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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과 복종

저항과 복종

: ‘사이’의 존재가 가야할 길

강치원의 광야 소리-2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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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1년 06월 21일
쪽수, 무게, 크기 272쪽 | 408g | 140*200*20mm
ISBN13 9791197383717
ISBN10 1197383719

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목차 목차 보이기/감추기

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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헛된 희망과 거짓 희망이 너무도 값싸게, 그러나 너무도 불티나게 팔려나가는 교회에서 정말 필요한 복음은 ‘정직한 절망’이다. 이것은 희망이 없는 캄캄한 심연이 아니라, 희망의 씨앗이 발아하는 생명의 어둠이다. 헛된 희망과 거짓 희망에 대해 저항의 물길을 열고, 비로소 희망의 물꼬를 트는 정직한 눈물이다.
--- p.22

절망을 죄악시하고 장밋빛 희망만을 남발하는 교회 문화는 희망이 없다. 희망이라는 모양은 있지만, 희망의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희망의 능력은 절망 속에서 움트고, 절망을 관통하며 꽃봉오리를 맺고, 절망 너머에서 꽃을 피운다. 지금은 절망이 없는 희망을 파는 거짓 복음을 거절하고, 정직한 절망의 눈물을 흘리며 그 눈물로 희망의 수로를 놓아야 할 때다.
--- pp.23-24

(나는) 루터와 함께 ‘교회에 대한 절망’을 말하고 싶다. ‘기독교에 대한 절망’을 말하고 싶다. 그리고 ‘희망하는 희망’으로만 가득 찬, 그래서 맛을 잃은 ‘신앙’ 대신에 ‘정직한 절망’이라는 용어를 붙잡고 싶다. … ‘정직한 절망’에 대한 용기, 어쩌면 이것이 신앙의 다른 말이 아닐까?
--- pp.26-27

‘저항과 복종’은 본회퍼의 삶과 신학만 묶을 수 있는 배타적인 용어가 아니다. 기독교의 역사를 돌이켜 보면, 나치 종교와 같은 것이 판을 칠 때면 어김없이 저항과 복종의 삶으로 시대정신과 싸웠던 이들이 있다. 이 신도 섬기고, 저 신도 섬기고자 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향해 자신은 오직 야훼 하나님만 섬기겠다고 선언하는 여호수아나, 야훼 하나님과 바알 사이에서 머뭇거리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한쪽을 택하라고 외친 고독한 엘리야처럼 말이다.
이런 전통의 흐름 속에 루터도 서 있다. 그는 자신의 실존을 하나님과 사탄 사이에서 살아가야 하는 존재로 직시하고, 이 ‘사이’의 존재가 살아가야 하는 삶의 방식으로 저항과 복종의 삶을 살았다. 이것을 꿰뚫어 본 루터 전문가 하이코 오버만(H.A.Oberman)은 자신의 루터 전기에 ‘하나님과 악마 사이에 있는 인간’이라는 부제를 달았다.
--- pp.54-55

『면죄부 논제』의 첫 번째 조항은 루터의 이런 치열한 성서 연구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와 더불어 성서로부터 출발하지 않는 그리고 성서에 의해 증명되지 않는 신학적인 주장에 대해서는, 그것이 교황의 교서이든 그 어떤 유명한 신학자의 주장이든, 언제든지 수정될 수 있는 하나의 ‘의견’으로만 받아들인다. 그 때문에 어떤 주장을 성서와의 씨름 없이 권위를 가진 누군가가 말했다고 하여 그냥 읊조리는 관행에 동조하지 않는다. 이런 전통에 대한 저항은 곧 성경에 대한 복종을 의미했다.
--- p.100

루터는 교황을 일반 인간과 다를 바 없는 존재, 곧 약하고, 틀릴 수 있고, 죄를 지을 수 있고, 거짓말할 수 있고, 자만할 수 있는 자로 간주한다. 당연한 말이다. 그러나 교황의 권위에 반대하고 있다는 의심을 받는 루터의 말이기에 색안경을 끼고 들을 수밖에 없는 위험한 말이다. 그런데 우리의 귀를 의심하게 만드는 또 다른 목소리가 들린다. 루터는 갈라디아서 2장에 나오는 바울의 베드로 책망을 끌어들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가장 높은 교황이라 할지라도 베드로와 같은 약함으로 인해 죄를 범하거나 신적인 계명에 반하는 것을 명령하거나 결정한다면, 그에게 순종할 수 없고 순종하지 말아야 함은 물론이고, 사도 바울과 함께 얼굴을 맞대고 저항할 수 있으며 저항해야 한다.”(WA2,37)
교황의 권위를 중요시하는 이들에게는 걸림돌이 되고도 남는 도발적인 표현이다. 그러나 루터는 이제 확실한 자신의 생각을 가지고 있다. 성서와 교황, 이 둘은 같은 선상에 있는 근원도 힘도 아니다. 교황이 가지는 권력(potestas)은 “성서와 진리의 위엄에 맞서거나 넘어서서는 안 되고, 그것을 위하고 그것 아래에 있어야 한다.”(WA2,39) 그 때문에 면죄부 판매를 승인하는 것은 성서에 위배되는 것으로 저항해야 한다. 면죄부 판매의 최종 승인자가 교황이기에 자연적으로 교황에 대한 저항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 pp.101-102

