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를 바라고 찾는 이들은 많지만 받은 은혜를 기억하고 그 은혜에 합당하게 응답하는 사람은 매우 적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사람은 받은 은혜가 많고 클수록 더 쉽게 잊어버립니다. 눈은 너무 밝아도 보지 못한다고 합니다. X선이 눈에 보이지 않는 것도 너무 밝기 때문입니다. 귀도 소리가 너무 크면 못 듣습니다. 마찬가지로 은혜가 클수록 다 보지 못하고 다 이해하지 못합니다.
은혜를 온전히 깨닫지 못한 사람은 은혜를 헛되이 받을 뿐만 아니라 은혜를 이용해 죄를 범하기까지 합니다. 하나님은 은혜로 심판을 연기해 주셨건만, 사람은 심판이 없다고 착각하고 더욱 죄를 범합니다. 하나님이 은혜로 죄를 용서하셨건만, 사람은 죄를 고백하면 용서받는다고 생각해서 죄를 멈추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은혜를 기억하고 은혜에 합당하게 응답하는 것일까요? 죄를 떠나 진실하게, 거짓 없이 정직하게 사는 것입니다. 은혜에 합당한 반응은 진리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는 진리를 따라 살아가려 하고, 진실을 말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 앞에 진실한 사람, 정직하고 거짓이 없는 삶으로 나아갈 때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수많은 사람을 구원하실 겁니다.
--- p.23
《탈무드》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한 어머니가 어느 날 상점에서 옷을 한 벌 샀습니다. 집에 돌아와서 다시 한 번 입어보며 주머니에 손을 넣었는데, 커다란 보석이 들어 있었습니다. 순간 어머니는 보석을 두고 갈등했습니다.
‘내가 산 옷에 있으니 내 것 아닐까?’ ‘아니야 보석이 엄청 비싸 보이는데 잃어버린 사람이 지금쯤 애타게 찾고 있을 거야.’
그러나 혼자서 답을 내리기 어려워 마을의 랍비를 찾아가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냐고 물었습니다.
? 그러자 랍비가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당신이 산 것은 외투이지 보석이 아닙니다. 당장 돌려주는 것이 맞습니다. 만약 보석을 돌려주러 갈 때 당신의 자녀를 데리고 간다면, 당장은 아쉬울지 몰라도 보석보다 몇 배나 더 귀중한 것을 자녀에게 물려주게 될 것입니다.”
진리란 원칙이고, 원칙이란 때로는 힘든 결정을 요구합니다. 하지만 원칙을 지키면 결과는 반드시 좋아집니다. 진리의 길을 따르도록 우리는 하나님께 힘을 구해야 합니다.
--- p.62
이순신 장군이 병사들을 집합시켜 훈시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한 노인이 다가와 이렇게 말합니다.
“감사합니다. 장군님이 오신 이후 왜적의 약탈이 없어져 고마움의 표시로 겨우 술 한 통을 마련해 왔으니 작은 정성으로 여겨 받아주십시오.”
노인의 간청에 이순신 장군은 훈시를 중단하고 이렇게 말합니다.
“오늘은 술 마시는 날이다. 모두 술잔을 들고 다시 모여라.”
이렇게 외치고는 이순신 장군은 냇가로 내려가 병사들이 보는 앞에서 술통의 술을 냇물에 부었습니다. 병사들은 냇물에 흘러가는 술을 보고 못내 아쉬워했습니다. 침묵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이순신 장군이 술잔에 냇물을 채운 후 잔을 들어 올리며 크게 외쳤습니다.
“모두 술잔에 냇물을 채워라. 이 물은 맹물이 아니라 노인이 우리를 믿고 승리를 당부하는 술이다. 자, 모두 술을 마시자!”
병사들 모두 술잔에 냇물을 채웠습니다. 그때 누가 먼저 시작했는지 잔을 쳐든 병사들은 모두 “승리! 승리!”를 목이 터져라 외쳤습니다.
