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에서는 우리를 소수인종이라고 부른다. 정확한 공식 분류는 ‘1급 보호대상 소수인종’으로, 인류 문명 전체의 공익을 위해서 반드시 보호해야 하는 인종이라는 뜻이다. 즉 머지않은 미래에 멸종해버릴 거라는 뜻이기도 하다.
우리는 진화에서 도태되었다. 개나 다람쥐나 고라니가 그랬듯, 참새나 꿩이나 까마귀가 그랬듯, 점진적이고 눈에 띄지 않는 방식으로 감소했다. 아무도 우리가 도태되어 사라질 지경에 이르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기에 우리는 너무 흔하고 너무 많았으니까. 이제 와서는 믿을 수 없는 전설처럼 들리지만, 한때 우리는 전 세계 인구 절반을 차지했었다. 그때만 해도 우리는 그저 ‘인간 여자’였고, 지구의 아무 데서나 터전을 꾸리고 살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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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비는 열여섯 살 때까지 할머니 밑에서 자랐다. 그리고 대부분의 시간 동안 할머니가 죽기를 빌었다.
라비는 할머니의 양육 방침을 견딜 수 없었다. 할머니는 라비가 공용어를 쓰지 못하게 금지했다. 자신 외에는 아무도 쓰지 않는 옛말만을 가르쳤고, 라비가 이웃들에게서 주워들은 공용어를 떠듬떠듬 입에 올리는 것을 들으면 호되게 야단을 쳤다. 라비는 다른 아이들처럼 학교에 갈 수도 없었다. 라비의 교사는 할머니뿐이었고, 라비의 학교는 마을에서 가장 호젓한 곳에 자리한 방 두 칸짜리 집과 거기에 딸린 뒷마당, 그리고 그 뒤에 펼쳐진 숲과 연못뿐이었다. 그곳에서 라비는 옛날이야기와 노래, 미신, 민간요법 따위를 배웠다. 나무껍질을 얼기설기 짜서 엮은 옷을 걸치고 얼굴을 무시무시한 색깔로 칠하고 춤을 추는 법. 식물의 열매를 짓이기거나 뿌리를 태우거나 기름을 짜내는 법. 야자의 속을 파내거나 가루를 내고 죽을 쑤는 법. 뒷마당에서 할머니가 키우는 닭과 꿩의 고기를 가지고 질릴 대로 질린 음식을 질리도록 만드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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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아들 모두 아주 성에 차지는 않아도 그럭저럭 봐줄 만한 여자에게 장가를 들였다. 죽을 때까지 먹고살 걱정은 없을뿐더러 자식들에게 물려줄 집도 있고 이 집은 계속해서 가격이 오를 것이다. 유일한 불만이라면 너무 빨리 하늘나라로 가버린 남편의 빈자리였다. 경숙은 남편이 지금 자신과 함께 세상을 보고 있다면 무슨 생각을 할까 궁금하다. 대기질이 삶의 질을 결정하는 중요한 척도가 되고, 정부에서 감염병 관리를 위해 인구를 분산시키려는 목적으로 저개발 지역에 우선적으로 공기청정탑을 세우고, 결국 그 지역들의 집값이 껑충 뛴 이 세상.
--- p.140
요즘 ‘강시병’ 때문에 한창 뉴스가 시끄럽기는 하다. 가난한 집 애들이 곧잘 걸리는, 얼굴이 푸르스름해지고 부자연스러운 몸짓으로 강시처럼 발작을 하는 병 말이다. 성규의 과에도 그런 애가 한 명 있는데, 강의 중에 발작을 일으키는 바람에 한바탕 소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 애는 자기가 음영지대 출신이라는 티를 조금도 내지 않았고 언제나 비싼 옷을 입고 다녔기에 더욱 충격적인 일이었다. 하여간 없는 집에서 자란 애들이 더 허세가 심하다. 형편이 좀 나아지니 그 사실을 어떻게든 과시하고 싶어서 안달을 하지만, 가난했던 과거는 어떻게든 들통이 나게 되어 있다.
--- p.151
“그 집은 빈집이야. 그리고 지금은 겨울이고.”
남편은 지극히 과학적인 사실을 말하듯 선언한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나는 남편에게 어쩐지 화가 난다. 하지만 내 감정을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
남편이 조금 누그러진 표정으로 말한다.
“자다가 꿈꾼 거 아니야?”
“그런 것 같지는 않아요.”
“어제 약 안 먹었지?”
나는 고개를 저으려다 멈칫한다. 기억을 돌이켜본다. 어제 저녁 약을 빠뜨렸던가. 기억이 나지 않는 걸 보면 그런 듯하다.
“약통에 약이 그대로 있더라고. 그러면 안 돼. 약을 잘 먹어야지. 그래야 잠도 잘 자고.”
“……환각 증상은 아직 겪어본 적 없어요.”
“알아, 알아. 내 말은, 네가 환각을 봤다는 게 아니라, 비몽사몽 간에 착각한 것 같다는 얘기야. 꿈자리도 사납고. 새집이라 어수선하고. 그렇잖아.”
--- p.184
나도 몇 번이고 다시 싸우려고 해. 내 말들이 아무리 조악할지라도, 모조리 훔쳐온 단어들뿐일지라도, 언젠가는 다 잊힌다 해도…… 단 한 순간이라도 당신을 만나 입을 맞출 수만 있다면.
그래서 지금 나는 당신을 부르고 있어. 이름 없는 당신을 부르는 것이 당신에게 다다르는 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지라도. 내가 이렇게 함으로써 당신을 영영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것이 나를 두렵게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당신을 부르고 있어.
--- p.245
마을 전체가 처녀를 감시하고 있다. 처녀는 바깥세상이 어떤지 알지 못하며, 그런 세상에 대한 이야기가 들려온다 하더라도 그것은 가상이고 소문이며 옛날이야기일 뿐이다. 사실상 처녀에게 허락되는 자유는 천에 무엇을 수놓을 것인가밖에 없다. 바다와 섬 외에는 아무것도 내다보이지 않는 창문 앞, 볕이 잘 드는 자리에 처녀는 수틀을 매고 앉아서, 마을 사람들이 아낌없이 마련해주는 비단을 두고 곰곰이 상상한다. 가본 적 없는 초록빛의 초원을, 눈이 하얗게 덮인 산봉우리를, 바람에 물결치는 황금빛의 보리밭을, 도성의 으리으리한 궁궐과 정원을, 떠들썩한 시장 좌판의 사람들을, 매화와 수련과 개나리와 작약과 또 이름 모를 무수한 꽃들의 자욱한 향기를, 머나먼 이국의 코끼리와 원숭이와 살갗이 검은 여인들을, 자신을 팔아넘긴 어머니와 아버지의 얼굴을, 꿈속에서만 만날 수 있는 낭군의 얼굴을. 그리고 마음속에 떠오른 밑그림을 먹으로 옮긴 다음 그 위에 색색의 명주실로 한 땀 한 땀 수를 놓는다. 처녀의 세계는 수틀 위에서 형체와 색채를 한 겹 한 겹 덧입고 마침내 생명을 얻는다.
--- p.2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