“나를 가장 많이 움직이게 한 것은 교황이 자신에게 반대해 말을 하거나, 글을 쓰거나, 행동한 자에 대해 단 한 번도 성경이나 이성을 통해 반박하지 않고, 항상 힘으로, 파문으로, 왕과 제후와 추종자들을 통해, 또는 책략과 속임수를 통해 억누르고, 쫓아내고, 화형에 처하고, 교살하는 것이다. … 그는 (자신에 대한) 어떤 재판도, 어떤 판결도 허용하고자 하지 않고, 항상 자신은 성경과 모든 재판과 모든 권력 위에 있다고 외쳐 댄다.”(WA7,181)
루터에 의하면, 어떤 주장이 옳은지, 그른지를 판단하는 근거는 성경과 이성이다. 이것에 근거하지 않는 주장은, 그것이 아무리 교황의 주장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비기독교적이다.
--- pp.108-109

자신에게 닥칠 암운(暗雲)에도 불구하고 루터는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 재판을 받던 베드로와 요한과 함께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WA7,181)
성경에 근거하지도 않고, 이성으로도 뒷받침되지 않는 사람의 말을 복종해야 할 진리로 내세우는 모든 시도에 저항하는 것,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복종하는 것과 분리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고자 하는 자는 성경과 이성에 반하는 사람의 말에 저항해야 한다. 이것이 보름스 제국회의를 향해 갈 때 루터를 동행했던 양심의 소리다.
--- pp.109-110

“(나의 주장이) 성경의 증거와 명백한 이성을 통해 잘못되었다고 증명되지 않는다면, 그렇다면 나는 내가 인용한 성경 구절에 굴복하여 머물고, 내 양심도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힌 채 머물러 있을 것입니다. 나는 교황도, 공의회도 믿지 않습니다. 이들이 종종 잘못된 결정을 내렸고, 서로 반대되는 주장들을 폈다는 것이 너무도 자명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내 입장을) 철회할 수도 없으며 철회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양심을 거슬러 무엇인가를 하는 것은 안전한 것도 아니며 올바른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를 도우소서. 아멘.”(WA7,838)
저항과 복종, 루터의 자리는 이 둘 사이에 있었다. 그런데 실은 이 두 삶의 방식은 오직 하나의 길 위에서만 가능하다. 성경과 이성이 녹아 만들어진 길 위에서만 진리에 복종할 수 있고, 비진리에 저항할 수 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이성이란 말씀에 사로잡힌 이성을 말한다. 이런 이성은 성서의 증거에 어긋나는 교황의 명령이나, 공의회의 결정이나, 신학자들의 주장에 복종하지 않는다. 그것이 아무리 권위 있는 명령이고, 다수의 동의를 얻은 결정이고, 세계적으로 유명한 석학의 주장이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오히려 말씀에 사로잡힌 이성은 이런 명령이나, 결정이나, 주장들을 성서 속으로 가지고 들어가, 성서의 정신과 맞는지 조사한다. 그것들을 가지고 성서를 판단하지 않고, 성서를 통해 그것들을 판단한다. 저항과 복종의 균형점은 오직 성서이다.
--- pp.110-112

오늘도 우리는 관행과 성경 사이에 서게 될 때가 많이 있다. 심지어는 성경적인 근거를 가지지 않는 관행이 성경의 말씀보다 더 권위 있는 것으로 자리매김하는 것을 목도할 때도 있다. 이때 우리는 어디에 서야 하는가? 내 몸에 익숙한 사고방식과 성경 사이, 교회의 색깔로 자리매김한 전통과 성경 사이, 노회나 총회의 관행과 성경 사이에서 우리의 자리는 어디인가? 우리는 무엇에 저항하고, 무엇에 복종해야 하는가? 자기 죽음을 담보로 하면서까지 ‘비텐베르크의 나이팅게일’을 쓴 구두 제조공 한스 작스는 오늘 우리를 이 물음 앞에 서게 한다. 그리고 우리를 밤의 어둠에서 깨워 일으킨 ‘비텐베르크의 나이팅게일’의 소리를 다시금 듣게 한다.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 pp.118-119

생각하는 신앙이 추방된 교회에서는 기독교의 옷을 입은 종교적인 망상이 지배하게 되고, 우상이 된 목회자는 신자들을 이러한 망상의 동굴로 인도하는 것을, 어용 신학자는 동굴 벽에 망상의 교리를 새기는 것을 각각 자신의 사명으로 여긴다. 망상의 동굴을 하나님 나라로 착각하기까지 한다. 그 때문에 요즘 한국 사회는 이런 종교적인 망상에 빠져 있는 교회를 향해 냉소적이다 못해 가련하다는 반응까지 보인다.
--- p.121