다음 날 벌어진 명량해전에서의 기적(奇蹟) 같은 승리는 장군과 휘하 장졸들과의 끈끈한 인간 관계가 뒷받침됐기 때문이었습니다.
--- p.96
사랑하는 여러분!
일생 동안 어떤 것에 집중해서 얼마나 시간을 투자하느냐에 따라서 얻게 되는 소득이 다릅니다. 기왕 뭔가에 집중하려면 우리의 생애를 후회하지 않을 만큼 가치 있는 것에 집중해야 합니다. 저는 그것이 정직한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땅에서 돈을 줍지 않겠다는 생각, 보는 사람이 없어도 남의 것에는 절대 손대지 않겠다는 정직한 마음, 감독관이 없어도 치팅을 하지 않겠다는 견고한 마음, 만약 잘못을 저질렀다면 숨기지 않고 정직하게 고백하는 마음. 이러한 마음들은 잠시 동안은 내가 손해보는 것 같지만, 결과적으로는 나에게 유익하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정직하여 손해를 보는 경우가 있어도, 우리를 늘 지켜보시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믿음을 가지고 항상 정직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 p.150
“오르지 못할 산은 없다.”
이것은 시각장애인으로 미국 교육부 차관보급에 오른 강영우 박사가 제시하는 성공의 모토였다고 합니다.
그분은 늘 주위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생각을 바꾸면 항상 새로운 길이 열린다. 나는 다른 사람이 불가능하다고 하는 것을 나를 존중하는 마음으로 이루어냈다.”
어려움의 때는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 법입니다. 어려움을 이겨내고 성공한 강영우 박사는 자기 존중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참모델입니다.
--- p.17
어떤 아버지가 중학생인 아들이 담배를 피우는 것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걱정스런 눈길만 보낼 뿐 아들에게 아무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한 달이 지난 어느 날 아버지는 아들을 불러 담배를 끊으라고 타일렀습니다. 아들은 왜 아버지가 그때 바로 얘기하지 않고 한 달이 지난 다음 얘기했는지 궁금해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아버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네가 알다시피 나도 담배를 즐겨 피웠단다. 그런데 어떻게 너만 담배를 끊으라고 할 수 있겠니? 내가 먼저 담배를 끊는 것을 네게 보여주고 싶었다. 처음에는 힘들었지만 한 달이 지난 지금은 완전히 담배를 끊었단다. 그래서 이제 너에게 이렇게 떳떳이 이야기하는 것이란다.”
--- p.52
플레밍은 페니실린을 우연히 발견한 게 아니었습니다. 그는 실험을 마치고 나서 항상 실험 자료들을 버릴 때에는 다시 한 번 확인하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늘 주변을 잘 정리하고 정돈하고 또 기록하기를 평생 동안 했습니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실험 결과를 처음 봤을 때 알지 못했던 사실을 다시 보면 발견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페니실린을 발견한 날도 평소처럼 실험을 마치고, 마지막으로 그날 실험했던 시험관을 검사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마지막으로 검사하던 시험관에 푸른곰팡이들이 가득한 것이엇습니다. 만약 그가 실험 결과를 한 번만 쓱 보고 지나쳤다면 지금의 항생제는 없을지 모를 일입니다. 그의 정리와 정돈 습관이 결국 페니실린이라는 항생제를 만들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 p.82
하나님은 신원(伸?)을 들어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신원이란 억울한 하소연을 말합니다. 사람은 자신이 억울한 일을 당하면 그걸 해결하려고 열심히 뛰어다닙니다. 하지만 정작 남의 불행이나 어려움에는 귀를 잘 기울이지 않습니다. 그 사람의 입장이 돼 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킹 목사님은 남에 대한 배려는 결국 사랑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억울한 일을 풀어주려고 법원에 재판을 신청하고 변호를 했습니다.
