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 영혼입니다. 이 사람은 영혼의 목마름을 느꼈던 것입니다. 세상의 부귀영화로는 채울 수 없는 영혼의 목마름을 느꼈던 것이고, 그 갈증을 채워 줄 수 있는 분은 바로 예수님이시라는 것을 알았고 그래서 은밀하게 예수님을 찾아왔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니고데모에게 ‘새로 나야 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과 함께 머물면서 서서히 메울 수 없는 우물이 생겨난 것이라고 느껴집니다. 처음에 그 우물을 들여다보니 거기 처음에 무뚝뚝했던 자기의 모습이 보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거기를 향해 돌멩이를 던져 보기도 했을 것입니다. 자기의 그런 모습이 싫었겠지요. 그러나 깨진 우물이 시간이 지나면 다시 아문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다시 아문 그 우물에는 이제 자신의 얼굴이 아니라 그분의 얼굴이 달처럼 떠오르고 향기가 찰랑거렸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외쳤을 것입니다.
그가 나에게 남긴 우물,
그가 그리울 때면
나는 예서 물을 떠 목을 축이며 산다네.
--- p.34
가로수 사이로 자전거를 타고 오는 우체부, 그리고 그의 야곱 신부님을 부르며 편지가 왔다고 외치는 소리는 잠자는 영혼을 깨우는, 적막 속의 울림입니다. 레일라가 낡은 가방을 들고 사제관에 가는 모습과 더불어 처음 나타나는 숲길이 저에게 향수 같은 친밀함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레일라와 야곱 신부님과의 첫 만남. 투박함과 거침, 세세함과 부드러움이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으면서도 대비를 이루면서 묘한 분위기는 숨을 죽이게 합니다. 식탁에 마주 앉은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긴장, 그리고 이어지는 식사 안에서의 나눔은 대화가 별로 없지만, 거기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 (중략) -
오래전에 제가 에밀리 디킨슨의 시를 ‘찢어지는 가슴을 안아 진정시킬 수 있다면’이라는 제목으로 옮긴 적이 있습니다.
“나 한 사람의 찢어지는 가슴을 안아 진정시킬 수 있다면
나 정녕 헛되이 산 것이 아니어라.
나 한 사람의 욱신거리는 상처를 어루만질 수 있다면
삶의 고통을 달래 줄 수 있다면
한 마리의 가냘픈 울새를 도와
그의 둥지에 다시 올려놓아 줄 수 있다면
나 정녕 헛되이 산 것이 아니어라.”
--- pp.95~102
그런 착한 사람, 의인 토빗이 ‘아픔’을 겪고, ‘외로움’에 시달리며 ‘두려움’에 떨게 됩니다. 유대교는 참 종교입니다. 토빗기는 하느님을 믿으면 ‘아픔’, ‘외로움’, ‘두려움’이 없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다만 인간에게 일어나는 그런 일들을 통해 하느님께서 함께 계신다고 들려줍니다.
토빗은 지위에서 쫓겨나고 재산도 몰수당하고 도망가야 하는 처지가 되지만, 그래도 용기를 잃지 않고 계속 선행을 베풀며 하느님께 신뢰를 둡니다. 우리는 토빗에게서 참 신앙인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눈이 멀게 되는 아픔을 만나며 모두의 손가락질을 당하는 외로움을 겪고 아들의 장래에 대한 두려움의 상황 안에서도 하느님의 뜻을 알아듣고, 그것을 받아들이려 애쓰며 간절한 기도를 드립니다
--- p.159
‘행자라망은 구피상피’라는 말은 수행하는 사람들, 다시 말해, 불교에서는 스님, 가톨릭에서는 수도자, 사제들은 비단옷이 아닌 신분에 맞는 옷을 입어야 한다는 말이지요. 옷도 단순히 의복이 아니라 상징적인 의미이고, 분수에 맞는 행동거지를 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라망’은 비단옷이라는 그물에 걸리는 상황, 부자유를 말합니다. 사실 개가 코끼리 가죽을 뒤집어쓰면 얼마나 무겁고 부자유스럽겠습니까? 수행자가 무엇 때문에 수행합니까? 근본적으로 자유롭기 위해서가 아닙니까? 물론 내적인 자유이지요.