회개란 저항하는 것이다. 신을 만들고자 하는 자신의 욕망에 저항하는 것, 만들어진 신을 하나님으로 섬기려 하는 어리석음에 저항하는 것, 나를 따르라는 만들어진 신의 요구에 저항하는 것, 망상의 동굴을 천국으로 여기게 하는 교리와 신학에 저항하는 것이 바로 회개이다.
망상의 신화에 빠진 목회자도 회개하라는 말을 진지하게 성찰해야 한다. 그래서 만들어진 신으로 등극하고자 하는 욕심에 저항해야 하고, 신자들을 자신의 추종자로 만들려는 독재의 유혹에 저항해야 하며, 더 큰 교회, 더 많은 사례비, 더 좋은 차를 타려는 속물적인 근성에 저항해야 하며, 하나님의 말을 듣는 것보다 자신의 말을 듣는 것을 더 좋아하도록 부추기는 사탄의 속살거림에 저항해야 한다. 이런 저항이 바로 내적 성찰을 통한 회개이다.
망상의 교리를 만드는 신학자도 회개하라는 요구에서 자유롭지 않다. 많이 배웠다는 교만함에서 나오는 생각의 폭력적인 주입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목의 굳어짐에 저항해야 한다. 이런저런 문제에 결정적인 답을 주는 위치에 있으려는 특별 의식에 저항해야 한다. 만들어진 신들을 찬양하고 고무하며 그들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라도 주워 먹으려 그들의 주변에서 어슬렁거리는 어용학자의 습성에 저항해야 한다. 망상의 동굴로 불려 다니며 받는 특강 비를 은근히 즐기는 거지 근성에 저항해야 한다. 무엇보다 교단 신학을 내세워 성경을 해석하거나, 성경의 뜻을 교단 신학의 범주 안으로만 축소하려는 노예근성에 저항해야 한다.
교회 또한 집단으로 젖어 있는 전통에 저항해야 한다. 이러한 전통이 성경의 의미를 비틀고, 왜곡하고, 잘못 해석하게 하는 실마리를 제공할 경우, 더욱더 저항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교회는 익숙해 있는 관행에 철저하게 저항해야 한다. 관행이 교회를 망상의 동굴로 만드는 주범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관행에 저항해야 하는 것은 너무도 거대한 담을 세운 교단들도 마찬가지다. 관행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괴물이 될 때, 교회도 교단도 더는 성경의 하나님과는 상관이 없는 돌연변이가 될 뿐이다.
개인이든, 교회 공동체든 일그러진 관행에서 벗어나는 것이 바로 회개요, 이런 회개는 저항의 성격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이 저항의 방향이 옳은 곳을 지향하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보다 성경과 이성의 소리를 끊임없이 들어야 한다. 이 소리에 근거하여 갖가지 망상의 관행을 만들어내는 괴물에 저항하는 것, 이것은 하나님 신앙의 또 다른 이름이 아닐까? 이런 저항이 관행의 망상에 찌들어 있는 한국교회를 해방하고 자유롭게 하는 영성이 아닐까?
--- pp.122-124

“고위 성직자의 입에서 나오거나, 또는 선하고 거룩한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은 그리스도의 말씀이다. 그분은 ‘너희 말을 듣는 자는 곧 내 말을 듣는 것’이라고 누가복음 10장 16절에서 말씀하셨다.”(『루터:로마서강의』,208-09)
말씀의 선포와 관련해 목회자와 평신도 사이에는 질적인 차이란 없다는 것이다. 교황의 입에서 선포되는 말씀이라고 해서 무슨 특별한 차원을 갖는 것이 아니다. 아주 미미한 신자의 입에서 선포되는 말씀과 똑같은 차원의 말씀일 뿐이다. 목회자의 입장에서는 드러내 놓고 인정하고 싶은 말은 아니다. 설교자로서의 권위가 흔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만큼 오늘날의 많은 목회자도 성직자라는 특권 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 사실이다.
--- pp.149-150

교황을 최고의 상석에 앉히는 계층 구조적인 성직 제도라는 담으로 인해 전체 기독교계가 타락하게 되었다고 꿰뚫어 본 루터는 이렇게 말한다.
“교황, 주교들, 사제들, 그리고 승려들을 ‘영적 계급’이라고 부르고, 군주들, 영주들, 직공들 및 농부들을 ‘세속적 계급’이라고 부르는 것은 조작된 것이다. 이것은 완전한 거짓과 위선이다. 아무도 이 점에 대하여 놀라서는 안 된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영적 계급’에 속하며, 그들 사이에는 직무상의 차별 외에 아무것도 없다.”(WA6, 407)
루터에 의하면 성직자와 평신도를 나누는 것은 조작된 것이다. 그런데 이런 조작된 구분이 아직도 교회 내에 존재한다. 상명하복이라는 문법이 지배하는 조직문화에 익숙해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목사는 주군이고, 신자는 주군을 섬기는 대가로 하늘의 상을 약속받은 봉신이라는 봉건적인 사고가 여전히 남아 있다. 이런 사고를 낳게 한 조작된 교리와 제도에 루터는 이의를 제기하며 이런 구분의 담을 헐어버린다.
--- pp.150-151