위대한 사명이 잉태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소련의 공산주의 붕괴라는 역사적인 사건은 한 흑인 여자가 타고 있던 버스에서부터 서서히 일어난 거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의 사명이 세계를 변화시키는 보이지 않는 힘이 되었습니다. 결국 킹 목사님의 노력으로 1년 뒤에 버스 내에서 인종 차별을 하는 것은 헌법 위반이라는 판결이 나오게 됨으로써 진정한 의미의 흑인 해방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 p.106
그리스도인에게 쏟아지는 비난은 무엇입니까? 말은 잘하나, 실천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이중성이라고 부르고, 나토(NATO : No Action, Talking Only)라고도 하며, 심지어는 위선이라고 말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이런 위선적인 태도로 살아갑니다. 나는 그렇지 않다고 부인하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자신도 위선을 행합니다.
우리의 이중성과 위선은 어디에서 나옵니까? 진지하게 물어 보신 적이 있습니까? 마음에서 나오는 겁니다. 그러므로 마음의 상태에서 말이 나오는 것은 정직합니다. 그러나 마음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말로만 체하는 것은 위선입니다.
--- p.216
은혜를 바라고 찾는 이들은 많지만 받은 은혜를 기억하고 그 은혜에 합당하게 응답하는 사람은 매우 적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사람은 받은 은혜가 많고 클수록 더 쉽게 잊어버립니다. 눈은 너무 밝아도 보지 못한다고 합니다. X선이 눈에 보이지 않는 것도 너무 밝기 때문입니다. 귀도 소리가 너무 크면 못 듣습니다. 마찬가지로 은혜가 클수록 다 보지 못하고 다 이해하지 못합니다.
은혜를 온전히 깨닫지 못한 사람은 은혜를 헛되이 받을 뿐만 아니라 은혜를 이용해 죄를 범하기까지 합니다. 하나님은 은혜로 심판을 연기해 주셨건만, 사람은 심판이 없다고 착각하고 더욱 죄를 범합니다. 하나님이 은혜로 죄를 용서하셨건만, 사람은 죄를 고백하면 용서받는다고 생각해서 죄를 멈추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은혜를 기억하고 은혜에 합당하게 응답하는 것일까요? 죄를 떠나 진실하게, 거짓 없이 정직하게 사는 것입니다. 은혜에 합당한 반응은 진리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는 진리를 따라 살아가려 하고, 진실을 말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 앞에 진실한 사람, 정직하고 거짓이 없는 삶으로 나아갈 때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수많은 사람을 구원하실 겁니다.
--- p.23
《탈무드》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한 어머니가 어느 날 상점에서 옷을 한 벌 샀습니다. 집에 돌아와서 다시 한 번 입어보며 주머니에 손을 넣었는데, 커다란 보석이 들어 있었습니다. 순간 어머니는 보석을 두고 갈등했습니다.
‘내가 산 옷에 있으니 내 것 아닐까?’ ‘아니야 보석이 엄청 비싸 보이는데 잃어버린 사람이 지금쯤 애타게 찾고 있을 거야.’
그러나 혼자서 답을 내리기 어려워 마을의 랍비를 찾아가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냐고 물었습니다.
? 그러자 랍비가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당신이 산 것은 외투이지 보석이 아닙니다. 당장 돌려주는 것이 맞습니다. 만약 보석을 돌려주러 갈 때 당신의 자녀를 데리고 간다면, 당장은 아쉬울지 몰라도 보석보다 몇 배나 더 귀중한 것을 자녀에게 물려주게 될 것입니다.”
진리란 원칙이고, 원칙이란 때로는 힘든 결정을 요구합니다. 하지만 원칙을 지키면 결과는 반드시 좋아집니다. 진리의 길을 따르도록 우리는 하나님께 힘을 구해야 합니다.
--- p.62
이순신 장군이 병사들을 집합시켜 훈시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한 노인이 다가와 이렇게 말합니다.