일타 스님은 ‘라망’을 애욕의 망으로 보고, 수행자가 애욕 망에 걸리는 것은 바로 마치 새가 그물망에 걸리는 것으로 해설하시는데, 일부 공감하지만 저는 단순히 ‘애욕의 그물’보다는 조금 더 넓은 의미의 ‘부자유’로 보고 싶은 것입니다. 원효대사의 일화를 소개하면서 ‘라망’의 의미를 되새기고 싶습니다.
--- pp.182~183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마음 안에 당신의 법을 새겨 놓으셨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렇지요. 바로 양심입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은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인간은 마음 깊은 곳, 바로 양심 안에서 인간 스스로 제정하지 않았지만 지켜야만 하는 법이 있음을 발견한다. 그 목소리는 끊임없이 그에게 사랑하도록 부르며 선을 행하고 악을 피하도록 요청하며 바로 그 순간에 이것은 행하고 저것은 하지 말라고 내면으로부터 말해 준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마음 안에 하느님께서 새겨주신 법이다. 인간의 존엄성은 바로 이 법을 지키는데 달려있으며 바로 그것에 의해 심판받을 것이다. 양심은 바로 인간의 가장 내밀한 지성소이다. 내면 깊은 곳 하느님의 목소리가 반향 되는 거기에서 인간은 하느님과 오로지 홀로 대면하게 된다
--- pp.249~250
탁월한 화가이기도 했던 지브란은 “나는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리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꿈꾸지 않았다.”라고 말하기도 했지요. 그는 시와 그림 안에 영혼, 순수, 그리고 사랑을 담고 영원을 향한 열정을 살았기에 ‘영혼의 시인’이라고 불리나 봅니다. 저는 지브란이 전시회를 했을 때, ‘아메리칸’에 실렸다는 비평을 읽고, 그의 그림이 궁금해졌습니다. 사진으로가 아닌 진품을 보고 싶은 것이지요.
“그의 작품은 삶과 죽음은 결국 하나라는 신비 앞에서 인간의 영혼이 자의식의 고독에 눈뜨는 과정을 상징하고 있다.”
--- p.278
가넷 새들을 오래 바라보면서 깊은 명상에 잠기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이 자기들을 바라보는 것에 전혀 개의하지 않고 자기들의 삶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그들이 다른 사람이나 새들의 눈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사랑을 나누는 모습이 깊은 인상으로 저에게 남아 있습니다.
아, 무리와이 비치, 검은 모래사장이 끝없이 펼쳐지는 곳. 가넷의 비상하던 곳. 아니, 가넷이 서로 사랑을 나누던 곳. 나, 그대를 영원히 잊을 수 없으리. 나 그대를 영원히 사랑하리. 가넷, 나의 사랑이여! 나에게 자유의 의미를 되새겨 준 영원한 나의 친구여.
--- p.330
“당신이 바다에 물방울 하나를 떨어뜨리면 그 물방울이 바다가 된다. 이와 같이 우리 영혼도 마찬가지이다. 우리 영혼이 하느님 안에 떨어져 잠길 때, 우리 영혼이 하느님이 된다.”
우리 영혼이 하느님이 된다는 말은 중세 당시의 ‘하느님 관’으로는 아마 예수님이 하느님이 당신의 아빠, 아버지라고 한 것만큼이나 놀라운 말이었을 겁니다. 제가 놀라는 것은 타이가 에크하르트의 글을 읽었는지도 모르지만, 그와 굉장히 비슷한 표현을 합니다.
타이가 말합니다.
“우리는 모두 물을 근원으로 하는 물결이다. 물결로서 서로를 충분히 바라보는 데 시간을 갖는다면, 우리가 물로 만들어져 있고, 서로를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 p.3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