이 잠잠한 사해와 유다 광야를 보며 예수는 아마도 갈릴래아의 온화한 봄을 떠올렸을 것이다. 하느님은 그러한 사람들에게 단지 분노하고 벌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일까? 하느님은 애처로운 삶을 영위하는 그들에게 사랑을 베풀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쿰란 공동체나 요한 세례자 공동체가 황량한 사해와 민둥산을 보며 분노의 하느님을 떠올렸다면, 예수는 그와 정 반대의 하느님을 생각했다. 바로 인간의 비애와 고통을 아는 사랑 그 자체이신 하느님을…….
---「사해 근처」중에서
예수가 사랑의 하느님에 대해 말한 이 갈릴래아 호수는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없는 사해 근처의 유다 광야의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사람들의 생활은 가난하고 비참하지만 이곳의 풍경은 온화하고 아름답다. 양 떼가 풀을 뜯는 완만한 언덕, 호수에 그림자를 떨어뜨리고 있는 키 큰 유칼리 숲, 그 숲에 바람이 스쳐 간다. 들판에는 노란 국화나 붉은 개양귀비 꽃이 만발해 있고 호수 저쪽의 수면에는 고기잡이배가 떠 있다. 삶은 이렇듯 애처로운데 자연은 아름답기만 하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예수의 이 말에서, 양팔을 벌리고 호숫가에 선 그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그 외침은 호수를 스치는 바람결에 실려 호숫가 근처의 가난한 마을과 부락에 전해진다. 그 소리를 들은 노인이나 여자, 절름발이, 소경이 어두운 집 안에서 나와 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갈릴래아의 봄」중에서
예수가 관심을 가진 것은 비참한 현실 속에 울고 있는 이들, 가난한 마을과 부락의 낡은 오두막에 사는 병자와 불구자들이었다. 예수는 그들을 보며 마음 아파했고, 연민과 사랑의 정을 느꼈다. 인간은 대개 아름다운 것과 매력적인 것에는 마음이 끌리지만, 추하고 더러운 것은 외면한다. 그러나 예수의 경우는 그 반대였다. 그는 오히려 사람들로부터 멸시받는 창녀나 나병 환자들에게 사랑을 느꼈다. ‘기적 이야기’에 등장하는 불행한 사람들, 그들의 고통이 무겁게 예수의 야윈 어깨를 짓누르고 있다. 그는 이때 이렇게 기도했을 것이다.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
그는 머지않아 십자가 위에서 외칠 시편의 이 구절을 바치며, 갈릴래아의 비참한 사람들을 위하여 수없이 간구했다.
---「첩자들」중에서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그의 음성은 양 떼가 풀을 뜯는 완만한 언덕, 그리고 호수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숲으로 퍼져 갔다. 숲속의 나뭇가지들이 바람결에 스치는 소리가 들렸고, 호숫가에는 붉은 개양귀비 꽃이 만개했고, 햇볕이 내리쬐는 잔잔한 물결 위에는 작은 배 한 척이 떠 있었다.
군중은 술렁거렸다. 그들로서는 자신들의 기대에 찬 외침에 대해 예수가 이와 같은 의외의 말을 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제까지 그들에게 영향을 미쳐 온 랍비 전통의 유다교의 경우, 사랑이라는 관념을 결코 무시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을 최고의 가치로 하여 신앙을 북돋아 주지는 않았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 ‘온유한 사람’, ‘우는 사람’, ‘착한 사람’을 이렇게 높이 여긴 적도 없었다.
---「첩자들」중에서
그는 이 서른 닢이라는 대가가 예수의 생애를 얼마나 치욕스럽게 하는지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동시에 단돈 몇 푼에 자신의 영혼이 팔린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비열한 행위가 그 정도밖에 안 된다고 생각하며, 대사제가 멸시하듯 건네준 돈을 받았던 것이다. 돈을 받아 쥔 유다의 일그러진 표정과 자학의 심리가 생생하게 느껴진다. 은돈 서른 닢이라는 복음서의 기술에는 유다의 고통, 자학, 그리고 그의 고독이 배어 있다.
다음 날 유다는 사람들로부터 버림을 받고 욕설과 치욕을 당할 예수를 생각했다. 한편, 변절자로서 영원히 사람들로부터 버림받고 욕설과 치욕을 당할 자신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배신당한 이와 배신자의 불가사의한 상관관계를 그가 이때 얼마나 뼈저리게 느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한 번 예수와 마주친 사람은 평생 그를 잊을 수 없게 된다.
---「체포의 밤」중에서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
메마른 예수의 입술에서 흘러나온 말은 이것이었다. 이 말을 살펴보면, 예수는 사랑이 결핍된 사람들을 필사적으로 두둔하려 한다. 예수의 이 말을 달리 표현하면 “그들에게는 사랑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사랑을 표현하는 데 서투를 뿐, 사랑이 무엇인지를 아직 잘 모르고 있습니다.”라는 이야기이다.
---「주님, 당신 손에 맡기나이다」중에서
그들은 생전의 스승의 얼굴과 모습을 떠올렸다. 매우 지치고 쑥 들어간 눈매, 그 눈매에 슬픔의 빛이 떠오른다. 그리고 미소를 띤 그 눈에는 순박한 빛이 머무른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사람, 이 세상에서 무력했던 사람, 야위고 볼품없던 사람, 그는 단지 다른 사람들이 괴로워하고 있을 때 그것을 못 본 체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리고 울고 있는 여자들과 고독한 노인 곁에 묵묵히 머물렀다. 기적 같은 것은 행하지 않았지만, 기적보다도 훨씬 깊은 사랑이 그 휑한 눈에 흘러넘쳤다. 그는 자신을 저버린 이, 자신을 배신한 이에게 원망의 말을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는 ‘슬픔의 인간’으로, 제자들의 구원만을 간구했다.
예수의 생애는 그뿐이었다. 그것은 하얀 종이 위에 쓰인 글자 하나처럼 간단하고 명료했다. 너무 간단하고 명료했기 때문에 아무도 알지 못했고, 알 수 없었던 것이다.
---「수수께끼」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