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모님은 평생 서서 돌보시는 어머니의 표상입니다. “지금은 사정이 다르지만 우리나라의 어머니들, 특히 옛날의 어머니들은 거의 다 성모입니다. 서서 돌봄이 어찌나 많은지 앉아서 따뜻한 밥 한 그릇 못 얻어먹었습니다. 더울 때 더위를 혼자 이고, 추울 때 추위를 혼자 이고, 앉지도 못하고 서성거리다가 간 것이 우리 어머니들입니다.”(류영모) 대개의 성모상이 서서 계신 것도 이런 까닭입니다. 작년에도 올해도 서서 돌보시는 어머니의 자세로 서로의 아픔을 어루만지고 체온을 나누자는 것이 천주의 모친 대축일(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의 또 다른 뜻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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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모르는 이유로 마음이 무거우신 분들을 위해 해마다 3월 25일, 예수님 성탄 열 달 앞서 지내는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을 상기시켜 드리고 싶습니다. 하느님이 여인의 품에 신성한 씨앗 하나를 심으셨습니다. 역사상 인류를 가장 흥분되게 만든 뉴스입니다. 이것은 하와의 이야기이며 마리아의 이야기이며 모든 어머니들의 역사입니다. 하느님의 ‘거룩한 파종’을 경축하느라 봄은 꽃을 피우고, 새들은 꽃 핀 자리에서 노래를 부릅니다.
--- p,31
하느님과 사람이 함께 이루는 강생의 신비가 좋아서, 너무나 좋아서 잘 믿기지도 않기에 그러므로 더욱 잊지 말자고 하루 세 번 우리는 삼종 기도를 바칩니다. 지금은 삼종이 울리는 높은 언덕의 성당이 드물어졌습니다. 그래도 삼종 기도는 빼먹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삼종 기도를 알리는 종소리는 오래오래 널리널리 울려 퍼져야 합니다.
--- p,68-69
예수님이 하느님의 말씀으로 불리게 된 저 복잡한 사연이야 다 몰라도 좋습니다. 하느님의 ‘말씀’, 하느님의 ‘아들’, 심지어 ‘하느님’이라는 고백까지 받으신 분께서 우리 곁에 오셨다는 것만 알고 있으면 충분합니다. 사람이 좋아 사람이 되셨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성탄은 하느님의 위대한 선물이 됩니다. 옛날 옛적 “높은 하늘에 거처를 정하고 홀로 하늘의 궁창을 돌아다니”던 하느님의 지혜가 천상천하 “모든 것 가운데에서 찾아낸 안식처”(집회 24,4-7 참조)가 바로 사람들 한가운데였다는 이 엄청난 사연만 가슴에 새겨도 북풍 몰아치는 엄동설한을 따뜻하게 지낼 수 있습니다.
--- p,75-76
세상에서 가장 고마운 사람은 뜻이 같은 사람, 동지입니다. 뜻이 같은 사람과는 목숨도 나눌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은 같은 뜻으로 같은 일을 하는 동무입니다. 그런 사람을 위해서라면 목숨도 내줄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동지요 동무가 되어 되돌아온 것은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산전수전 다 치르며 자기 생각의 주인이 된 그 다음의 일이었습니다.
--- p,101
포도는 얼마 못 가서 시들어 버리지만 포도주는 백 년도 가고 천 년도 갑니다. “밀봉과 발효의 신비”(김흥호) 덕분입니다. 썩어 없어질 생명을 썩지 않을 영원한 생명으로 바꿔 주는 발효의 비결은 밀봉에 있습니다. 잠시의 포도가 영원의 포도주로 거듭날 때처럼 사람도 십자가에서 으깨졌다가 무덤에 갇혀서 밀봉되고 발효되어야 합니다. 무덤은 ‘발효의 성전’이었습니다. 누에는 고치 속에서 번데기였다가 나방이 되어 훨훨 날아갑니다. 죽을 때 잘 죽으신 예수님은 이렇게 영원한 임이 되셨습니다.
