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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골목, 호텔 그리고 강물소리

길, 골목, 호텔 그리고 강물소리

문학과지성 시인선-153이동
리뷰 총점9.0 리뷰 2건 | 판매지수 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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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00년 03월 31일
쪽수, 무게, 크기 112쪽 | 128*205*20mm
ISBN13 9788932007335
ISBN10 8932007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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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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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릉에서는 마을로 가려면 흐르는
강을 등에 져야 합니다 함부로
길을 떠나지 않는 집들이 있는 마을은
몸이 들어가는 길이라서
몸에 붙어 있는 두 다리로
걸어서 가야 합니다 등줄기를 치는
물소리를 뒤에 두고 가다보면
담장에 자주 막혀 길이 혼자
허옇게 골목을 돌아 산으로
가기도 합니다 마을로 가려면
이 길을 둘둘 되말아 가야 합니다
경운기로는 길이 잘 찢어져서
싣고 가기 힘이 듭니다
길은 그러나 때로 가벼워서 들고
가도 그다지 무겁지는 않습니다
무릉에서는 마을로 가려면
길이 하나인 산을 지나
길이 많은 들로 가야 합니다
--- p.49
대방동 조흥은행과 주택은행 사이에는 플라타너스가 쉰일곱 그루, 빌딩의 창문이 칠백열아홉, 여관이 넷, 여인숙이 둘, 햇빛에는 모두 반짝입니다.

대방동의 조흥은행과 주택은행 사이에는 양념통닭집이 다섯, 호프집이 넷, 왕족발집이 셋, 개소주집이 둘, 레스토랑이 셋, 카페가 넷, 자동판매기가 넷, 복권 판매소가 한 군데 있습니다. 마땅히 보신탕집이 둘 있습니다. 비가 오면 모두 비에 젖습니다. 산부인과가 둘, 치과가 셋, 이발소가 넷, 미장원이 여섯, 모두 선팅을 해 비가 와도 반짝입니다.

빨간 우체통이 둘, 학교 담장 밑에 버려진 자전거가 한 대, 동작구 소속 노란 소형 청소차가 둘, 영화 포스터가 불법으로 부착된 벽이 셋, 비디오 가게가 여섯, 골목에 숨어 잘 보이지 않는 전당포 안내 표지판과 장의사 하나, 보도 블록 위에 방치된 하수도 공사용 대형 원통 시멘트관 쉰여섯이 눈을 뜨고 있습니다. 아, 그리고 xx↓↓↓표 가변 차선 표시등 하나도!

대방동 조흥은행과 주택은행 사이에는 한 줄에 아홉개씩 마름모꼴로 놓인 보도 블록이 구천오백네 개, 그 가운데 깨어진 것이 하나, 둘...... 여섯...... 열다섯...... 스물아홉...... 마흔둘......
--- pp.14-15
개봉동 입구의 길은
한 송이 장미 때문에 왼쪽으로 굽고,
굽은 길 어디에선가 빠져나와
장미는
길을 제 혼자 가게 하고
아직 흔들리는 가지 그대로 길 밖에 선다.

보라 가끔 몸을 흔들며
잎들이 제 마음대로 시간의 바람을 일으키는 것을.
장미는 이곳 주민이 아니어서
시간 밖의 서울의 일부이고,
그대와 나는
사촌(四寸)들 얘기 속의 한 토막으로
비 오는 지상의 어느 발자국에나 고인다.

말해 보라
무엇으로 장미와 닿을 수 있는가를.
저 불편한 의문, 저 불편한 비밀의 꽃
장미와 닿을 수 없을 때,
두드려 보라 개봉동 집들의 문은
어느 곳이나 열리지 않는다.
--- p.64
감동할 시간도 주지 않고 한 사내가
간다 감동할 시간도 주지 않고
뒷머리를 질끈 동여맨 여자의 모가지 하나가
여러 사내 어개 사이에 낀인다
급히 여자가 가기의 모가지를 남의 몸에
붙인다 두 발짝 가더니 다시
모가지를 남의 어깨 위에 붙여놓는다 나는
사람들을 비키며 제자리에 붙인다
감동할 시간도 주지 않고 한 여자의
핸드백과 한 여자의 아랫도리 사이
하얀 성모 마리아의 가슴에
주전자가 올라붙는다 마리아의 한쪽 가슴에서
물이 줄줄 흐른다 놀란 여자 하나
그 자리에 멈춘다 아스팔트가 꿈틀한다
꾹꾹 아스팔트를 제압하며 승용차가
간다 또 한 대 두 대의 트럭이
이런 사내와 저런 여자들을 썩썩 뭉개며 간다
사내와 여자들이 뭉개지며 감동할
시간을 주지 않고
나는 시간을 따로 잘라내어 만든다
--- p.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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