아무리 베드로를 계승하는 교황이라고 할지라도, 아무리 신학을 많이 아는 박사라 할지라도, 아무리 수도원적인 삶을 사는 경건한 자라 할지라도, “믿음이 없는 자는 제사장이 아니다.”(WA12,316) 베드로를 계승하는 자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자라야 “거룩한 영적 제사장이며, 참된 그리스도인이요, 반석 위에 세워진 사람”이다.(WA12,307)
간단한 말이지만, 사실 두려운 말이다. 목회자라고 하여 반드시 믿음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데도 제사장의 일을 잘하는 자로 간주하는 세상이기에 더더욱 두려운 말이다. 어쩌면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없기에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 아니라, 자신의 왕국으로 만드는 것은 아닐까?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없기에, 하나님 나라가 아니라 당회장 나라가 임하고, 당회장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갈망하는 것은 아닐까?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없기에 그리스도의 법이 아니라, 자신의 목회철학과 목회소신으로 교회를 경영하는 것은 아닐까? 오늘날의 교회는 루터가 그렇게도 갱신하려고 몸부림쳤던 중세 교회를 어쩌면 그렇게도 빼닮았는지 모르겠다.
--- pp.158-159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존재하는 곳은 수도원 안에서만 가능한 것이 아니다. 루터는 하나님의 말씀을 깊게 읽고, 삶으로 녹아내야 하는 수도원 안에서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이 왜곡되고, 변방으로 밀려나고, 결국 잊히는 실상을 경험하였다. 하나님 말씀의 상실은 곧 수도원의 부패로 이어졌음을 삶으로 체험하였다. 수도원의 타락은 전 기독교의 타락과 그 맥을 같이 한다. 그래서 수도원과 도서관에 갇혀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해방하는 일에 주력한다. 이것을 자신의 삶으로 살아내기 위해 20년 가까이 걸쳤던 수도복을 벗어버리고 수도원 밖으로 나온다. 이 과정에서 그가 겪은 고난과 시련은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욥처럼 자신이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실존적인 신음과 탄식이 끊이지 않는 길이었다. 그러나 그는 거대한 여리고 성을 향해 소리 내는 돌이 되어 수도원 밖에서 수도원 안의 삶을 살아낸다. 이것이 만인 사제직 이론이 담고 있는 본질적인 의미다.
이 의미를 우리는 바르게 되새겨야 한다. 우리는 말씀에 복종하고, 말씀의 탈을 쓴 거대한 세력에 저항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세상 속 수도사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순종적인 죽음을 통해 우리에게 값없이 선물로 주어진 값비싼 은혜를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삶으로 살아내야 하는 세상 속 수도사다. 이 값비싼 은혜를 값싼 은혜로 둔갑시키는 자신의 습관과 교회의 관행에 대해 치열하게 싸워야 하는 세상 속 수도사다. 우리는 하나님과 돈 장사를 하는 모든 성직매매를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몰아내고, 쓰리지만 즐겁고 유쾌하게 자신의 내면을 성찰하는 세상 속 수도사다. 우리가 매일 걷는 세상 속 도상의 길에는 우리를 넓은 길로, 쉬운 길로, 편한 길로 가자는 유혹이 즐비해 있다. 이 길을 세상 속 수도사로서 바르게 걷기 위해 우리는 회개와 기도와 성경 읽기로 길을 닦고 또 닦아야 한다.
우리는 수도원 밖에서 수도원 안의 삶을 살도록 부름을 받은 영적 제사장이다. 이 제사장으로서의 삶을 제대로 살아내는 것, 그것이 루터의 종교 개혁적 의미를 뜻깊게 새기는 것이다. 그리고 세상을 지배할 뿐만 아니라 교회 안에서도 주류로 자리 잡고 있는 비성경적인 관행에 저항하며, 교회를 살리는 성경의 소리에 복종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루터는 수도원적 피안의 삶을 이 세상에서의 피안적 삶으로 전화시키고 그런 삶을 살았다.
--- pp.162-164