--- p,139
어떻게 하면 사람을 보고서도 하느님을 볼 수 있는 걸까요. 구멍 난 옆구리 그 틈새로 미소 짓는 하느님의 얼굴을 어떻게 발견했을까요.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요한 20,28). 이 짧은 탄성으로써 상처란 하느님을 만나고 하느님을 만지는 유일한 장소요, 신성과 인성의 신비로운 일치가 이뤄지는 거룩한 지점이라는 사실이 명백해졌습니다.
--- p,144-145
하늘 아래 살지만 하늘을 잊지 않으면 성모님처럼 깨끗하고 예수님처럼 꼿꼿할 수 있습니다. 하늘을 잊을 때 사람은 구질구질 꼬질꼬질하게 됩니다. 병아리를 품는 어미닭의 심정으로 지내면 성모 성심이요, 동생 아끼는 언니의 마음으로 “내 살로 빚은 나의 떡이다. 어서 먹어라.” 하면 예수 성심입니다. 성심은 천심이라 언제나 어디서나 하늘처럼 깨끗하고 하늘처럼 맑습니다.
--- p,151
사랑을, 참사랑을 가진 사람은 그 누군가하고 나누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법인가 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 모시고 살아가는 효자의 기쁨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 세상과 나누기로 결심합니다. 그 일을 소명으로 확신하기에 이릅니다. 그래서 동지들과 함께 머리 둘 곳조차 없이 떠돌면서 옷깃 스치는 인연들에게 하느님의 사랑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 p,162
예수님께서는 ‘먹어라, 나를 먹어라.’ 하셨습니다. 살을 베어 주고 피를 쏟아 주려 하셨던 까닭이 무엇일까요. 이천식천以天食天, 하늘로써 하늘을 먹이겠다는 뜻일까요. 나로써, 곧 “하늘에서 내려온 빵”(요한 6,41)으로써 ‘너희를 먹이려는 것은 너희가 하늘이기 때문이다. 먹히는 나도 하늘이요 먹어야 사는 너희도 하늘이다. 너희가 하늘에 속한 하늘이라는 말을 알아듣겠느냐?’ 하시는 말씀이지 않을까요?
--- p,193
성체란 자기를 쪼개고 나누고, 마지막에는 남에게 먹혀서 스스로 없어지는 존재인지라 근본적으로 십자가와 동일한 신비인 것입니다. 그래서 슬금슬금 흩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 떠나고 남은 몇몇에게 “너희도 떠나가겠느냐?” 하고 물으셨을 때 베드로가 아주 의젓한 대답을 내놓았지만 결국 그이도 달아나 버렸습니다.
성체를 올바로 모시는 일은 그만큼 어렵고 위험합니다. 무심히 먹고 마셔서 영적 포만감으로 만족해도 된다면 세상에 그보다 더 쉬운 일이 어디에 있겠는가마는 그래서는 안 됩니다. 경솔하고 무책임한 짓입니다.
--- p,194-195
사람이 하느님을 믿기 전에 하느님께서 먼저 사람을 믿으셨습니다. 그런 믿음으로 하느님은 사람이 되셨고, 우리가 다가갈 생각을 하기도 전에 먼저 와 주셨습니다. 그리고 먹일 만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배고프다는 이유만으로 밥을 지어 주시는 분, 그분의 은총이 인간의 모든 것에 앞섭니다. 성체는 선물이지 보상이 아닙니다.
--- p,197
도대체 오늘이 어떤 날이기에 성경의 그날은 어제도 아니고 내일도 아니고 하필 오늘이라고 하는 걸까요? 오늘이란 영원이 오롯이 담긴 하루라서 그렇습니다. 하나의 물방울이 온 하늘을 담고 있듯이 하루 속에는 영원이 깃들어 있습니다.
오늘 하루를 길게 다 살지 못하면 우리는 영원을 흘려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하루, 평범하나 경이로운 말입니다.
--- p,245
한때는 꽃자리, 그러다 꽃 진 자리에 열매가 달리듯 끝낼 것을 끝내야 새것이 나온다고 했습니다. 영원의 한 조각인 시간, 광대무변의 한 지점인 공간, 그리고 그와 같은 시간과 공간을 나누고 있는 너와 나, 인간. 강생의 신비가 벌어진 이 경이로운 틈새에서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나요?
--- p,247-2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