“감사합니다. 장군님이 오신 이후 왜적의 약탈이 없어져 고마움의 표시로 겨우 술 한 통을 마련해 왔으니 작은 정성으로 여겨 받아주십시오.”
노인의 간청에 이순신 장군은 훈시를 중단하고 이렇게 말합니다.
“오늘은 술 마시는 날이다. 모두 술잔을 들고 다시 모여라.”
이렇게 외치고는 이순신 장군은 냇가로 내려가 병사들이 보는 앞에서 술통의 술을 냇물에 부었습니다. 병사들은 냇물에 흘러가는 술을 보고 못내 아쉬워했습니다. 침묵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이순신 장군이 술잔에 냇물을 채운 후 잔을 들어 올리며 크게 외쳤습니다.
“모두 술잔에 냇물을 채워라. 이 물은 맹물이 아니라 노인이 우리를 믿고 승리를 당부하는 술이다. 자, 모두 술을 마시자!”
병사들 모두 술잔에 냇물을 채웠습니다. 그때 누가 먼저 시작했는지 잔을 쳐든 병사들은 모두 “승리! 승리!”를 목이 터져라 외쳤습니다.
다음 날 벌어진 명량해전에서의 기적(奇蹟) 같은 승리는 장군과 휘하 장졸들과의 끈끈한 인간 관계가 뒷받침됐기 때문이었습니다.
--- p.96
사랑하는 여러분!
일생 동안 어떤 것에 집중해서 얼마나 시간을 투자하느냐에 따라서 얻게 되는 소득이 다릅니다. 기왕 뭔가에 집중하려면 우리의 생애를 후회하지 않을 만큼 가치 있는 것에 집중해야 합니다. 저는 그것이 정직한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땅에서 돈을 줍지 않겠다는 생각, 보는 사람이 없어도 남의 것에는 절대 손대지 않겠다는 정직한 마음, 감독관이 없어도 치팅을 하지 않겠다는 견고한 마음, 만약 잘못을 저질렀다면 숨기지 않고 정직하게 고백하는 마음. 이러한 마음들은 잠시 동안은 내가 손해보는 것 같지만, 결과적으로는 나에게 유익하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정직하여 손해를 보는 경우가 있어도, 우리를 늘 지켜보시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믿음을 가지고 항상 정직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 p.150
“오르지 못할 산은 없다.”
이것은 시각장애인으로 미국 교육부 차관보급에 오른 강영우 박사가 제시하는 성공의 모토였다고 합니다.
그분은 늘 주위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생각을 바꾸면 항상 새로운 길이 열린다. 나는 다른 사람이 불가능하다고 하는 것을 나를 존중하는 마음으로 이루어냈다.”
어려움의 때는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 법입니다. 어려움을 이겨내고 성공한 강영우 박사는 자기 존중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참모델입니다.
--- p.17
어떤 아버지가 중학생인 아들이 담배를 피우는 것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걱정스런 눈길만 보낼 뿐 아들에게 아무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한 달이 지난 어느 날 아버지는 아들을 불러 담배를 끊으라고 타일렀습니다. 아들은 왜 아버지가 그때 바로 얘기하지 않고 한 달이 지난 다음 얘기했는지 궁금해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아버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네가 알다시피 나도 담배를 즐겨 피웠단다. 그런데 어떻게 너만 담배를 끊으라고 할 수 있겠니? 내가 먼저 담배를 끊는 것을 네게 보여주고 싶었다. 처음에는 힘들었지만 한 달이 지난 지금은 완전히 담배를 끊었단다. 그래서 이제 너에게 이렇게 떳떳이 이야기하는 것이란다.”
