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찬히 관찰해 보니 시모키타자와에는 뭐 하는 사람인지 정체 모를 어른들이 요란한 차림으로 대낮부터 어슬렁거렸다. 술집도 초저녁에 이미 북적거렸다.
--- p.18
그래서 정작 내가 꿈꾸었던 생활은 하지 못했다.
인생의 그런 시기는 완전히 지나간 때였다.
그런데도 가끔 늦은 밤에 아이와 함께 쇼핑가를 거닐다가, 아직 열려 있는 아는 사람 가게에 훌쩍 들어가 가볍게 한잔할 때, 내 마음속에서 저 ‘70년대의 꿈’의 조각이 반짝 빛나곤 했다.
--- p.20
이미 부모님이 없는 나는 알고 있다. 머지않아, 일시적이지만 아이는 부모를 떠나 자기 세계로 간다. 부모가 아예 없는 세계다. 그곳에서 여러 가지 체험을 하는 동안, 부모는 만나면서도 만나지 않은 듯한 느낌이 계속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다시 마주했을 때, 부모의 인생은 이미 종반에 접어들어 있어, 어렸을 때처럼 추억을 소중하게 여기게 된다.
--- p.41
나는 그다지 뒤를 돌아보지 않는 편이다.
바쁘다는 이유도 있으니까, 늘 앞으로 전진.
다만 하는 일이 그래서 늘 머리 안에 아무튼 많은 것을 보존하고 있다. 진공 팩에 공기와 바람 냄새와 그때의 기분까지 모두 담아서.
--- p.49
할머니가 있을 때는 파릇파릇 기운차게 자랐던 식물들.
길 건너 2층집의 창가라서, 내 마음대로 물을 줄 수도 없다. 매일 바라보는 눈앞에서, 그들은 완전히 메말라 버렸다.
나는 끝나 가는 것의 아름다움을 느꼈다.
이제 곧 우리 부모님에게도 닥칠, 언젠가는 내게도 다가올, 사그라지는 무언가의 철학 같은 것.
그런 느낌이 들었다.
--- p.53
하지만 앞으로 살아가는 날들 속에서도, 두 팔을 활짝 벌리고, “네네, 그렇게 하세요.” 하며 상대에게 양보하는 일이 조금씩은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때를 봐서, 가족이나 친구들에게 다소나마 그렇게 하고 싶다.
돈이나 육체는 쉬이 넘겨줄 수 없지만, 시간과 마음은 가볍게 양보할 수 있다면 좋겠다.
--- p.74
아이가 어렸던 시절이 그립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어렸을 때 매일 읽고 가지고 놀았던 그림책과 장난감을 보면 가슴이 뭉클해지지만, 그래도 지금의 아이를 만날 수 있어 기쁜 것과 마찬가지다.
나의 인생, 지금 내가 갖고 있는 것은 ‘지금’이라는 시간뿐이니까.
--- p.117
쓰키마사에서는 어린 손님이 오면 나갈 때 사탕을 준다.
우리 아이는 그 별 모양 사탕을 언제나 기대하고 갔다.
“아이들이 크면서, 이제 사탕은 필요 없다고 하는 날이 오더군요. 그 과정을 죽 지켜보았어요. 기쁘기도 하고, 왠지 아쉽기도 하고. 이 아이에게도 언젠가 그런 날이 오겠지요.”
--- p.126
그러나 또 하나의 나는, 정말 그런 생활을 하고 싶었다.
얌전하게 시집가서, 혼인신고도 하고, 사람 돌보기를 좋아하고, 수동적이며 어리광도 부리는, 만약 다르게 자랐다면 존재했을 나.
그 나는 과연 어떤 것을 행복이라 여기고, 뭘 후회할까?
그 비 내리던 밤, 부모님과 함께 살았던 우에노 거리에서, 또 하나의 내가 외쳤던 그 인생은 어디로 가 버린 것일까?
--- p.155~156
나는 동물을 ‘존경한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간보다 훨씬 대단한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동물의 가장 이상적인 죽음은 노쇠로 인한 죽음이다.
죽기 직전까지 비틀거리며 화장실에도 가는 등 평소와 다름없이 지내다가, 점차 입이 짧아지지만 깡마른 선까지는 가지 않고, 때가 오면 가족이 모이기를 기다렸다가 다 모이면 “그럼 안녕.” 하듯이 숨을 거두는 죽음.
나는 그런 죽음을 몇 번이나 경험했다. 언제나 슬펐고, 함께 지낸 세월이 긴 만큼 상실감도 컸지만, 나중에는 상쾌한 바람 같은 존경심이 생겨나는 죽음이었다.
--- p.144
그때 나는 젊었고, 정신없이 놀지는 않았지만 뭘 배우고 있는지는 몰랐다. 어디에 살고 싶다는 건 꿈같은 얘기에 지나지 않았고, 여권을 만들자는 생각조차 없었다. 자신의 인생을 직시하지도 못했다. 어떻게 살고 싶다는 생각도 없었고, 일단은 작가가 되자, 아무튼 문장의 프로가 되자, 그러면 소설이 나를 어딘가로 데려다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 p.147~148
무엇이든 인터넷이 가르쳐 주는 시대이기 때문에 더욱이, 자기를 고양하는 정보는 이렇게 하나하나 자기 몸으로 운명을 조종하면서 모아야 한다는 것을, 나는 순간적으로 배웠다.
--- p.151
선택할 수 없었던 인생을 꿈꿀 수는 없다. 하지만 선택할 수 없었던 인생이 내게 미소를 지어 줄 때, 언제든 그 인생에 부끄럽지 않게 존재할 수는 있을 것이다.
--- p.156
선물받은 과일이나 계란이 양이 많으면 나눠 먹고, 서로가 만든 책을 우편함에 넣기도 하고, 다녀오라는 인사도 나누고, 기분이 한층 밝아졌다.
--- p.171