“기독교 공동체가 확실하게 인식돼야 하는 곳은 순수한 복음이 설교 되는 곳이다. 군대의 깃발이 어떤 군주와 군대가 진을 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확실한 표지인 것처럼, 복음도 그리스도와 그의 무리가 어디에 있는지를 알도록 해주는 확실한 표지이다. … 복음이 있는 곳에 그들이, 이들의 수가 아무리 적고, 아무리 죄가 있고 결함이 있을지라도,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우리는 확신한다. 마찬가지로 복음이 없고 인간적인 가르침이 지배하는 곳에서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이들이, 이들의 수가 아무리 많고, 아무리 거룩하고 경건한 삶을 산다고 할지라도, 우쭐대는 이방인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사실로부터 다음과 같은 결론이 명약관화하게 나온다: 주교들, 성직자회, 수도회, 그리고 일반 신자회는 오래전부터 그리스도인도 아니며, 기독교 공동체도 아니었다. 비록 그들이 그런 이름을 일반적으로 모든 것에 사용할지라도 말이다.”(WA11,408)
오늘 한국교회가 되새겨 들어야 하는 말이 아닌가? 말씀이 상실된 교회는 아무리 대형교회라 할지라도 이교의 신전에 불과하다니! 말씀이 아니라 기독교 전통과 교리에 더 방점을 두는 설교자는, 아무리 정통신학교를 나오고 기독교 전통을 견고히 세우는 사역을 한다고 할지라도, 이교 사제에 불과하다니! 이런 교회를 다니는 신자는 아무리 거룩한 삶을 산다고 할지라도 이교도에 불과하다니! 가슴이 서늘해진다.
--- pp.189-193

“열광주의자들이 지배적인 곳이라 할지라도, 만일 이들이 말씀과 성례를 부정하지만 않는다면, 이곳에서도 거룩한 교회는 존재한다.”(WA40/1,71)

루터에게 교회는 누가 있느냐가 중요하지 않았다. 적그리스도라고 신랄한 비판을 받던 교황이나 주교이든, 이단이라는 정죄를 받던 열광주의자이든 교회의 거룩성과 아무 관련이 없다. 중요한 것은 말씀이 바르게 선포되고, 성례가 바르게 집전되는가이다. 만일 이 두 가지만 제대로 된다면, 이단적이라 간주하는 곳도 거룩한 교회일 수 있다.
선을 넘은 말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위험한 말이다. 왜냐하면 이 말을 뒤집어 말하면, 말씀이 바르게 선포되지 않는다면, 교단적으로는 정통교회에 속하고, 심지어는 유명한 교회라 할지라도 거룩한 교회가 아니라는 말도 되기 때문이다. 또한 이단으로 정죄를 받는 사이비 교회라 할지라도 그곳에서 말씀이 바르게 선포되고 성례가 바르게 집전된다면, 그 이단 교회도 거룩한 교회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 p.197

말씀을 선포하지만, 사람들을 즐겁게 하려는 마음과 사람들로부터 좋은 설교를 한다는 평판을 듣고자 하는 갈망에서 한다면, 그것은 실은 말씀을 바르게 선포하는 것이 아니요, 그곳에 교회는 이미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도 오늘날 신자들은 이런 설교와 이런 교회를 얼마나 좋아하는가? 이런 인간의 실상을 파악한 루터는 이렇게 기도한다.
“하나님이시여, 모든 사람을 즐겁게 하고, 모든 사람으로부터 좋은 평판 듣기를 즐기려는 설교자들로부터 우리를 지켜 주옵소서.”(WA28,530-31)
교회는 모든 사람을 즐겁게 해주는 곳이 아니다. 설교 또한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서는 안 된다. 교회는 모든 사람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곳도 아니다. 설교 또한 마찬가지다. 그런데도 교회가 이런 종류의 프로그램으로 채워지고, 설교가 사람들을 만족시켜주려는 방향으로만 나아간다면, 이런 곳이 말씀이 바르게 선포되는 교회일까? 교회의 자리가 실종의 위기로 치닫는 것은, 루터가 간파한 것처럼, 어쩌면 좋은 평판을 듣고자 하는 목회자의 갈망과 연관이 있는 것은 아닐까? 목회자가 익숙해져야 하는 것은 말씀을 바르게 선포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말씀과 정직하게 씨름해야 한다. 사람들로부터 좋은 설교자라는 평판을 듣기 원하는 것은 말씀이 아니라, 오직 사람들과만 씨름하는 것이다. 이것이 교회의 실종을 가져오는 비극의 시작이다.
--- pp.200-201