--- p.52
플레밍은 페니실린을 우연히 발견한 게 아니었습니다. 그는 실험을 마치고 나서 항상 실험 자료들을 버릴 때에는 다시 한 번 확인하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늘 주변을 잘 정리하고 정돈하고 또 기록하기를 평생 동안 했습니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실험 결과를 처음 봤을 때 알지 못했던 사실을 다시 보면 발견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페니실린을 발견한 날도 평소처럼 실험을 마치고, 마지막으로 그날 실험했던 시험관을 검사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마지막으로 검사하던 시험관에 푸른곰팡이들이 가득한 것이엇습니다. 만약 그가 실험 결과를 한 번만 쓱 보고 지나쳤다면 지금의 항생제는 없을지 모를 일입니다. 그의 정리와 정돈 습관이 결국 페니실린이라는 항생제를 만들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 p.82
하나님은 신원(伸?)을 들어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신원이란 억울한 하소연을 말합니다. 사람은 자신이 억울한 일을 당하면 그걸 해결하려고 열심히 뛰어다닙니다. 하지만 정작 남의 불행이나 어려움에는 귀를 잘 기울이지 않습니다. 그 사람의 입장이 돼 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킹 목사님은 남에 대한 배려는 결국 사랑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억울한 일을 풀어주려고 법원에 재판을 신청하고 변호를 했습니다.
위대한 사명이 잉태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소련의 공산주의 붕괴라는 역사적인 사건은 한 흑인 여자가 타고 있던 버스에서부터 서서히 일어난 거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의 사명이 세계를 변화시키는 보이지 않는 힘이 되었습니다. 결국 킹 목사님의 노력으로 1년 뒤에 버스 내에서 인종 차별을 하는 것은 헌법 위반이라는 판결이 나오게 됨으로써 진정한 의미의 흑인 해방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 p.106
그리스도인에게 쏟아지는 비난은 무엇입니까? 말은 잘하나, 실천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이중성이라고 부르고, 나토(NATO : No Action, Talking Only)라고도 하며, 심지어는 위선이라고 말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이런 위선적인 태도로 살아갑니다. 나는 그렇지 않다고 부인하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자신도 위선을 행합니다.
우리의 이중성과 위선은 어디에서 나옵니까? 진지하게 물어 보신 적이 있습니까? 마음에서 나오는 겁니다. 그러므로 마음의 상태에서 말이 나오는 것은 정직합니다. 그러나 마음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말로만 체하는 것은 위선입니다.
--- p.216
예수님이 보여주신 삶은 곧 하나님의 삶입니다. 영광 이전에 고난을, 열매 이전에 수고를, 사랑 이전에 희생을 보여주시는 겁니다. 그것이 ‘임마누엘’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고난 없이 영광을, 수고 없이 열매를, 희생 없이 사랑하려고 합니다. 그러는 인간의 삶은 곧 사탄의 삶입니다. 이러한 삶을 보여주려고 예수님이 임마누엘인 것입니다.
그러면 왜 우리에게 이러한 삶을 보여주십니까?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삶을 배우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을 배우라는 것입니다. 삶이란 무엇을 심든지 그대로 거두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삶을 쫓아 의와 희락과 화평과 사랑을 심을 때 우리는 의와 희락과 화평과 사랑이라는 천국의 열매를 거둘 수 있습니다.
--- p.227
예수님이 보여주신 삶은 곧 하나님의 삶입니다. 영광 이전에 고난을, 열매 이전에 수고를, 사랑 이전에 희생을 보여주시는 겁니다. 그것이 ‘임마누엘’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고난 없이 영광을, 수고 없이 열매를, 희생 없이 사랑하려고 합니다. 그러는 인간의 삶은 곧 사탄의 삶입니다. 이러한 삶을 보여주려고 예수님이 임마누엘인 것입니다.
그러면 왜 우리에게 이러한 삶을 보여주십니까?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삶을 배우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을 배우라는 것입니다. 삶이란 무엇을 심든지 그대로 거두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삶을 쫓아 의와 희락과 화평과 사랑을 심을 때 우리는 의와 희락과 화평과 사랑이라는 천국의 열매를 거둘 수 있습니다.
--- p.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