“당신은 당신 자신의 책들이나, 가르침이나, 쓴 것들에 대해 우쭐거리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까? 또한 사람들이 당신을 칭찬하는 것을 매우 좋아합니까? 칭찬을 받기 원하는데, 그렇게 되지 않으면 슬퍼하거나 의기소침해집니까? 당신이 그런 부류의 인간이라면, 당신 자신의 귀를 만져 보십시오. 아름답고, 크고, 길고, 털이 많이 난 당나귀 귀를 발견할 것입니다. 그 귀를 황금 방울로 장식해 보십시오. 그러면 사람들은 당신이 가는 곳마다 당신의 소리를 듣게 되고, 손가락으로 당신을 가리키며 ‘보라, 저기 아주 값진 책을 쓰고, 훌륭하게 설교할 수 있는 멋진 짐승이 지나간다’고 말할 것입니다. 바로 그 순간 당신은 행복해하고, 천국에서도 행복에 겨워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그곳에는 사탄과 그의 부하 천사들을 위해 지옥 불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영광을 추구하고 교만 하고자 하는 것을 그만두십시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십니다.’(약 4:6) 영광은 영원토록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WA50,660-61)
우쭐대고 싶은 마음, 칭찬받고 싶어 하는 마음은 우리 모두에게 보편적인 욕구가 아닐까? 칭찬을 기대했는데, 칭찬을 받지 못하면 의기소침해지는 것도 인간이라면 가질 수 있는 자연적인 반응이 아닐까? 루터가 너무 높은 기준을 제시하는 것은 아닐까? 당연히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하는데, 칭찬에 인색할 필요는 없다. 격려 차원의 칭찬은 치유와 성장을 위해 좋은 약이다.
그러나 목회자가 칭찬을 기대하며 설교를 하거나, 책을 출판한다면, 이것은 ‘영광의 신학’(theologia gloriae)을 추구하는 것이다. ‘보라, 저기 아주 값진 책을 쓰고, 훌륭하게 설교할 수 있는 멋진 짐승이 지나간다’는 말에 목을 매는 자는 십자가보다는 영광을, 약함보다는 강함을, 어리석음보다는 지혜를 더 사랑하여 결국은 십자가와 고난을 미워하고 자신의 공적과 영광을 추구하는 자가 아닌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인식하고자 하며, 하나님의 진리를 십자가 밑에서 그리고 죽음을 통해 배우는 ‘십자가 신학’(theologia crucis)을 유일한 신학으로 인정하는 루터에게 있어 이런 목회자는 사탄이 닦은 길을 가는 자이다. 아, 오늘 우리 목회자들이 얼마나 많이, 얼마나 자주 이 길을 걷고 있는가!
--- pp.202-206

“나는 우리 목사-주님을 믿지 않는다. 그는 나에게 그리스도라 불리는 다른 주님에 관해 말한다. 그는 나에게 그분을 보여준다. 그가 나를 바로 그 옳은 스승이요 교사인 하나님의 아들에게로 데려가는 한에서만 그의 입술을 볼 것이다.”(WA51,191)
말씀을 바르게 선포하는 것은 사실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것이다. 설교란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것이다. 이 그리스도가 드러나는 곳에 바로 교회가 있다. 청중은 자신들의 귀를 즐겁게 해주는 말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말씀에 익숙해져야 한다. 설교자는 ‘나를 보라’고 외치는 자가 아니라, 세례 요한처럼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자이다. 그 때문에 청중은 설교를 들을 때, 설교자를 보지 않고 그가 가리키는 그리스도를 보는 경청을 해야 한다. 이런 들음을 통해 그들은 참된 신자가 되고, 이런 신자가 모인 교회는 참된 교회가 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설교자를 왕으로 만들고 그를 섬기는 우상숭배에 빠질 수 있다. 이것이 루터가 거부했던 ‘교황 교회’였다.
--- pp.206-207

설교와 성경 공부, 그리고 그 외 목회 활동을 통해 나를 보라고 부추기는 ‘목사-주님’의 시대는 지나갔다. ‘참 주님’과 신자 사이에 자신의 자리를 매김하던 ‘목사-주님’의 시대 또한 지나갔다. 그런데도 여전히 그런 ‘목사-주님’이 활개를 치는 것은 종교개혁 이전의 ‘교황 교회’를 모방하는 교회에서만 가능하다. 봉건주의적 사고방식에 갇혀 있는 교회에서만 가능한다. 부자세습을 해도 무조건 충성을 외치는 십자군병들로 차고 넘치는 교회에서만 가능하다.
이러한 교회에서는 성경의 진리가 상석에 앉지 못하며, 세상의 상식도 아무 역할을 하지 못한다. 오직 ‘교황 목사’의, ‘교황 목사’에 의한, ‘교황 목사’를 위한 논리만이 교회를 감싸고 있을 뿐이다. 건강한 이성의 소리는 말할 것도 없고, 성경을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보다도 ‘교황 목사’의 말에 더 순종해야 한다는 소리가 진리로 메아리친다. 세속적인 너무도 세속적인 냄새로 가득 차 있으면서도, 거룩한 척 흉내를 내는 이런 교회의 특징은, 교회의 자리를 세상 가운데 두지 않고 스스로 구별하여 만든 방주에 둔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쇠해도, 자신들의 교회는 흥해야 한다며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 아니라, 영광의 방주와 그 방주의 상석에 앉아 있는 ‘교황 목사’만 바라보게 한다. 그래서 세상은 교회의 자리는 어디인지 묻는다. 중세 때만이 아니라 지금도 말이다.
--- pp.210-211

루터에게 ‘사랑스럽고, 소중한 소녀’이던 교회의 현주소는 광야이다. 이곳에서 사탄의 집요한 공격을 받으며 비로소 ‘어머니’로 성숙한다. 신실하신 하나님은 광야의 존재인 교회를 세상 끝날까지 지키고 보호하실 것이다. 이것이 루터가 자신에 의해 시작되고, 광야로 내몰림을 당하고, 각종 시련과 박해를 받으며 약 20년을 지나온 교회를 향한 고백이다. 어린 소녀에서 각종 세속적, 영적인 세파를 견디며 어머니라는 보다 원숙한 여인이 되었지만, 여전히 머물러야 하는 곳은 광야다.
이 광야가 바로 교회의 자리다. 때론 사탄의 수중에 더 들어가는 것처럼 느끼기도 하고, 때론 하나님의 편에 더 기운 것으로 체험되기도 하는 광야 생활, 이것이 교회의 존재 방식이다. 사탄과 하나님 사이에서 하루에도 수십 번씩 광야의 명과 암에 노출되는 현실, 이것이 교회가 받아들이고 감내해야 하는 실존이다. 이러한 광야의 일상은 교회에 불행이 아니다. 오히려 행복이다.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경험하는 장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떠남과 부재를 경험하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의로우심,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맛보는 은혜의 자리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위기 속에 있는 한국교회가 ‘사랑스럽고, 소중한 소녀’를 찾기 위해 가야 할 곳, 그곳은 광야다. 그곳엔 ‘회개하라’는 2,000년 전의 소리가 아직도 원시의 힘을 가지고 울려 퍼지고 있다. 500년 전에 루터는 95개 논제의 첫 번째 조항을 ‘회개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상기시키며 우리의 발길을 또다시 이 광야로 초대한다. 이 광야 길은 부끄럽고 얼룩진 교회의 창을 닦고 닦으며 참회록을 써야 하는 지난(至難)한 길이다. 속을 뒤집어 보이는 것이 당장은 한국교회를 부끄럽게 하고 피해를 주는 것 같지만, 실은 밝아오는 브니엘의 여명을 보게 하는 희망의 길이다. 얍복강을 건너게 하는 희망의 길이요, 시시포스의 운명을 넘어 참된 자유를 누리게 하는 희망의 길이다. 이 희망의 도상에서 우리는 ‘사랑스럽고, 소중한 나의 여인’을 다시금 만나게 될 것이다.
--- p.213

‘하나님’이란 말을 들먹이며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것을 우려먹었는가? ‘천국’이나, ‘구원’이라는 말을 팔며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것을 우려먹었는가? ‘심판’이나, ‘지옥’이라는 공갈협박으로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것을 우려먹었는가? ‘은혜’나, ‘신앙’이란 말로 포장하여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것을 우려먹었는가? ‘치유’나, ‘회복’이란 말로 현혹하며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것을 우려먹었는가?
그런데 성경의 예수는 바로 이 우려먹는 삶에 익숙해 있던 종교지도자들에게 일침을 가하지 않았던가? 종교적인, 너무도 종교적인 말로 사람들을 세뇌해 그들을 종교적인 노예로 만들고 그들 위에 군림하던 종교 권력들의 종교성에 죽음으로써 저항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기독교의 역사를 돌이켜 보면 역사의 중심에 서 있던 주류 세력은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한 거룩한 진리의 수호자들로 평가되었다. 그리고 그들에게 빌붙어 단물을 빼먹던 자들에 의해 그들의 진리는 하늘을 찌르는 바벨탑으로 세워지고 가장 인기 있는 시대정신으로 팔려나갔다. 대신 예수의 본정신을 붙들려는 자는 진리를 위협하는 이단아로 단죄를 받고 하나님께 버림받은 믿음 없는 자로 낙인찍혔다. 신물이 나지 않는가? 아직도 이런 역사가 되풀이되고 있다는 것이! 예수의 본정신이 아니라 예수의 이름을 사칭하는 장사꾼들이 이런저런 이름으로 만들어낸 예수 이야기가 시장의 진열대를 독식하고 있다는 것이!
이젠 ‘그들’이 파놓은 ‘기독교’라는 동굴에서 나와야 할 때가 되지 않았을까? 이젠 ‘그들’이 동굴 벽에 새긴 ‘기독교 교리’에서 떠나야 할 때가 되지 않았을까? 이젠 ‘그들’이 동굴 속 신화로 만든 ‘예수 이야기’에서 귀를 돌려야 할 때가 되지 않았을까?
나는 몇 년 전부터 고민하고 있다. 기독교가 이 정도로 얄팍한 종교인지에 대해. 은혜니, 구원이니, 치유니 하는 말들이 이 정도로 값싼 싸구려 상품들인지에 대해. 교회에서 말하는 복음이 이 정도로 상식이 없는 부끄러운 언(言)인지에 대해.
--- pp.236-239

지금 한국교회의 하나님은 교회 안에 거처를 정하지 못하고 교회 밖에서 서성거리는 존재로 전락하고 있다. 하나님 모양을 한 비오스들이 하나님을 추방하고, 그 자리를 점령해가고 있기 때문이다. 비오스를 본질로 간주하는 교회가 하나님 신앙이 아니라 비오스 신앙을 팔고 있고, 그 결과 신자들은 하나님을 믿는 신자들이 아니라, 비오스를 따르는 신자들이 되어 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교회에서 추방된 하나님은 이런 교회를 떠나 당신 자신에게로 귀향하기를 원하는 신자들을 찾고 계신다. 그리고 그들의 광야 길에 길동무로, 버팀목으로 함께 하신다.
--- pp.255-256

우리는 교회의 역사를 통해 잘 알고 있다. 신앙의 이름으로 ‘나와 너’를 이룬 공동체가 얼마나 자주 맹목적인 집단 이성에 사로잡혀 하나님이 아니라 바알을, 하나님이 아니라 금송아지를,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을 신으로 추종하는 일들이 일어났는지를 말이다. 바로 이러한 실상 때문에 교회는 공동체적으로 ‘자기 안으로 들어가’ 자신을 성찰하며 자신의 현주소를 비판적으로 읽어야 한다. 내적 성찰을 개인의 차원으로만 유폐시키고 공동체적인 성찰을 소홀히 하는 교회는 ‘비오스’를 ‘우시아’로 착각하는 오류에 빠지기 쉽다. 공동체적인 성찰이 없는 교회는 자기 최면에 빠져 모든 교회의 관행을 하나님의 은혜로 둔갑시키는 비이성적 집단으로 몰락할 가능성이 있다. 신앙이란 이름으로 생각하는 이성에 폭력을 가해도, 순종이란 이름으로 집단적인 맹종을 강요해도 그저 ‘아멘’만 외치는 종교적인 노예집단이 될 위험이 있다.
이런 것이 현실이 된다면 그것은 교회의 비극이다. 교회라는 이름은 가지지만 실은 교회가 아닌, 신자들을 ‘그것’으로 전락시키는 사기 집단이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비극을 피하려 한다면 믿음으로 ‘나와 너’를 이루는 교회는 공동체적인 자기 성찰을 치열하게 해야 한다. 매년 쌓이는 교회의 전통을 ‘우시아’의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상대화시키는 작업을 끊임없이 해야 한다.
--- pp.255-257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교회란 ‘우시아’가 아니라는 것이다. 교회는 하나님 신앙을 풍성하게 해주는 ‘비오스’일 뿐이다. 교회의 머리이신 주님께서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교회에도 적용할 수 있다.
‘교회가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지, 사람이 교회를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교회의 성장을 위해 착취해도 되는 소모품이 아니다. 오히려 교회가 그 안에 있는 사람을 사람 되게 하는 역할을 해야 하는 ‘비오스’다. 따라서 교회를 절대화시키려는 모든 유혹에 저항해야 한다. 만일 사람이 교회를 위하여 존재하게 되면, 이런 교회는 본질은 내팽개치고 비오스의 장단에 춤을 추는 우상숭배의 산실이 된다. 본질로 귀향하는 신자들이 모이는 곳이 아니라, 존재를 상실한 허수아비들만 드나드는 종교건물이 된다.
‘비오스’가 아니라 ‘우시아’로 돌아가는 떠남은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거대한 교회 문화에 대한 거부와 저항을 의미한다. 이 저항이 아름다운 귀향이 되기 위해 우리는 많은 눈물을 흘려야 한다. 개인적이며, 공동체적인 성찰에서 나오는 눈물은 끝내 기쁨으로 단을 거둘 것이다. 떠남으로서의 귀향이 이런 희망을 노래하는 축제의 길이요, 아버지와 함께 즐기는 향연의 장이다.
--- pp.257-258

저항과 복종, 그 사이에 있는 우리는 무엇에 저항하고, 무엇에 복종해야 하는가? 교회의 관행이 성경의 소리를 짓누를 때, 목사-주님의 카리스마적 설교가 성경의 진리와 부딪힐 때, ‘그리스도인-교’가 ‘그리스도-교’를 광야로 추방하고 시대정신을 지배할 때,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한 ‘비오스’가 ‘우시아’를 몰아내고 교회의 상석을 지배할 때 우리는 어느 편에 서야 하는가? 교회의 거대한 탁류는 마땅히 저항해야 하는 것에 저항하지 못하고 마땅히 복종해야 하는 것에 복종하지 못함에서 오는 것은 아닐까?
교회의 희망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아니, 교회에 희망이 있기는 한 것일까? 어쩌면 희망을 붙잡기 위해 희망 없는 교회를 떠나야 하는 것은 아닐까? 교회를 떠나는, 아니 떠날 수밖에 없는 절망, 이것이 참된 교회로 돌아가는 길에 불을 밝히는 희망의 등대가 아닐까?
저항과 복종의 또 다른 말이 된 떠남과 귀향, 이 역설이 새로운 희망의 물꼬를 트는 예수 그리스도의 길이요, 우리가 가야 할 길이 아닐까?
--- pp.259-2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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